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월요일 묵상
쓰레기 같은 인물 느헤미야라고!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50편, 시편 142편, 느헤미야 13:1-3, 23-31, 하박국 2:12-20, 고린도전서 5:9-13
꽃물 (말씀 새기기)
느헤미야 13: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느헤미야 13:28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2023년 주일 강해 설교 텍스트를 ‘에스라, 느헤미야’로 정했다. 9월 초부터 관련된 단행본과 주석, 그리고 저널까지 열심히 읽고 있다. 기억으로는 아주 젊은 목사 시절(그래, 내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 섬기던 교회에서 청년들과 씨름하던 텍스트였다. 당시 설교 원고를 읽으면서 양감감정이 몰려 왔다. 첫째, 본문 해석이 이렇게 허접했나? 둘째, 이 허접한 설교를 들었던 교우들은 성자였고, 또 그 지체들 중에는 당시 말씀을 통해 질적 변화를 일으켜 지금 목사로 사역하는 이가 세 명이나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에 두 손을 들 수밖에 경이로움이다.
거의 30년 만에 다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손에 잡으려고 준비 중에 있다. 특히 느헤미야는 내 연구의 집중 텍스트가 될 것 같다. 대학원에서 ‘배경사’를 기초로 논문을 쓰고 있는 아들이 코스워크 시절에 느헤미야 세미라를 마치고나서 내게 이렇게 도전했었다,
“아버지, 지도 교수와 함께 한 느헤미야 연구를 마치고 났는데 느헤미야를 향한 새로운 스펙트럼이 들어왔어요. 대단히 기회주의적인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느헤미야를 해석한 지도교수의 가르침을 받고 혼돈스럽기는 했지만, 기존 성서해석의 고집스러움과 더불어 또 하나 접근해야 할 성서해석의 비평적 성찰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느헤미야 세미나를 통해 배웠어요.”
‘쓰레기 같은 인물 느헤미야’
내게는 적어도 충격이었다. 클레어몬트에서 Ph.D를 받은 학자의 주장에 대해 반론할 수 있는 에스라, 느헤미야의 성서신학적인 연구도 내게는 숙제가 될 전망이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에 침투한 혼합주의에 저항한 의로운 하나님의 도구인가? 아니면 선민주의를 내세운 극단적 배타주의자인가?
20년 전의 나는 전자를 택해 전했다. 20년 후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나님께 질문하며 느헤미야 텍스트를 공부하려 한다. 기대와 염려 두 가지가 공존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또 다시 성서 텍스트를 중심으로 양승애 교수의 말대로 ‘성서 뒤의 세계’, ‘성서 속의 세계’, ‘성서 앞의 세계’를 치열하게 연구하며 목회 현장에 유리되지 않은 메시지를 도출해 내려는 노력을 할 것이라는 결기만큼은. 주님께 지혜를 구한다.
두레박 (질문)
에스라, 느헤미야 강해 사역이 두렵고 떨린다. 20년 전에 비해 주군께서는 나를 어떻게 사용하실까?
손 우물 (한 줄 기도)
언제나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그것 밖에는 안 되니? 이놈아, 하시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힘주십시오.
나비물 (말씀의 실천)
What did it mean? 과 What does it mean? 의 긴장감을 갖고 조금 더 세밀하고 치열하게 에스라, 느헤미야 연구에 최선을 다해야겠다.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용산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참담함을 넘어 절망적입니다. 주여, 한국교회가 직무유기한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웃들의 아픔을 싸매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