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계시록 3:1-6
제목: 몇 명이 되십시다.
서론)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엘륄은 그의 걸작인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정말로 중요한 한 테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전혀 기독교답지 않게 만드는 요소들을 열거한 내용들이었습니다.
① 계시와 관련 없는 신학화
② 권력과의 결탁
③ 혼합주의로 변질
④ 역사에서 철학으로 전이
⑤ 기독교 성공주의
⑥ 부유해진 교회
⑦ 제도화된 교회
⑧ 대중화된 교회
이 내용들을 전부 다 주일 낮 예배라는 짧은 시간의 여백 안에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저에게 특별히 공감되는 부분만 교우들과 잠시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계시와 관계없는 신학화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을 신앙적인 응답이 아니라 학문적인 잣대로 해석하려는 지성주의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쉬운 말로 설명하자면 말씀 위에 이성을 얹어 놓는 작업으로 인하여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영적 생명력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또 하나 눈에 띠었던 것이 기독교 성공주의라는 정의였습니다.
엘륄이 이 대목에서 정의한 것은 대단히 크게 저에게 공명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공을 바라지 않고 복음 자체를 위해 복음을 전파하려고 애쓰고 나자 성공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일단 성공이 이루어지면 성공에 대한 갈망이 생겨났고, 그리스도인들은 성공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난 받을 수 있는 점은 바로 이 성공 뒤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과 그래서 사회가 기독교에 의해 뒤집히기는커녕 오히려 사회가 기독교를 뒤바꾸었다는 것이다.” (p,64)
벼락이었습니다.
이 벼락과도 같은 갈파에 연결되는 기독교 성공주의의 가장 큰 폐해는 교회가 부유해진 것이고, 더불어 그 부를 기초로 교회를 제도화하여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게 된 것이었으며, 결국 교회가 대중적인 인기에 혈안이 된 소위 말하는 인기 영합주의라는 포플리즘의 늪에 교회가 빠지게 되어 너무나 천박한 대중들의 놀잇감으로 전락해 버린 비극을 자초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공주의에 연관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지금 우리 조국교회는 동네북이 되었고, 웬만큼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교회의 권위와 경외함을 인정하지 않는 가장 나약한 집단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내 사랑하는 교회는 이대로 끝나 버릴 것인가?
정말로 꿈에도 잊지 못할 내 사랑하는 교회는 이대로 그 명운을 다할 것인가?
구약성경 열왕기상 3: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솔로몬 왕의 지혜로운 재판의 한 대목입니다.
진짜 엄마였던 여인이 아들을 둘로 쪼개 나누어주라는 의미심장한 솔로몬의 판결을 받고 내가 포기할 테니 가짜 어미의 짓을 하는 여인에게 아이를 주라는 절규의 대목에서 이렇게 역사가는 기록합니다.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여기에 기록된 ‘마음’이라는 단어 히브리어 ‘라함’의 원뜻은 ‘자궁’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대입하여 번역하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는 ‘자궁이 꿈틀거려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확한 번역입니다.
저는 내 사랑하는 교회를 생각하면 자궁이 꿈틀거리는 애잔함이 있습니다.
도무지 떨쳐 버릴 수 없는 모성적 사랑이 교회를 생각하면 타오릅니다.
그래서 내 사랑하는 교회들이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대합니다.
문제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너무나 소망하지만 다시 소생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몹시 급하고 간절합니다.
어떻게 해야 내 사랑하는 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데 교회에 주셨던 주님의 말씀을 통해 그 방법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본론)
결론부터 내리겠습니다.
※ 그러려면 제발, 교회가 세속화의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 구절이 가슴을 무섭게 찔리게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곡 찌르심이기에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분명히 하신 외침이 있었습니다.
네 행위를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설파는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았다고 떠벌이지만 실상은 싸늘하게 죽어 있는 교회의 행위를 세상이 안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알게 된 불특정 다수의 지인들이 사데의 편법을 안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범위를 좁혀서 교회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는 신앙공동체의 지체들이 안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알았다고 했습니까?
두려운 것은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주님이 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교회의 행위입니다.
사데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행위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물질적인 풍요로 인해 세속적으로 변질된 행위들이었습니다.
사데라는 지역은 금과 은이 많이 나는 지역이었습니다.
동시에 목축하는 양들이 많았던 지역이었기에 양모들로 만든 피복들이 생산되어 적지 않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만끽했던 지역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 지역은 부를 미끼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어마어마한 종교적인 도시로 발전했고 그 결과 교회 역시 이런 세속적인 풍요와 이방적인 우상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 사데 교회의 운명과도 같은 타락의 이유였습니다.
정말로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교회였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영적으로 죽어 있는 그런 교회가 바로 사데 교회였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있습니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어디 그뿐입니까?
그 결과 죽게 되었다는 선포를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왜 사데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무섭게 책망하였을까요?
그것은 사데 교회의 신자들이나 사데 지역에 있는 불신자들이나 구분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사데 크리스천들의 세속화 때문이었습니다.
전혀 세상과 다르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이것이 무엇입니까?
성도라는 이름만을 갖고 있는 자들의 세속화입니다.
소아시아 성지 순례를 통해 사데를 방문하였을 때 너무 놀랐던 것은 사데 지역에서 당시 섬기고 있었던 아데미 신전 터의 위용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사데 사람들은 이 우상의 제단을 실로 어마어마하게 건축했습니다.
지금은 지진으로 거의 대부분의 터가 무너졌지만 그 당시에 세워진 기둥들이 오늘의 사데 터에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늠할 정도입니다.
거기에 비해 사데 교회는 정말로 너무나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들어가는 입구 문에 십자가 표시가 있어서 이곳이 사데 교회 터라고 짐작할 수 있지 도무지 이런 곳이 소아시아 교회의 컸던 사데 교회 터였을까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초라함이 남아 있어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건물의 크고 작음을 통한 외형적인 비교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의 상징인 아르테미(아데미)의 위용에 비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예배당의 초라함을 보면서 당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자들의 영적인 피폐함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버려짐, 영적 우선순위의 무감각, 성령의 통치하심에 대한 거부 등등이 바로 사데 교회의 치명적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데 교회는 버젓이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번지르르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자기의 책인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에서 사데 교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영적인 묘지 같은 교회, 거짓 명성을 가진 교회, 위선을 행한 교회”(pp,108-111)
여기까지 사데 교회를 진단하면 정말로 유구무언이며 사면초가이며 고립무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섭게 책망을 받은 교회인 사데 교회를 향한 이어지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내 심령을 울컥하게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저는 이 구절이 눈물 나게 반가웠습니다.
사데 교회에 이런 성도가 있었다는 인정하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흰 옷 입은 자 몇 명’
사데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 전부가 이름만 살았지 실상은 영적으로 싸늘하게 송장처럼 죽어 있는 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영적으로 싸늘한 묘지와 같은 교회, 거짓 명성으로 포장되어 있던 교회, 위선을 행하던 교회 안에는 그것들과 정 반대로 영적인 순결함을 사수하고 고독하지만 세속적인 일체의 것들과는 타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로 흰 옷을 입은 자 몇 명이 있었다고 일곱별을 가지신 주님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백성들을 축복하십시다.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본문 5절을 눈 여겨 보십시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세속적인 것과 타협하지 않는 당신의 몇 안 되는 백성들을 향하여 약속하셨습니다.
① 지속적으로 흰 옷을 입게 하리라
②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으리라
③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하여 줄 것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성도가 달려갈 길의 끝이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왜 이 땅에서 우리가 수고합니까?
왜 영적인 분투를 합니까?
고독하지만 이 길을 왜 갑니까?
바로 주님이 사데 교회의 몇 안 되는 이런 성도에게 약속하신 그 은혜와 축복을 믿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사데 교회를 통해 주시는 교훈을 다시 한 번 복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발, 교회여! 세속화를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떠나십시다.
지난 목요일, ‘구원 그 이후 반’에 모인 지체들과 제 책인 ‘시골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를 나누었습니다.
지난 주에 보았던 책은 김기석 목사의 ‘세상에 희망이 있냐고 묻는 이들에게’가 텍스트였습니다.
그 책의 내용 중에 한 문장을 같이 나누면서 진솔한 은혜를 공유했습니다.
“떠나는 이들은 언제나 주류적 가치에 사로잡히기를 거절한 자들이다.”(p,216)
이런 자들을 향하여 우리는 ‘호모비아토르’라고 정의한다고 지칭하며 그 뜻을 같이 해석했습니다.
교회가, 목사가, 성도가 언제나 주류적인 가치에 함몰되어 거기서 탈락되면 인생을 실패하는 것 같고, 거기에서 왕따를 당하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천박함 때문에 세속화가 되는 것에 눈감는 기막힌 비극을 맛보게 된 것임을 그날 자각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공유한 은혜는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도리어 주류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세속의 유혹과 권력의 맛에서 과감히 떠나는 거스름의 삶이라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런 삶을 살아내기로 결심한 자들은 몇 명이라는 점을 계시록 기자는 말합니다.
사데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매일반입니다.
몇 명입니다.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살 떨리는 감동의 은혜를 증거합니다.
이들이 얼마 남지 않은 조국교회를 살리는 시간에 일어서야 할 자들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세속화의 괴물을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초토화시켜야만 한국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알기에 저는 우리 세인 교회가 이 몇 명이 되기를 기대하고 또 기대합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몇 명이 있다고.
남북 분열 왕국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과 길 예언자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들이 삶은 풍요와 안락함과 평안함으로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반대로 흉 예언자들의 삶은 고달팠습니다.
예레미야, 미가야, 아모스와 같은 흉 예언자들은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와 테러의 위협과 왕따를 당하는 고독과 싸워야 했습니다.
역사서를 자세히 보면 길 예언자들은 850명처럼 대다수입니다.
그로나 흉 예언자는 항상 엘리야처럼 1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수적으로도 완전히 열세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세속적인 물결과 거슬려 싸우는 자들은 항상 역사적으로 불리하고 또 불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그 몇 명 안 되는 자들의 편에 서 계신다는 은혜입니다.
항상 주님은 그렇게 움직이셨고 활동하셨고 응원하여 주셨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본문에 기록된 ‘몇 명’ 이라는 이 단어가 저는 왠지 모르게 무척이나 위로가 됩니다.
지난 주간, 저는 명성교회에 관한 이슈화로 무척이나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고 아직도 그렇습니다.
아마도 이 괴로움과의 투쟁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왜 괴로움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이제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국교회가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의 마지노선이 뚫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긴박함과 촉박함 속에서 무척이나 힘이 들고 괴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위로를 받는 근거는 오늘 본문의 단어 때문입니다.
‘몇 명이 내게 있어’
그런데 더 큰 위로는 이들 몇 안 되는 이들이지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시간은 없지만 회복의 가능성을 타진한 당신의 백성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메시지가 아닙니까?
아직은 그들이 사데에 남아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리고 또 하나 그들 때문에 하나님은 등 돌리지 않고 계신다는 말이 아닙니까?
시간은 분명히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몇 명 남지 않은 자들을 통하여 이루실 일을 기대해 봅니다.
무엇을 이들이 해야 합니까?
본문 3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두 가지입니다.
① 회개하는 것
② 일깨우는 것
본문에 기록된 ‘회개하라’ 는 단어가 ‘메타노이아’ 즉 ‘생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본문에 의지하여 나눌 수 있는 회개가 무엇입니까?
성도로서 살면서 무감각하게 아무렇지 않게 자행했던 세속화의 길에서 벗어나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결단이요 행함입니다.
입으로의 회개가 아닌 벗어남, 완전한 삶으로의 돌이킴입니다.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바꾸어 갔던 그 돌이킴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들이 방향을 바꾸어 예루살렘으로 갔던 그 행위의 돌이킴입니다.
김기석 목사는 ‘인생 교과서 예수’ 에서 이렇게 돌이킴을 정의했습니다.
“회개란 ‘돌이킴’이고, 하나님을 등진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해 서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pp,23-24)
기막힌 갈파입니다.
이 땅의 첨예한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영적인 여행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철저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등진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세속화의 물결을 거슬려 올라가는 삶인 하나님을 향해 서는 우리 세인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고 옥한흠 목사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2007년 100주년 대 각성 성회에서 선포하셨던 메시지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눈물로 들었던 한 대목을 소개하고 설교를 맺습니다.
“나는 사랑의 교회를 목회하면서 교회가 부흥되자 하나님이 두려워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두려워졌습니다. 몰려온 사람들을 다시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 때부터 설교를 조심스럽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설교는 가급적 피했고 꼭 전해야 하는 내용이 있으면 부드럽게 전했습니다.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설교를 했고 항상 그들에게 인기 있는 목사가 되려고 부단히 타협했습니다. 죄, 십자가, 헌신이라는 설교를 전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복, 은혜, 축복, 샬롬 등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 결과 무서운 일이 초래되었습니다. 나는 한국교회를 망친 장본인이 되었고 성도들을 타락시키는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옥 목사께서는 그 날 이렇게 피를 토했습니다.
“하나님, 이놈이 죽일 놈입니다. 하나님, 이놈이 죄인중의 괴수였습니다. 하나님, 이놈이 한국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여,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다시 살려 주옵소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한국교회의 거성이 피를 토하는 설교를 하고 떠난 지 11년이 지났건만 유감스럽게도 조국교회는 별 달라짐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 설교를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방증이요 슬픔입니다.
한국교회는 사데 교회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립니다.
이 두렵고 떨리는 시대에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그 몇 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 몇 명이 우리 교회의 지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완전히 회복의 카운트다운 시계가 멈추기 전에 우리들이 세속화라는 괴물과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우리 교회가 세속화라는 교회의 목을 조임으로 질식사시키는 교회의 철천지원수를 성령의 화살로 박살내십시다.
제발, 시간이 이제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있네 주님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가슴에 새긴 주의 십자가 사랑 나의 교회를 사랑케 하네
주의 교회를 향한 우리마음 희생과 포기와 가난과 고난
하물며 죽음조차 우릴 막을 수 없네 우리교회는 이 땅의 희망
교회를 교회되게 예밸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성령 안에 예배하리라 자유의 마음으로
사랑으로 사역하리라 교회는 생명이니
교회를 교회되게 예밸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