2018년 7월 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81번째 강해) 제목: 그러므로 본문: 고린도전서 15:50-58 서론) 군함 한 척이 달도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면에 불빛 보였습니다. 군함 정면에 나타난 불빛을 보고 함장은 빛으로 신호를 보내며 무전을 쳤습니다. “방향을 서쪽으로 10도 돌리시오.” 그러자 상대방으로부터 무전이 왔습니다. “당신이 방향을 동쪽으로 10도 돌리시오,” 화가 난 함장은 다시 신호를 보냈습니다. “난 해군 함장이다. 당장 방향을 바꿔라.” 상대가 다시 신호를 보냈습니다. “난 해군 일병이다. 절대 방향을 바꿀 수 없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해군 함장은 최후의 신호를 보냈습니다. “이 배는 전함이다. 바꾸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그러자 상대방도 마지막 신호를 보냈습니다. “절대 바꿀 수 없습니다. 여기는 등대입니다.” 정영진 박사가 쓴 ‘사람이 따르는 리더, 행복을 부르는 리더’에 나오는 글입니다. 저자는 이 글을 소개한 후에 리더는 결코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목표를 갖고 있음을 부연합니다. 물론입니다. 헌데 저는 이 글을 접하다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물러서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이 있다는 점 말입니다. 무엇일까요? 세상의 식과 방법이 옳다고 윽박지르는 강제하는 폭력입니다. 저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의 방법에 대하여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격려하고 보듬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옳지 않은 세상의 식까지 보듬고 용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단에 있을 때, 정치를 하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해서 이모저모로 세를 불리는 선배였습니다. 어느 정도 세를 불린 선배는 교단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이 선배가 본인의 입장과 다른 정치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일체의 사람들을 세상의 법정에 고발하는 일들을 자행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교회법은 권징을 담고 있습니다. 이유는 교회의 문제는 교회법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법도 경우에 따라 힘이 있는 쪽으로 기울어져 판결을 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것을 세상의 법으로 끌고 나가는 것은 소위가 아주 질 나쁜 행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교회의 성역들을 세상의 법으로 판단하게 만드는 좋지 못한 예후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 쓰는 말처럼 교회가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손 내미는 어처구니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일도 너무나 비상식적인 일들이 자행되기에 억울하기 그지없을 때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분통을 터뜨릴 때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방법에 의지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고린도전서 6: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저는 이 성서적인 권고에 신앙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문제는 현실에서 이 구절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원론적인 이야기만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해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다면 억울하고 힘들지만 하나님께 신원(神願)하십니다. 시편 50편의 기자 아삽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14-15절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 믿기 참 힘들다.’ 지지난 주일에 있었던 담임목사 셀에서 한 지체가 언급한 말이 진정성 있게 들립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은 은혜로 참 쉬웠는데 구원 받은 자로 신앙을 지켜가기는 참 어렵고 힘듭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는 바로 이 곤비함에서 시작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됩니다. 본론) 본문 마지막 절을 먼저 보십시다. 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바울이 기록한 58절은 15장의 최종적인 결론 멘트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부활 신앙을 사수하며 그것을 지켜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어느 부분이 그렇습니까?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앎이라’ 여기에서 말하는 ‘수고’는 무엇일까요? ‘수고’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코포스’는 ‘칼에 손이 베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피 흘리는 상태의 고통을 수반하고 있는 수고를 말합니다. 아마도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서 부활 신앙을 말하는 자들은 지성적이지 못한 무식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두개적인 성향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분파적인 성향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에 부활을 말하는 성도들을 왕따 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런 이유로 부활을 말하고 믿는 자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외롭고 힘든 신앙의 여정을 걸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안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기록된 ‘헛되다.’는 표현도 직역을 하면 ‘텅 빈 상태’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의도는 주 안에서 부활 신앙을 지켜가며 아름다운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달음질이 결코 텅 비어 있는 경주가 아닌 주님이 기뻐하시는 경주를 달리는 것이라고 칭찬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부활을 믿고 달려가는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은 이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세 가지의 당부를 건넵니다. ⓵ 견실하라 ⓶ 흔들리지 말라 ⓷ 힘쓰는 자가 되라 그렇습니다. 부활신앙에 있어서 견고하게 서라고 한 것입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여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신앙을 기초로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 사도는 부활신앙에 목을 걸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하게 권고하고 있음이 본문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부활신앙의 엑기스는 과연 어떤 것이었기에 이토록 천착하며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부활 장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부활 신앙의 클라이막스에 대하여 점검하기로 하겠습니다. 1)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 부활체로 변화 받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50절을 우리는 지지난 주일에 잠시 언급하며 그 의미를 나누었습니다. 부활체로의 완벽한 변화되어 성도들이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한 믿음을 말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혈과 육이 아닌 부활체, 썩지 아니할 부활체로 변화될 것을 믿는 것이 부활신앙이었음을 우리는 지지난 주일에 살폈습니다. 이렇게 선언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그 신비로운 부활의 순서에 대하여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입니다. 본문 51-52절 전반절을 나눕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별 다른 신학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는 부활체로의 부활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5절을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여기에 기록된 ‘자는 자’가 누구입니까? 주 안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데이빗 프라이어 목사는 ‘자는 자’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잠자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정 기간 동안 무의식의 상태에 돌입하는 것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를 의미한다.” 프라이어의 말대로 접근한다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조그마한 신호만 있어도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하는 설명일 것입니다. 그 신호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51절 본문을 통해 살필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소리가 들리면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일어납니까? ‘순식간에 홀연히’입니다. 이 단어들은 흥미롭습니다. ‘순식간에’ 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어떤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를 말하는 원자의 영어 단어 atom을 만들어낸 ‘아토모스’입니다. 또 하나의 단어 ‘홀연히’는 ‘in the twinkling’ 즉 ‘눈 깜짝할 새’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이 다시 완전한 부활체로 살아나는 시공간의 의미는 대단히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는 증언을 뒷받침해 주는 구절이 51절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 부활체로 변화함을. 2) 산 자들 중에 주 안에 있는 자들로 부활체로 변화 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 52절 하반절입니다. “우리도 변화되리라” 바울은 아마도 이 편지를 쓸 때 주님의 재림이 곧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고 성서학자들은 추론합니다. 그래서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주님의 재림이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이루어지면 바울은 아마도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걸 맞는 부활체로 변화될 것이라는 점도 머지않은 장래에 경험하게 될 것을 확신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해서 영어성경의 거의 대부분에서 바울의 단호한 이 대목을 ‘We shall be changed.’라고 번역했는데 주목할 것은 조동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의무를 부여하는 조동사 ‘shall’로 번역했다는 점입니다. 지난 주일 오후 예배 시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유대인들이 고백했던 우리가 어찌할꼬?(What shall we do?) 와 같은 맥락의 선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부활의 믿음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를 발견하게 됩니다. 반드시, 꼭, 결단코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교우들에게 부활체로 변화되는 순서에 대하여 설명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먼저, 그리고 이후에 살아 있는 자가 그 다음의 뒤를 이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부활체로 부활하고 변화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바로 이것을 믿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15장 설교의 막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앞의 두 가지 부활에 관한 연속적인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일하심도 믿는 것입니다. Ⓐ 주님이 사망을 사망하게 하심도 믿는 것입니다. 본문 54-55절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무슨 말입니까?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즉 우리들이 부활체로 부활할 때 사망이 사망되는 것을 보게 된다는 선포입니다. 우리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로마서 6:2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죄 때문에 사망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부활체로 부활하게 되는 날, 우리들의 사망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다가 아주 의미 있게 읽었던 구절이 눈에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0:6-8절을 소개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마리아를 통해 주님아 살아나셨다는 전갈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곳에 도착하여 베드로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세마포였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몸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세마포가 따로 접혀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쌌던 대로’라는 이 번역을 개역판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개켜 있더라” 이 단어의 가장 적절한 해석은 ‘둥글게 말려 있다’(ROLL UP)입니다. 저도 가끔 아내를 도와 수건을 접는데 이렇게 접습니다. 왜 복음서의 이 기사를 상세히 설명합니까? 세마포가 시신에 입혀져 있을 때 그 세마포는 죽음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무덤가에 주님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세마포는 세마포대로, 몸을 감싸고 있었던 세마포는 그 세마포대로 따로 개켜져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개켜져 있었던 세마포를 보는 순간 요한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요 20:8)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이 개켜 놓으신 세마포는 주님의 부활하심의 확실성을 증거 하는 것은 물론 이제부터 나를 감싸고 있는 죽음의 종말을 선언한 의미 있는 증언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사망의 종말을 선언하신 주님이셨기에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4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찬송가 222장의 4절 가사를 아십니까? 음미해 보십시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사망권세 이기도록 지켜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사망이 사망됨을 믿는 자가 부를 수 있는 찬양입니다. 적어도 이 믿음에서 물러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 결국은 성도가 승리하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57절 본문은 감격적으로 아멘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렇습니다. 부활체로의 완전한 변화를 이루시는 주님의 날이 되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기게 됩니다. 성도의 궁극은 그래서 승리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선포를 이미 로마서에서 경험했습니다. 로마서 8:35-39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이깁니다.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깁니다. 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한 때 세간에서 땡 중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유롭게 살았던 중광이라는 승려가 있었습니다. 그의 묘에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이 괜히 왔다 간다.” 우리가 잘 아는 하늘의 시인 천상병 시인의 묘비명은 이렇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나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 하리라” 결론) 이제 설교를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8년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상반기를 결산하고 하반기를 출발하는 결단의 주일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도저히 회복 불능의 죄인으로 삶을 살던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당신의 자녀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다윗이 시편 40:2절에서 고백한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이렇게 우리를 건져주신 주님께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는 우리들인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는 날, 완전한 부활체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것임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활의 능력과 사랑을 베푸신 주님께 우리들이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감사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맥추감사헌금 봉투에 자위하는 금액의 액수를 집어넣고 내 조가 탕감받기를 원하여 헌금하는 것입니까? 기독교는 천박하게 만들지 마십시다. 오늘 내가 드릴 감사는 설교 제목입니다. 오늘 본문 58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내가 하나님께 드릴 감사는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견고하게 부활신앙으로 서는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는 감사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세인 지체들이 드려야 할 감사의 내용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드리는 이 감사는 결코 우리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믿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로다 나의 몸과 마음 주를 갈망하며 이제 내가 주께 고백하는 말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생명의 피난처시니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여호와를 찬양하리 내 평생에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으로 내 손 들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