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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사역] 소아시아 성지순례 제 1화 (6월 2-3일)2024-06-14 11:49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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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경험한 교통사고 이후 모든 부분에서 많이 약해진 느낌이 있습니다. 육체의 여러 부분에서 느끼는 세밀한 것들이기에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는 조금 거북하지만 사고 당사자인 나는 분명히 그것을 느끼고 있으니 아마도 내가 말하는 약함의 실체는 정답일 것입니다. 얼마 전에 아내가 중국 음식점에서 짬뽕을 시켜서 먹는 것을 보고 매운 것은 입에도 대지 못하는 사람이 땀을 흘리면서 그것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며 지나는 가는 말로 이것도 사고 후유증인가? 할 때 저도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실제로 매운 것을 거의 먹지 못하는 식성에서 매운 것을 골라 먹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갔다 붙여도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고 이후 저는 분명히 여러 면에서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긍정의 모드로 변화되는 것이라면 고무적이겠지만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그런 객기어린 소망은 접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체력적으로 많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기에 안식월을 맞이하여 계획한 소아시아 성지 순례를 놓고 많이 갈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출애굽 여정에 비해 이동 거리가 거의 살인적인 이동 거리라는 것을 이미 다녀온 지체들을 통해 들어 알고 있었기에 이 일정을 과연 내 체력으로 소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괜한 발걸음 욕심을 일행들에게 민폐를 끼칠 것 같아 여행의 결정을 내기까지 여러 번 심사숙고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용기를 낸 것은 역설적으로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는 사역이 바울의 전도 여정 순례이지만 더 늦은 나이가 되면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들었고 동시에 목사가 되어 단 한 번도 안식년을 가져 보지 못한 끝에 이번에 교우들의 사랑과 배려로 공식적인 안식월 시간을 갖게 되었기에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김영봉 목사는 출애굽 여정의 수기인 ‘팔레스타인을 걷다.’ (IVP. 2014)라는 성지순례 일기에서 시편 84편에 기록된 시인의 순례를 예로 들며 이스라엘 주변의 성지 순례의 결과를 ‘순례자로 살기’ 라는 결론적 매듭을 짓고 그렇게 마음먹었다는 일침에 힘입어 지난 10일 동안 경험한 바울의 전도여정을 부족한 사람도 메모한 내용을 기억하면서 ‘바울처럼 살기’ 로 매듭짓고 그 여행의 후기를 우리 교회의 지체들에게 소박하게 담아 연재 형식으로 보고해 보려고 합니다.
바울이 걸었던 전도여정의 길을 따라나서면서 두 곳의 성경 말씀이 내내 나의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20:22-24절의 말씀이요 또 다른 하나는 고린도전서 11:23-28절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칠 즈음 자신이 세웠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밀레도 항구에서 감격적인 재회를 하는 자리에서 고난이 예상되는 예루살렘 행을 만류하는 지체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비장함을 선언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2-24)
또한 바울은 문제로 인해 이모저모의 영적인 흐트러짐을 경험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그가 그 동안 3차에 걸친 정도여행의 기막혔던 행군의 속내를 다음과 같이 드러내며 자신의 사역을 대변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3-28)
나는 이 말씀이 하나님 말씀의 정경 속에 있기에 그냥 바울의 위대한 신앙고백 정도로 치부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번 소아시아 성지순례의 일정을 마치고 나서 바울이 걸었던 길들을 조금이나마 경험한 뒤 끝에 바울의 고백들이 하나도 거리감이 있는 주후 1세기에 살았던 믿음의 선배로서의 바울이 어깃장이 아니라 오늘도 나의 심장 안에 살아서 움직이는 21세기의 바울의 외침으로 다시 듣고 자리매김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실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노예’ 그 자체였습니다. 나는 그의 ‘노예’ 됨을 지금부터 추적해 보려 합니다.

 6월 2-3일 화, 수요일

교회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시간에 집을 나섰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오후 11시 45분에 출발하는 터키항공 091편으로 소아시아 성지순례 길을 나서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려 10일 동안 목욕을 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인천 공항 근처에 있는 목욕탕에서 세신을 하고 약속한 사설 파킹 업체와 미팅을 한 뒤에 차를 맡기고 공항 청사로 들어갔더니 이미 같이 여행의 일정에 참여할 지체들이 여행사측으로부터 제반 설명을 다 듣고 짐을 맡기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늦게 도착했다는 미안한 마음에 저녁 식사도 하지 못했지만 서둘러서 짐을 챙겨 팀에 합류했고 항공사측에 짐을 맡기고 나니 약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사실 공항에 나갈 때는 메르스 공포의 시작 단계였기에 저 또한 더 많이 긴장을 했지만 인천 공항은 보란 듯이 멀쩡했습니다. 평일이고 또 늦은 시간이기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 한산하고 썰렁했습니다. 함께 여행에 나설 동료 한 사람이 이번 메르스 바이러스 사건의 여론화로 인해 많은 정치인들이 쾌재를 부를 것이라는 조소 섞인 냉소를 보내는 말을 듣고 저 또한 쓴 웃음으로 대신 답변을 할 정도도 공항은 멀쩡했습니다. 목욕이 뭔지 저녁 식사를 하지 못했기에 늦은 시간이었지만 장거리 여행에 앞서 기내에서 나올 음식에 대하여 신뢰(?)를 보낼 수 없었고 식사가 나올 시간은 분명 우리 시간으로 꼭두새벽인 것이 분명했기에 서둘러 음식점을 찾아 우동으로 저녁 식사를 때웠습니다. 동남아시아 여행을 갔을 때 비행기 보딩 시간은 물론 이륙 시간도 제 마음대로였던 아픈 기억이 있어 적지 않은 염려가 있었지만 다행히 터키항공은 정확한 시간에 이륙을 해주어서 늦은 밤 시간인 오후 11시 50분에 터키로 향발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돈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부끄럽거나 속을 상해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활을 하면서 약간의 불편함은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당연한 일인지 알고 그렇게 인정하며 맞추며 살아왔습니다. 허나 비행기를 탈 때는 약간의 마음이 상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무려 11시간 45분이 걸리는 긴 여정의 여행이기에 다리를 제대로 피지 못하는 열악한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에서 비행을 하는 것 자체가 곤혹스러운 일인데 보딩을 하면서부터 자본주의적인 서열이 적용되는 것을 보면 적지 않게 빈정이 상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이 법인지는 모르겠지만 1등석을 제일 먼저, 그 다음에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을 태우고, 마지막으로 이코노미 클래스에 탑승할 승객을 태우는 것은 모든 비행사의 관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해서 비행기를 탈 때마다 항상 영화 ‘설국열차’가 떠오릅니다. 서열이 없는 세상, 1등석과 2등석의 구별이 없는 세상, 이 땅에서는 요원하겠지요. 빈정이 상하는 일을 당했지만 마음을 곧추 세워봅니다. 나는 지금 여행이 아니라 ‘성지순례’를 가는 데 이 모양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다시 의도적으로 마음을 다스려 봅니다. 차 안에서 거의 자지 못하는 원만하지 못한 성격 끝에 안대, 귀마개도 준비해 갔지만 거의 뜬 눈으로 날 밤을 샜습니다. 바람을 안고 가야하는 터키행이기에 적지 않은 비행기였지만 여러 차례 흔들림이 있어 달콤한 숙면은 일찌감치 포기했고 비몽사몽으로 거의 12시간 만에 터키의 영웅이자 첫 번째 대통령으로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 같은 존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받는 무스타파 케말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만든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 국제공항에 오전 5시에 45분(터키 현재 시간에 도착을 했습니다. 6시간의 시차가 있어 터키에 도착한 시간은 이른 새벽녘이었습니다.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지만 이미 각오했기에 마음을 다잡이 하고 공항에서 다시 터키 국내선으로 환승하여 터키의 작은 중부 도시인 네부세이르 공항에 1시간 여 여행 끝에 도착하여 첫 번째 순례지인 가파도키아로 이동하였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화산 폭발로 인해 만들어진 기막한 절경을 자랑하는 ‘파사바’ 에 도착하자 도무지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 수 없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갖가지의 진귀한 자연형태의 신비로운 작품들이 연출되었습니다. 소위 버섯 바위라고 명명된 기암들이 즐비했습니다. 동시에 이 바위틈에는 로마시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숨어 신앙의 고귀함을 지켰다는 교회까지 있어 둘러보며 그들의 아름다운 신앙지킴에 대하여 고개를 숙였습니다.
화산폭발로 인해 흘러내린 용암들과 석회석들로 인해 어우러지고 만들어진 아름다운 하나님의 걸작들은 억겁의 세월 그렇게 서 있어왔습니다. 그 자태와 모양 앞에 왜 그리 내 모습은 추하고 작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자기의(自己義))에 빠져 먼지요, 티끌 같은 우리네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리도 당당했는지. 파바사의 절경들은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관광객들에게는 반드시 들려야 하는 관광명소이기에 성지로 떠나기에 앞서 지나가는 길목에 있다는 우치히사르에 가서 동굴 집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진이 잦은 나라인 터키이기에 신변의 안전을 위해 다른 곳으로 주거지를 옮겨주면서까지 이주시키려는 정부의 강압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상대대로 살아왔고 태어난 곳을 떠날 수 없다고 맞서는 고집 센 토박이들이 아직도 기거하고 있는 탓에 오늘도 이곳은 공교롭게 타인들의 관광 명소가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온고지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터키 정체성의 주인공들일 수 있으니 어찌 강압적인 몰이로 그들의 삶을 강제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을 지키는 자들 중에는 관광 명소이기에 방문객들에게 장사하는 자들이 여기저기에 보이는 것은 다른 나라와 별 반 다름이 없습니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가 능숙한 한국어로 한국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쫀득쫀득 아이스크림! 차이니스 10달러, 재패니즈 5달러, 코리언 2달러”
코리아를 6.25 사변 때 군대를 파병할 정도로 형제국가라고 인정하는 그 사랑의 멘트에 속기로 하고 거금 4달러를 투자해서 쫀득쫀득 아이스크림을 아내와 함께 맛나게 먹고 우치히사르를 추억하며 지하도시 데린구유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가파토기야의 압권은 지하도시 데린구유입니다. 아직 종교개혁지 중에 한 곳인 이탈리아를 방문하지 못해 카타콤의 실체를 알 수 없지만 터키의 카타콤인 데린구유를 방문한 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1965년 어느 날, 그곳 마을 사람들이 자꾸만 가축하고 있는 닭들이 사라지는 것을 이상히 여겨 추적해 보니 한 함몰된 곳에 닭들이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닭들을 구조하다가 발견한 곳이 데린구유였습니다. 지진지대였던 이곳 데린구유는 화산지대임과 동시에 땅들을 손으로 팔 수 있는 석회암질이기에 지하도시 건설이 용이했고 해서 추측하기로는 로마의 기독교핍박의 시절, 종교의 자유를 위해 기독교인들이 지하로, 지하로 파내려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약 15층 아파트의 규모로 되어 있는 데린구유 지하도시는 안전상의 이유로 지금은 8층까지만 개방되어 있어 순례팀 역시 8층만 관람했습니다. 성도들이 거하던 방들은 지천에 있었고, 동물들을 키우던 지하 축사, 물을 담아두었던 우물, 식량을 저장하던 창고, 외부의 침입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의 일환으로 미로처럼 엮인 길들을 설계했던 것을 보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감동은 지하 8층에 있는 예배당과 신학교 건물이었습니다. 약 20,000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던 지하 도시에서 그들이 가장 위대한 삶의 가치로 여겼던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밤이 깊은 시간이 되어야 지상으로 나와 숨을 돌렸던 그들이지만 그들이 이 어려운 삶을 영위했던 유일한 이유는 신앙의 자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소중함 때문이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 있을 것을 기대하며 달려간 데린구유의 크리스천들은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크리스천들의 고개를 숙이게 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당 지역에서 성지순례의 동역자들은 그 어느 때 불렀던 찬송보다 더 감격적으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 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이 찬양을 드리면서 사유해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목사로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데린구유의 지하교인들이 갖고 있었던 그 영성을 소유하고 있는가? 나는 핍박의 시대에 이 신앙을 정말로 지킬 수 있는 신앙의 도를 사수할 만한 성숙함이 있는가? 나는 순교자의 신앙을 따라가고 있는가? 말로만 한 몫 하는 목사로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너무 안락한 목사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사유함만으로도 데린규유는 나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 엄청난 도시에 대한 감동의 탐방을 마치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요? 마침 지상으로 올라온 시간에 그 지상에 세워진 무슬림 사원에서 아잔(무슬림들이 사우디 메카를 향하여 하루에 5번 기도하는 시간)이 시행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유일한 신은 알라 밖에는 없다고 외치는 알지 못하는 언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데 왠지 서러움이 울컥 올라왔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신앙의 핍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어갔던 그 땅의 지상에는 또 다른 암묵적 핍박들이 자행되는 현실을 보면서 비잔티움 시대의 영광을 잃어버린 그 대가가 얼마나 혹독하고 잔인한가를 현재의 눈으로 목도하는 산 공부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데린구유의 아픔을 뒤로 하고 첫 날의 피곤을 달래줄 숙소가 있는 꼰야(성서상의 이름은 이고니온)로 이동하는 차의 동선은 바울이 걸었던 실크로드(왕의 길)로 이동하였습니다. 바울은 도보로 걸었을 이 길을 바울보다 몇 배는 더 못난 나는 버스로 이동하는 이 호사를 누리는 불공평함에 몹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지나는 길목에서 만난 양떼들을 보며 바울이 담았을 이방의 사도를 기다리는 양들을 보는 것 같은 동일시의 마음이 일었습니다.
이렇게 소아시아의 성지 순례의 길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루라는 시간의 터널을 빠져 나왔지만 여타 다른 날들과는 족히 비교될 수 없는 먼 거리를 달려왔습니다. 동시에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본 느낌이라 혹시나 담을 수 있는 것들의 누락됨이 염려되지만 그래도 터키에서의 하루는 육체적인 곤비함을 담보한 것을 배제한다면 소중한 것들을 담아준 하루였습니다. 그나저나 앞으로 1일 동안 이 땅에서 어떻게 음식과의 전쟁을 치를까를 생각하니 실로 다른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첫 날 도착한 Dundar Hotel 저녁 식사 시간에 향신료 때문에 입에도 대지 못하는 고문을 당하고 숙소에 돌아와 햇반과 인스턴트식품으로 제조된 순두부찌개를 끓여 먹으며 한국 같으면 입에도 대지 않았을 일회용 식품에 눈물겨워하는 자가 바울의 여정을 따라간다고 하니 소가 웃을 일은 아닐까 싶어 송구스럽고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허나 한국에서 중보해주고 있는 교우들의 기도에 힘입어 이튿날 순례에 최선을 다해보려고 마음을 다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