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주군도 이렇게 하셨습니다. 본문: 사도행전 1:1-2 서론) 지난 달에 춘천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가 시무하는 하늘평안교회 창립기념 수요 집회에 참석해서 설교로 예배를 섬겼습니다. 친구는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설교학으로 신대원생들을 강의하며 섬기고 있는데 첫 번째 강의를 맡았을 때의 에피소드를 교제 중에 우연히 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1년 전, ‘설교의 이론과 실제’를 맡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설교 한 편을 만들어서 설교 시연을 하는 시간을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최선을 다해 준비해서 가지고 온 설교를 강의 시간마다 듣다가 특별히 한 학생을 주목하게 된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를 주목하게 된 이유는 그 학생의 설교가 이 목사의 설교 원고와 설교 톤 그리고 설교 구성까지 너무 닮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는 전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친구의 이름을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박 모세전도사야.” 설교의 피드백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는 것도 함께. 그 친구 왈 설교의 멘토가 이 목사라고.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너무 식상한 말 같지만 곱씹으면 정답과도 같은 말이 있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입니다.” 이 말은 어느 경우에 참 부정적으로 쓰이는 말이지만 또 반대의 경우에 대입해도 귀담아 들을 만 한 격언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을 배운 사람은 또 좋은 것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박 전도사가 페이스-북에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모방할 수 있지만 재현되지 않음, 어릴 적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고 그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였다, 대학시절 한 선생님의 연대기를 듣곤 동일한 이력을 가지기 위해 결단해 보았다, 사역을 하는 내내 한 목회자님의 철학을 삶에 새겨 넣기 위해 번번이 도전하곤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번번이 좌절이다. 모방할 수는 있지만 재현되지는 않는다. 단, 그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자,” 이 글을 읽고 제가 박전도사에게 이렇게 댓글을 달아 주었습니다. “박 전도사, 벤치마킹과 멘토링은 20대까지만. 30대는 멘토가 되기를 바란다.” 제 글을 읽은 박 전도사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 댓글로 저에게 심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막막한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30대에서만 할 수 있는 또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20대 잘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발짝 내디딜 힘이 없을 때 밀어주시는 거 같아 참 감사합니다.” 저는 학창시절, 불행하게도 인격적으로 밀어주는 혹은 멘토링을 해줄 만한 어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맨 땅에 헤딩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해서 가끔은 이런 아쉬움이 남습니다. 저에게 청년 시절, 멘토가 되어준 분이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괜찮은 목사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입니다. 오늘 저는 저와 여러분의 진정한 멘토십 이야기를 나누어볼까 합니다.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맺은 맨토십은 어떤 경우에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함께 나누고 소개할 멘토는 사람이 아니시기에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서 소개할 멘토는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론) 본문은 사도행전의 시작을 알리는 프롤로그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십시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지난 주간 새벽예배에 성서일과로 읽었던 사도행전의 이 본문이 확 다가왔습니다. 원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성경 정경의 제 42권과 44권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실은 전편과 후편의 구조를 갖고 있는 책입니다. 이 두 권 책은 저자인 의사 누가가 누가복음을 주후 56-58년경에 작성한 것으로 학자들은 동의합니다. 그런 뒤,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순교를 당하기전에 감옥에 구금되어 있었을 때, 그의 주치의로 바울과 함께 있었던 누가는 주후 61-63년경에 두 번째의 책인 사도행전의 집필을 완료했다고 또한 학계에서는 동의합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열면서 이렇게 독자들에게 보고합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그렇습니다. 데오빌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확실하게 꼭 집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사람의 처음 출처인 누가복음 1:3절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분명히 누가는 자기의 복음서를 받는 수신자를 ‘데오빌로 각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헌데 이 데오빌로가 개인 한 사람인지, 아니면 주후 1세기에 사람의 이름으로 많이 불려진 ‘하나님의 벗’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데오빌로’ 인지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독자인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두 가지입니다. ① 이 사람은 어떤 관직에 종사하던 신분이 나름 높았던 사람이라는 정보입니다. ‘데오빌로’ 즉 ‘하나님의 벗’이라는 이름은 전술했듯이 너무 흔한 이름이었기에 누가는 그를 분명히 수많은 데오빌로 중에 사람들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는 구별된 데오빌로임을 알려주기 위해 당시 존경 받는 사람들에게 존칭어로 붙여주는 헬라어 ‘카라티스테’(각하)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② 두 번째 정보는 수신자 데오빌로는 누가복음을 읽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가 사도행전을 읽는 그 때 즈음에는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누가복음에서 데오빌로에게 붙여졌던 ‘카라티스테’는 사라지고 그냥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형제들을 통칭할 때 부른 방법대로 이름만 불렀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라는 본 책의 저자가 누가복음을 데오빌로에게 보낼 때와 사도행전을 보낼 때의 영적인 태도나 분위기가 전혀 달랐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아마도 누가는 전편보다는 후편을 보낼 때가 훨씬 더 안정적이고 영적으로 푸근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비 그리스도인이었던 데오빌로에게가 아닌 그리스도인인 데오빌로에게 보내는 글이었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누가가 이렇게 단순히 데오빌로에게 푸근한 글을 보냈다는 정도의 정보만이 아닌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정보를 준다는 점입니다. 어떤 면일까요? 누가복음은 새 신자가 보아야 할 복음의 기초적인 지식에 머물렀다면 사도행전은 이제 새신자가 아닌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느끼고 가져야 하는 조금은 더 깊은 영적 지식을 데오빌로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그냥 글로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셔서 주군으로서 공생애를 보내셨던 삶의 일련의 내용들을 열거하는 정도로 개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데오빌로에게 그가 불신자였을 때는 숨겼던 진실을 공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불편한 진실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하여 데오빌로에게 보낸 복음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는 누설이었습니다. ※ 행하셨던 것만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대단한 은혜요, 감동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데오빌로에게 밝힌 누가의 이 천기누설(?)은 오늘 우리에게 대단한 가르침과 깨달음을 줍니다. 이 교훈이 왜 이리 큽니까? 주군의 생활 방식이자, 영적 라이프 스타일을 가감 없이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군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신 일만 가르치셨습니다. 주군이신 주님께서는 삶보다 말이 앞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습니까? 이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소위 최후의 만찬이라고 말하는 다락방 만찬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가복음 14:27-28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분명히 주님은 당신이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행하실 것을 약속하신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성경은 주님이 약속하신 이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우리들에게 보고합니다. 마태복음 28:5-7절을 봅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주님은 부활하신 뒤에 제일 먼저 행하셨던 일이 갈릴리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왜 주님은 갈릴리로 부활하시자마자 가셨습니까? 그의 삶의 농축을 다시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미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주군은 갈릴리에서 공생애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머무셨습니다. 해서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들을 통하여 고지하신 내용도 바로 갈릴리로 오면 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고지였습니다. 주군은 그가 사셨던 것, 그가 행동하셨고 활동하셨으며 함께 아파했고, 보듬었던 삶을 사셨던 갈릴리로 가셔서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군은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주군은 항상 갈릴리 중심적인 삶을 사셨고 그들과 함께 하셨기에 그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여인들 즉 팔로워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들도 갈릴리로 오라고. 이 말은 너희들로 갈릴리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과 더불어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누가는 오늘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운을 뗐습니다. 1절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사도행전을 영어 표기로 ‘Acts’ 라고 표기합니다. 번역하면 ‘행동들’입니다. 왜 복수명사로 표기했을까요?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의 유일한 역사서입니다. 더불어 신약성경 27권중에 유일하게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책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도행전은 28장까지 기록되어 있지만 29장도 쓸 수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 쓸 수 있습니까? 주군께서 가르치신 내용들을 살아내는 그래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기록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헬라어식 표기는 이렇게 표기합니다. “프락세이스 아포스톨론” 번역하면 ‘사도들의 행함들’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28장까지 바로 이것,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 주의 복음을 들고 사역한 행함의 내용들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그리고 그 밖의 제자들도 사도행전에서 보고한 사역의 내용들은 행한 것만을 가르치고 보고한 것들입니다. 주군이 행하셨고 사셨던 내용들을 보고하면서 시작된 사도행전의 역사는 그를 따르던 제자들 역시 이전에는 말만 앞서던 것을 완전히 제거하고 그들이 살아냈던 것만 가르쳤던 위대한 글 보고가 바로 사도행전이었습니다. 뉴욕 리디머 커뮤니티의 담임자인 팀 켈러가 쓴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s)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버드경영대학원(MBA)의 2009년 졸업생 중 거의 절반은 졸업하기 전날 비공식 행사에서 다음과 같이 다짐을 했다. ‘지극히 정직하게 행동할 것, 내 좁은 야망을 채우기 위한 결정과 행동을 거부할 것, 내 사업으로 사회에 창출할 장기적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일할 것 등이었다.”(p,195) 그런데 이 선서를 한 졸업생들을 세계 최고의 경제 전문 저널인 ‘이코노미스트’에서 추적하여 보고한 의미 있는 내용들을 발표했는데 팀 켈러는 이 기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선서에 서명한 졸업생들은 당당히 다른 길을 택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경영자들은 주가를 신속히 올리려고 무엇이든 하느라 회사의 장기적 건강을 희생하고 직원과 고객과 환경과 진정한 유익을 희생했다.”(p,196) 시대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배운 대로 행하지 않는 비극입니다. 이것이 사회적인 대상들에게만 해당하는 비극입니까? 저는 대한민국 개신교회 중에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입니다. 해서 내 사랑하는 교회를 꿈에서도 사랑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0.1%의 가감이 없이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이유는 살아낸 것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살아내지 않은 것을 가르친 이율배반 때문입니다. 주군이 하신 그대로 행한 것만 가르치고, 가르친 것은 반드시 행하여야 하는 데 살지도 못한 것을 가르치고 강요한 것으로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역으로 생각하면 희망을 말하게 하는 빛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어떤 것입니까? 내 사랑하는 교회가 다시 회복되는 것은 살아낸 것만 가르치고 가르친 것은 반드시 살아내는 역동이 교회를 휘감고 성도를 휘감을 때 가능하다는 소망을 꿈꾸게 합니다. 주군은 누가복음 10장에서 비유로 본인들은 전혀 살아내지 않고 말로만 풍성한 종교적 선을 강조하는 유대 율법적 지도자들을 향하여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전한 뒤에 그들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리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마치신 주님께서 당신을 책잡기 위해 비판의 서슬이 시퍼런 지도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6) 마지못해 주님의 질문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말하는 그들을 향하여 주군께서는 이렇게 쐐기를 박으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비판적인 성도들이 목사들의 일탈들을 보면서 이렇게 쏘아 붙입니다. “목사들이 설교한 대로만 살아도 교회는 산다.”고. 목사들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들이 정신 차리고 말씀대로 살면 교회가 산다.”고 그렇습니까? 그러지 마십시다. 주님이 오늘 그리고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말한 대로 살고, 가르친 대로 살라고 간절히 권면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너와 나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개를 돌리지 마십시다. 내 심장을 저격하십시다. 주군이 사셨던 것만 가르쳤다는 영혼의 폭격을 내가 맞으십시다. 이 길만이 내가 살 길이요, 교회가 살 길임을 한시도 잊지 마십시다. 본문에서 누가는 이렇게 사도행전의 역사를 엽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주 화요일 강의를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학생 한 명이 저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책을 내밀면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저자 사인을 해주십시오.” 저의 첫 번째 책을 구입해서 거의 다 읽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저를 압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더 던졌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 읽고 나면 두 번째 책도 꼭 사서 읽을 것입니다. 그런데 학생의 이 말을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교수님, 아시지요? 성적?”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이렇게 저에게 묘한 압박을 준 학생이 낸 첫 번째 과제물을 읽어보았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제가 요구하는 방향성을 캐치하고 과제물을 잘 작성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잠정적인 중간고사 과제물에 제가 이렇게 가채점을 했습니다. A⁺ 주최 측의 농간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적어도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그 정도로 천박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행한 일주일 동안에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경험하면서 이런 소회가 들었습니다. 어떤 방법이든 선생의 의도에 관심을 갖고 더 가까이하려는 행동 자체는 보기가 좋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지체 여러분! 우리는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결심한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주군이 행하셨던 그 삶대로 우리도 따라가며 살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군이 사셨던 삶을 살아내십시다. 그리고 그것들만 말합시다. 살아낸 경험이 없는 것은 입 밖으로 내지 마십시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9장의 페이지에 또 다른 ‘프락세이스 아포스톨론’ (사도들의 행함들)을 기록하는 영광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는 요소가 될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하나님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