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79번째 강해) 제목: 분명한 것은? 본문: 고린도전서 15:35-49 서론) 지난 목회 30년의 여정 중에 목사이기에 제일 많이 감당한 사역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장례 예식일 것입니다. 30년 동안, 제가 인도한 장례식만 어림잡아 추려도 약 200회 이상은 될 것 같습니다. 모든 장례가 아프고 엄숙하지만 특별히 목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장례식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의 형태입니다. ① 아이의 장례식입니다. 단백질 이상 형질 증후군으로 인해 간 이식 수술을 했지만 끝내 세상을 떠난 동균이의 장례 예식은 목사로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장례식이었습니다. ② 자살자들에 대한 장례 예식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목회 여정 중에 약 5번 정도를 경험한 것으로 짐작되는 이런 종류의 장례식 역시 정말로 인도하고 싶지 않은 장례식입니다. ③ 젊은 나이에 암이나 교통사고로 인해 세상을 떠난 지체들의 장례를 인도하는 경우입니다. 너무 힘들고 아픈 장례입니다. 오죽하면 장례식을 강사를 초빙하고 싶겠다고 말하겠습니까? 해도 되는 기도인지를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 세 종류의 장례는 다시는 제가 인도하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은 것이 목사에게는 대단히 큰 괴로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사가 된 이래 이렇게 장례를 수없이 인도하다보니 농담 섞인 말로 은퇴 이후 장례 전문 목사가 되어도 괜찮겠다는 실없는 지인들이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장례예배 중에 입관 예배를 인도할 때마다 느끼는 소회가 있습니다. 육체가 참 별 게 아니라는 소회입니다. 정말로 볼품없고 허무한 것이 육체라는 단상이 듭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이 맞습니다. 시편 90:5절입니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아침에 돋는 풀이라는 시적인 표현이 인간의 육체를 지칭하는 데 더 없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순교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베드로의 술회도 인간 육체의 보잘 것 없음을 피력하고 있는 데 적확합니다. 베드로전서 1:24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근래에 저는 최정희 집사의 마지막 육체를 보았습니다. 서정수 집사의 나약한 육체도 보았습니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의 이모님의 육신도 보았습니다. 이들의 육체의 공통분모가 이러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풀의 이미지가 너무나 맞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또 다른 희망적인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부활할 것이라는 공통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은 세밀한 이해에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다음 강해에서 살피겠지만 미리 고린도전서 15:51-52절을 차용하여 읽어보십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바울은 본 서신에서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날에 우리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또 다른 바울의 서신인 데살로니가전서 4:14-18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도 명쾌한 위로를 주는 종말론적인 의미에서의 부활을 확실하게 증언해 주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성경 안의 강력한 내증의 위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그날에 다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질문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할 것을 믿지만 어떻게 부활하느냐? 입니다. 전술했듯이 고 최정희집사의 말기 암 시절의 육체로 부활하는가? 아니면 건강할 때의 모습으로 부활하는가? 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고 서정수 집사의 건강할 때의 육체인가? 아니면 투병 중일 때의 육체인가? 입니다. 분명한 것은 만에 하나 투병 중일 때의 모습으로 그들이 부활한다면 차라리 부활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병든 몸으로 부활을 한다면 부활이 위로이겠습니까? 또 다른 고통이겠습니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우문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설교의 문제 제기는 바로 이곳에서 출발합니다. 본론) 먼저 질문한 것에 대한 답을 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나약했던, 투병 중이었던 모습으로 부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어렸을 때의 모습이겠습니까? 아니면 청년의 때이겠습니까? 장년의 때이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들에게 제기된 특별 계시인 성경의 내증 안에서 찾아 말씀드린다면 답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정직한 답이 될 것입니다.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늘 설교 제목을 도입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부활을 할 때 우리들이 부활하는 형상은 참 괜찮은 형상이 될 것이라는 답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답에 대한 근거를 찾아보겠습니다. 본문 35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여기에 ‘누가’라고 표현된 의문대명사는 지난 주일 설교에서 언급했던 사두개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 안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지칭합니다. 더불어 헬라적인 문화를 뿌리 깊게 신봉하는 헬라 철학적인 신자들일 것입니다. 부활에 대하여 믿지 않는 자들 말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곧바로 이들의 질문에 응대합니다. 페이소스가 엿 보이는 바울의 말은 ‘바보들아’로 시작합니다. 36절 시작을 봅니다. “어리석은 자여!” 여기에 기록된 단어 ‘어리석은 자여!’라는 이 호격의 단어를 조금 더 쉽게 표현하면 ‘바보들아!’가 더 맞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질문 자체를 우문으로 취급했다는 정황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바보처럼 질문하는 자들을 향하여 대단히 적절한 예를 듭니다. 36절 후반절부터 38절을 봅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제일 먼저 바울이 꺼낸 설명의 카드가 무엇이었습니까? 씨앗의 예였습니다. 우리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씨앗은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씨앗이 심겨지면 씨앗의 형태는 반드시 죽습니다. 죽은 씨앗은 그렇다면 죽은 것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 죽은 씨앗으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열매들이 탄생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육체라는 형체로 이 땅에서 살았습니다. 마치 자라나면 어떤 형체가 될지를 전혀 모르는 씨앗의 형태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재 강조하지만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 육체의 모습은 씨앗의 형체였습니다. 이 예를 든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죽고 나면 하나님은 그 씨앗을 형체를 근거로 새로운 형체를 만드신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씨앗의 형체를 가지고는 그것이 어떤 또 다른 열매를 만들지에 대하여는 그 당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육체가 다 소진할 때까지는 우리들의 육체가 썩는 것으로 끝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 읺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부활할 때의 형체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부활체로 다시 바뀌어 살게 될 것임을 밝힌 것이 본문3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자연 피조물을 예로 들은 다양한 형체의 설명이었습니다. 39-41절을 봅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무슨 의미입니까? 바울의 비유는 천재적입니다. 하나님이 땅에 만들어놓으신 일체의 피조물을 보십시다. 육체도 같은 육체가 없습니다.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가 그렇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자연 피조물들도 다 각기 다른 형체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기의 영역에서 고유의 역할을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달이 해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고, 물고기가 육지의 짐승 역할을 감당할 수 없고, 하늘의 새가 물에서 살 수 없습니다. 모두가 이 땅에서 고유의 역할을 감당하게 만들어졌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인간도 매일반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육체는 이 땅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우리들의 육체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형체가 될 수 있도록 그날에 하나님이 변화시켜서 우리들을 부활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본문 42-49절 마지막 절까지 바울은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지금까지의 본문 이해를 통해 던져야 할 질문과 답을 가장 성서적 근거가 든든한 상태에서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 것입니까? 그 답을 오늘 설교 제목에 부합하여 이 정도로 답해 보겠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는지 답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이것만큼은 제시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는 완벽한 부활체일 것입니다. 다음 강해의 첫 구절인 50절을 미리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이십니까?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다는 것을. 또 보이십니까?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무슨 말입니까? 이 땅에서의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부활시키실 때에 이 땅에서 찌들고 찌든 혈과 육의 모습이 아닌 썩지 아니하는 부활체의 모습으로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부활체의 모습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는 그날이 될 때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해서 빈약하게도 이 부활체에 대한 설명을 이론적으로 교우들에게 설명드릴 수 없어서 저 역시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본 것처럼 지금은 희미하여 알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을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같이 분명하게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오늘 설교의 교훈에 따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한 가지의 실천적 삶을 살아내는 다짐을 하면서 오늘 설교의 교훈을 극대화하기를 원합니다. 무엇일까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연습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인침 받아 완벽한 부활체로 부활될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연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삶의 내용들을 열거하라고 한다면 상당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 설교를 통해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며 섭렵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교우들과 저는 오늘 항상 제가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한 가지의 내용만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 이 땅의 가치에 동의하고 타협하는 무감각과 치열하게 싸우십시다. 지난 주간, 우연히 기독교 포털 사이트에서 한 목회자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목회자는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강단에서 죄를 보편화시키지 마십시오. 강단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일반화시키지 마십시오. 그렇게 보편화하고, 일반화시키니 목사가 제일 먼저 그 죄의 선봉에 서는 것입니다.” 이름이 있는 목사가 아닙니다. 대형교회를 목회하는 큰 교회 목사는 더 더욱 아닙니다. 저처럼 조그마한 교회에서 그냥 한국교회를 너무나 사랑하는 목사의 일갈이었기에 눈물겹게 아멘 했습니다. 죄의 보편화와 일반화는 곧바로 이어지는 굴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감각이라는 굴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 중에 자살골은 무감각이라는 굴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아십니까? 터널은 그래도 끝이 있지만 굴은 끝이 없다는 것을. 21세기에 목회와 신앙의 싸움은 무감각의 굴로 들어가지 않도록 막는 것이며, 그 강제함에 순종하여 굴로 들어가지 않아야 하겠다는 자각을 날마다 깨닫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을 보면 가나안 정탐꾼들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너무 잘 아는 이 기사를 접할 때마다 매우 안타까운 정황들을 보게 됩니다. 민수기 14:22-23절을 봅니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이 구절에서 못내 가슴 아픔으로 다가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헤아려 보십시다. 출애굽의 여정 중에 하나님이 행하신 10번의 일하심을 출애굽 백성들은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수기 14장에 기록된 가나안 정탐 이후 불만과 불평으로 보고하는 자들도 보았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넜던 기적과 뒤따라오던 애굽의 군사들이 수장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추위에 떨어야 했던 광야의 밤에 그들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광야의 위험스러운 일체의 동물들을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준 불기둥을 그들은 경험했습니다. 더불어 광야의 내리쬐는 살인적인 햇빛을 구름기둥으로 막아주신 것도 목도했습니다. 쓴 물을 단물도, 반석에서 솟아나는 물고 공급하신 것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신 것도 매일 경험하고 있는 그들이었습니다.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매일 경험하고 있는 그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가나안은 들어갈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보고합니다. 거기에 거하는 거민들은 장대한 거인들입니다. 우리는 망했다고 자멸하는 굴속으로 들어간 자들이 바로 그 수없이 많은 기적을 맛본 자들이었습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몰락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둔감함, 이 땅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무감각 때문이었습니다. 은혜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치열함 속에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만지심입니다. 이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자들은 무감각해집니다. 더불어 그 은혜의 방편 반대편에 있는 것이 더 매력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 결과는 타협과 무감각의 굴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작년에 재일 한국인으로서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세인카쿠인 대학 총장을 역임한 강상중 교수가 쓴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에서 그가 갈파했던 촌철살인이 동의되어 설교 노트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기독교에서 악이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악은 무언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악은 그저 공허함을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악은 형식 그 자체를 즐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p,85) 제가 강 교수의 지론에 대하여 인정한 부분은 그가 말한 대목 전부를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강 교수가 무엇을 근거로 기독교에서 증언하는 악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부분에 대하여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악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실재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추적하는 집요한 실제입니다. 그래서 강 교수가 말한 전반부의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후반부의 내용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은 그 형식 자체를 즐긴다.”입니다. 악은 악을 즐기도록 우리들을 옥죕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죄나 악이나 세속적 가치에 깊이 빠져들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이 땅의 가치에 동의하고 암묵적으로 타협하는 동안에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가치에 대하여 눈감게 하며 민감하지 못하게 합니다. 마치 출애굽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수없이 많은 기적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둔감했던 열 명의 정탐꾼처럼 말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완전한 부활체로 부활할 것을 믿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여! 이 땅의 가치에 동의하고 타협하는 무감각과 치열하게 싸우십시다. 그래서 그 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옷 입으십시다. 해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세인 지체들 모두가 신부로 입장하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고린도전서 13:12절을 읽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분명한 것은 그 날이 되면 부활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날이 되면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분투하십시다. 치열하게 사십시다. 무감각해지지 마십시다. 그 날이 우리에게 오늘은 한 걸음 더 성큼 와 있습니다. ‘마라나타’를 찬양하겠습니다. 마라나타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땅에 모든 끝 모든 족속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마라나타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춤추며 경배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자 십자가를 들고 땅 끝까지 우린 가리라 우리 주님 하늘영광 온 땅 덮을 때 우린 땅 끝에서 주를 맞으리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