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잘 가고 있습니까?2024-02-26 15:59
작성자 Level 10

2018년 10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잘 가고 있습니까?

본문빌립보서 3:12-16

 

서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나누는 말이 되어 식상한 문장처럼 여길 정도로 익숙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씹어보아도 참 기가 막힌 통찰을 주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이제는 현직에서 은퇴한 목사님이지만 현역으로 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조명의 대상이 되었던 김동호 목사가 본인의 책에 기록했던 말이 바로 앞문장과 매치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은 틀렸다서울을 가려면 똑바로 가야 한다.”

역시 방향성에 대한 가르침이요교훈으로 가슴에 새겼던 문장이었습니다.

적어도 이 정신으로 우리공동체가 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참 괜찮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길을 가야하는 것이 분명한데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방향성보다는 속도나 결과물에 더 많이 기울게 하는 것 같아 사실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조금은 어려운 표현을 썼지만 재독학자인 한병철 교수가 쓴 시간의향기를 보면 참으로 현대적인 정황을 적확하게 표현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근대의 지향은 앞으로 쏘기(projektieren)이다근대는 목적 지향적이다근대의 걸음걸이는 목표를 향한 행진이다유유자적한 태도로 걷는 것정처 없이 떠도는 것은 근대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는다근대의 인간이 순례자와 공유하는 것은 오직 결연함뿐이다.” (p,33)

무슨 말입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오직 무언가 성과를 나타내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목표가 있는 곳으로 좌우를 보지 않고 의지를 갖고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도달하고야 말겠다는 결연함만이 뜨겁다는 것입니다.

헌데 문제는 그렇게 달려 목표에 도달했는데 뒤돌아보면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는다는 상실감과 공허함이 밀려온다는 점입니다.

해서 더 늦기 전에 우리들이 점검해야 하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고잘못된 선택을 하고 가고 있는데도 그 길을 고집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은 우리에게 아주 적절한 신앙인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우리들이 너무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바울의 선언입니다.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방문하여 세운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의 사역은 철저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시작된 사역이기에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에서의 사역은 특별히 애틋했을 것입니다.

지금 감옥에서 구금되어 있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우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바울의 심리적인 상태는 상당히 절박했거나 무언가를 호소하는 색깔이 강하게 여겨지는 내용들이 담겨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도리어 빌립보서 전 권에 흐르는 분위기는 상당히 밝고 행복해 보입니다.

이유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하여 숨김없이 피력하는 내용이 나와 있고더불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랑도 너무나 감사할 내용이 많다는 것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피차간의 사랑을 나눈 내용을 조금 더 세부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지체들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였던 신실한 에바브로디도를 바울 곁으로 보내 그를 돕는 동역자로 파송합니다.

그런데 바울을 돕는 사역자로 보냈던 에바브로디도가 도리어 중병이 들어 바울에게 불편한 자가 되었음을 빌립보서는 증언합니다.

감사한 것은 이렇게 중병이 들어 가망이 없었던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되어 빌립보 교회로 다시 돌려보내면서 일련의 이런 이들이 진행되는 과정에 경험하게 된 형제의 사랑에 대하여 감격적으로 서로 나누는 내용이 빌립보서 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 2:19-30)

또 다른 감사의 내증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자비량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직접 생계를 유지하며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감당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사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물질적으로 지원하며 경제적인 스폰서의 역할을 감당해 주었던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더 주목할 것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경제적으로 지원한 내용은 마게도냐의 여러 교회 중에 유일한 교회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빌립보서 4:15-18절을 읽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이런 사랑을 받았던 바울이었기에 그는 감옥에서 구금되어 있는 상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그 감동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1:8절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그렇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렇게 빌립보교회는 사랑했습니다.

한 가지만 더 긍정적인 보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하나님의 사람들로 그렇게 성장해 준 빌립보 교회성도들에게 감옥에 있는 불편함 속에서도 신앙인의 진정한 영적 자세에 대하여 아주 자신감이 있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앙 승리의 증거는 기쁨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해서 바울은 4장에 불과한 이 짧은 서신에서 무려 16회나 기쁨에 대한 단어를 수록했습니다.

그중에 하나를 소개한다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4;4절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지금까지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대한 대단히 긍정적인 보고와 나눔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반대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빌립보교회도 그중에 하나였습니다.

바울을 유감스럽게 한 빌립보 교회의 일 중에 하나는 분쟁의 소식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2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 구절을 문장에 기록된 내용으로만 해석하면 분명한 것은 두 여인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유오디아요 또 한 여인의 이름은 순두게였습니다.

유오디아라는 이름의 뜻은 순조로운 여행이고, ‘순두게는 행복한 기회라는 의미입니다.

참 좋은 뜻의 이름을 갖고 있었던 여인들인데 이 두 여인이 서로 대립하고 분쟁하고 있었다는 것이 바울에게는 염려거리였습니다.

이 두 여인의 분쟁원인은 빌립보서 내증이 보고한 바가 없어 추측할 수만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거론되는 것이 바로 주도권과 발언권입니다.

어느 교회이든 바로 이 문제로 서로 갈등하고 싸우고 대척점에 서는 것처럼 빌립보교회의 이 두 여인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 토라져서 등 돌리고 있는 이 여인들을 향하여 바울이 권면한 내용은 생뚱맞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두 여인의 전력을 갖고 당부한 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2-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함께’(WITH)라는 의미의 전치사와 결합된 단어가 5번이나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은 이전에는 서로 긴밀히 함께 교제하여 빌립보교회를 세워갔던 여인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합력했던 자들이 지금 반목하며 대립의 각을 세우고 있음을 지적하며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4:2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와 관련하여 바울 사도가 이렇게 부정이든 긍정이든 이런 일련의 일들을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품고 권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는 그 이유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찾았습니다.

본문 구절로 돌아가 보십시다.

12절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어떤 의미로 보면 빌립보교회는 참 괜찮은 교회였습니다.

주지했다시피 한 사도를 지극히 섬겼고선교에도 열심이 있었고 사랑과 기쁨으로 귀한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던 이방 교회 중에는 그런대로 본받을 만한 교회였습니다.

반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약점도 있어서 서로 갈등하며 분열된 모습도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사정이 이러하였기에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의 의미는 진정성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고내가 아직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일 수도 있습니다.

연약함을 가진 존재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인을 포함하여 지금 이 편지를 받는 수신인인 빌립보 교회의 지체들에게 잊지 말고 각인하고 또 각인해야 할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12절 후반절입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바울은 피력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이어지는 13-14절을 읽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 구절은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라 암송하기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참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는 것입니다.

붙잡지 못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뒤에 있지 않고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 앞에 있는 것이 푯대라고 말합니다.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상을 예비해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이 달려감에 바울은 양보하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마지막 구절이 바울의 이 심정을 더 확고하게 말해 줍니다.

본문 15-16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바울이 말하고 있는 마지막 16절은 비장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호합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라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즉 하나님이 부르신 자에게 주시는 자에게 약속하신 그 상을 바라보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그 달음질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말 것을 바울은 강력하게 빌립보 교회 지체들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과 빌립보서 전반에 흐르는 대략적인 이해를 통해 오늘 우리들이 집중해야 할 것이 어느 정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이 점검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오늘도 잘 달려가고 있는지를 나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 교훈을 문장으로 만들겠습니다.

 

※ 오늘 나는 주 예수께서 먼저 걸으셨던 그 신앙의 궤적에서 잘 걸어가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을 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절대로 같은 신앙의 자리에 동석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지체들에게 잘 가고 있으면 잘 가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에두릅니다.

만에 하나 내가 잘 못 가고 있다면 잘 못 가고 있음에 대하여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판단하고 자각한 뒤에 주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신앙적인 민감함에서 절대로 무력해지면 안 됩니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신앙적으로 의미 없는 길을 가고 있는지에 대하여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둔감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전 국가대표 축구 선수이자 지금은 공영방송의 유명한 축구해설가로 변신한 이영표 해설위원의 발언을 두고 교계와 심지어 세간에서도 찬반 논란이 거세게 일었던 뉴스에 저 또한 주목했습니다.

그가 모 출판사에서 발간한 말하지 않아야 할 때에 수록된 내용이 기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인 즉은 그의 아내가 셋째를 출산하였는데 마침 이 위원이 읽고 있었던 성경이 창세기였고그는 해산의 고통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시련이라는 교훈에 입각하여 아내에게 무통주사를 맞지 않고 해산의 고통을 경험한 뒤에 오는 영적 기쁨을 나누자고 한 대목이 치열한 찬반의 시비 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글 내용에 대하여 이 위원을 공격하는 부정적인 부류들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였습니다.

① 본인이 낳지 않는다고 해서 살인적인 고통을 여성인 아내에게 강요할 수 있는가?

② 창세기에 나오는 해산의 고통을 지금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이런 무식한 자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그를 지지하는 자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부부만의 고유한 신앙적인 선택에 대하여 타인들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양쪽 의견에 대하여 귀를 기울일만한 여지들이 있습니다.

헌데 저는 이영철 해설위원의 이 논쟁을 만나면서 찬반양론에 대하여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 것인가의 차원이 아니라 조금은 다른 차원으로 접근하고 싶었습니다.

이영표 위원이 근본주의적인 신앙의 소유자라는 한쪽의 공격개인의 신앙적 선택에 대하여 존중하라는 또 한쪽의 공격에는 사실 저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론의 한 복판에 서게 된 자는 항상 그런 위험성에 노출되기에 말이지요.

그러나 저는 한편으로 이영표 위원에게 또 다른 면에서의 지지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오늘 설교와 관련하여 이렇게.

오늘도 말씀 앞에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적 삶인지에 대하여 적어도 사유하고 성찰하려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구나의 감동 때문에 말입니다.

다시 노파심으로 강조합니다.

저는 이영표 해설위원이 아내와 함께 선택했던 내용이 정말로 성서적인 행동이었는가에 대하여는 신학적 허점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니 그가 아내와 함께 선택한 것을 신학적인 잣대로 응원하라고 하면 할 수 없음을 밝힙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영표 해설위원의 신앙적 몸부림에 대하여는 존경하는 마음을 표합니다.

그것이 축자적 신앙이기에 무식한 선택이든 아니면 무모한 선택이든에 대한 이유가 아니라 이영표 해설위원과 그의 아내가 함께 내가 가고 있는 신앙의 선택과 질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를 질문하지 않고는 선택할 수 없는 그런 영적인 몸부림에 대하여 1%의 반대의지 없이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누가 무력한 신앙인인가?

보수적인 신앙인이 무력합니까?

아니면 진보적인 신앙인이 무력합니까?

그들은 무력한 자들이 아닙니다.

진짜로 무력한 신앙인들은 질문 자체에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신앙적 사유함과 성찰함에 대한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나는 지금그런대로 사는 데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현상적으로 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기에 굳이 푯대이신 예수를 붙잡아야 할 이유주 예수께 잡힌바 된 것을 사수할 이유뭐 그런 것들이 전혀 내게 중요하지 않기에 그냥 이렇게 적당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해하는 삶을 사는 자가 가장 불행한 자요심지어는 위험한 자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어느 지체가 모임에서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설교를 들으면서 맨 처음에는 설교가 좋았습니다영적으로 신선했기 때문입니다그러다가 계속 설교를 들으면서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막 저항하고 싶어졌습니다설교가 비수가 되어 나를 찔렀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어느 주일에 불편하지 않은 설교를 목사님이 선포할 때가 있어서 그 설교를 듣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것입니다불편한 설교를 들어 짜증이 나 있었기에 편안한 설교를 해서 이게 웬 떡인가 하고 기뻐해야 하는 데 더 짜증이 나고 더 불편해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그날속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하나님이건 아니잖아요이건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이 아니잖아요내가 왜 이렇죠ㅠㅠ.”

지체의 이 치열한 고백을 듣다가 참 감사했습니다.

이제 주 예수께 붙잡힌바 된 그것을 붙들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었기에 말입니다.

철저한 무신론 작가인 무라야마 겐지는 나는 길들지 않는다.’에서 이렇게 독설을 표했던 글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없는 자는 목적이 있는 자에게 죽임을 당한다.”(p,132)

치열한 무신론자도 이 정도의 정신을 갖고 사는 데 그리스도인이 잘 걸어가고 있는 지조차도 관심이 없이 무력하다면 그가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교우들에게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선언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본문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인도에서 평생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인도 선교의 지평을 열었던 스탠리존스에게 유대인 출신의 한 여성 방송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세계에서 무엇을 전하려고 합니까당신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설교를 하고 계신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것 중에 당신이 소유한 것은 무엇입니까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나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습니다이것을 전합니다.” (순례자의 노래, pp,182-183)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분이 걸어가셨던 길을 내가 걷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 물음은 매일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 치열한 질문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할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늘 소망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내 주님 계신 눈물 없는 곳

저 하늘에 숨겨둔 내 소망 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나 많이 생각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 곳

 

내 아버지 널은 품 날 맞으시는 저 하늘에 쌓아둔 내 소망 있네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