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9일 수요일 묵상 아비가일의 유감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57편, 시편 129편, 사무엘상 25:36-42, 예레미야 50:1-7, 17-20, 누가복음 22:39-46 꽃물 (말씀 새기기) 사무엘상 25:41-42 아비가일이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성경 참 어렵다. 그리고 목사인 내가 보더라도 해석하기가 참 민망한 구절이 여럿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비가일에 대해 미화해서 해석한다. 다윗과 연관하여 해석하려는 무모함이 낳은 무리수다. 난 아무리 아비가일을 좋게 보려고 해도 그러지 못하겠다. 심지어 이런 기도까지 한다. “하나님, 내 아내가 아비가일 같은 악녀가 아니라 감사합니다.” 다윗의 편이 되었다고 무조건 손들어주어야 한다는 논리가 가당키나 한가? 그건 폭력이다. 내가 본 아비가일은 최악이다. 아주 나쁜 아내의 전형이다. 어떤 목사가 아비가일이 대단히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평한 글을 보았는데 소가 웃을 궤변이다. 나발은 ‘어리석은 자’ 혹은 ‘바보’라는 의미의 단어이기 때문에 그의 인생이 그렇게 되었단다.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몰락할 사울 왕가에 대해 예지적인 능력이 있었던 여인이 아비가일이라고 해석하는 신학자의 글을 읽다가 그가 구약학을 전공한 Ph,D 라는 것을 알고 아연실색했었다. 이 당시에 사울 왕가는 아직 건재했다. 몰락하지 않았다. 무슨 무당인가? 그렇게 신비주의적으로 이해를 하게. 나발은 사울 편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가 선택한 정치적 선택은 존중 받아야할 일이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는 사울을 택했기에 다윗에 대해 경계했다. 너무 당연한 일이자 그의 선택적 자유다. 어떻게 그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매도한단 말인가! 더 기막히고 용서가 안 되는 것은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다. 남편이 어리석은 자이기에 행한 일체의 일을 용서해 달라고 다윗에게 가서 통사정을 한 행위도 나는 별로 달갑지 않다. 백번 천 번 양보하여 부부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에두르자. 그래도 이것 너무 심하다. 다윗을 향하여 ‘내 주’라니! (삼상 25:24) 처음 본 외간남자에게 나의 주인이라니 이게 제 정신인가! 결정타가 보인다. “아비가일이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삼상 25:41-42) 하나님이 나발을 치셔서 죽이셨다는 구절에 대해 나는 그날이 되면 하나님께 물어 볼 생각이다. 왜 그러셨냐고. 하나님은 나를 설득할 만한 말로 대답해 주실 것이라고 믿기에 나는 주님을 의지한다. 하지만 아비가일은 내게는 적어도 최악의 여성이다. 남편이 죽자마자 다윗이 부르니 그의 아내가 되었다. 나를 화나게 한 단어는 ‘급히’ 즉 ‘마하르’라는 부사다. 준비된 신속함을 보여주는 단어다. 많은 사람이 아비가일을 좋게 평가하려고 애쓴다. 삼가 조의를 표한다. 정경 안에 기록된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고 딴지를 걸어도 할 수 없다. 나는 말씀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아비가일의 삶을 비평적으로 성찰하는 것뿐이다. 아닌 것 아니다. 그게 정직한 거다. 두레박 (질문) 성경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승자독식구조로 기록된 역사의 내용을 비평적으로 성찰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윗이 내 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편이심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게을리 하지 말자.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해석 없는 수용에 대해 저항하게 하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성경 묵상을 철저히 하자. 은혜를 포기하지 않지만 맹목적이지는 말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하나님, 오늘 수요 성회 마지막 4주차입니다. 기름부음이 충만한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