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야훼 만세만
본문: 사사기 7:15-18 서론) 금년 8월에 작고한 문학 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에 나오는 기독교인들이 가슴에 잘 담아두어야 할 글을 하나 소개하면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없는 신에게 절을 하는 것보다 없어질 신에게 절을 하는 것이 덜 끔찍하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밤이 선생이다.P,172) 황 선생은 문학 평론가이지만 철학자이기도하기 때문에 그가 던진 이 말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대다수의 무신론적인 지식인들은 적어도 이런 맥락에서 양보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신은 둘 중에 하나라는 의식 말입니다. ① 신은 없다는 논리입니다. ② 혹시 있어도 사라지고 있다는 논리입니다. 전자는 사고 자체가 다른 자들이기에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리 저에게는 민감한 테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후자는 두렵습니다. 후자의 사고는 종교의 퇴색이나 무력함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퇴색이나 약화됨이라는 명제는 과학의 놀라운 발전, 그리고 이성주의와 합리적인 주지(主知)주의의 약진으로 인해 오는 경우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저는 그것보다 더 심각한 원인이 있다고 진단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종교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역기능적인 현상이라고 진단하는 것입니다. 지금 서울의 M 교회라는 대형교회의 세습화 논쟁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눈 가리고 아옹 하는 세습화를 가리켜 이 기막힌 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세습’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것이고 ‘대물림’이라고 단어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가장 상식적이고 바른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젊은 청년들이 들을 때 아연실색하는 것입니다. 70,000명이 모이는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이 교회를 물려주는 것은 고난을 물려주는 것이며, 십자가를 물려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황당한 궤변을 들으면서 다음의 글이 생각났습니다. 김기석 목사가 쓴 ‘흔들리며 걷는 길’을 보면 이런 글이 담겨 있습니다. “본질을 잃은 종교처럼 추한 것은 없다. 추하기만 하면 그래도 다행이다. 추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p,55.) 고린도후서 6:1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여기에 번역된 ‘헛되이’라는 헬라어 단어 ‘케노스’는 문자적으로 ‘텅 비어 있는 상태’라는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후서 6:1절을 이렇게 적용하여 해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함께 2년 6개월 동안 살피면서 얼마나 진정성이 있게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권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에 있는 일부 명목적 그리스도인들은 요지부동합니다. 바울의 피 끓는 권면을 외면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아픔을 갖고 이렇게 두 번째 편지에서 선언한 것입니다. 텅 빈 상태에서 은혜를 받지 말라고 말입니다. 말로만 되뇌는 은혜를 받았다. 큰 은혜를 받았다고 떠벌이는데 그러면 뭐하느냐는 것입니다. 속이 비어 있는데. 은혜를 받은 대로 안 사는데. 은혜 받은 대로 못사는 데 무슨 의미가 있냐는 바울의 에두른 비판입니다.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무섭게 경계하고 또 경책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저는 그것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결코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기독교적인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재삼 강조하지만 기독교인이 기독교적인 본질을 잃으면 추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위험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 중에 가장 정수(正秀)의 교훈을 오늘 우리 교우들과 한 번 나누기를 원합니다. 본론) 오늘 제목 설교는 크리스천 연합 신문에 기고한 지난 주간 송고한 34번째 기고문을 확장한 것입니다. 신문 독자들에게만 이 교훈을 드리기가 조금은 아쉬워서 교우들에게 더 세부적으로 설교를 준비하여 나누려고 하는 본문입니다. 본문을 이해하려면 제 5대 사사인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싸움에 나가게 된 역사적 정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선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드보라 사사의 발군의 활약으로 가나안에게 시달리던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를 해방시켜 주셨건만 다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 종교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이를 괘씸히 여겨 미디안을 들어 이스라엘을 7년 동안이나 압제하게 하셨습니다. 미디안은 다른 이방 나라에 비해 이스라엘을 심하게 괴롭혔기에 다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자 이번에는 하나님이 기드온을 부르셔서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저의 무지함 때문에 명쾌하게 이해를 하지 못하지만 문제는 제 5대 사사로 부르신 기드온은 사사의 자질에서는 0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형편없는 우상숭배자 요아스의 아들이었고 본인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서도 별로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를 사사로 선택하신 것은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 말고는 다른 것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사사기 6장에 기록된 하나님과 기드온의 소위 말하는 밀당의 장면을 들여다보면 목사인 저에게는 한편으로 부아가 치밀 정도로 하나님이 기드온에 대하여 애착을 보이십니다. 전혀 그렇지 못한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부르시면서 선심도 쓰시고, 예물을 가지고 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말라는 기드온에 엄포에 기가 죽으신 것 마냥 순종해 주시고, 기드온이 가져온 음식을 여호와의 사자를 통하여 불로 태우시면서 당신의 현현을 알리자 이번에는 내가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죽을 것이 분명함으로 사사로 나가지 못하겠다고 트집을 잡는데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를 달래시기도 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고향 사람들의 폭력에서 막아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행한 밀당의 압권은 양털 기적의 담론이었습니다. 타작마당에 놓은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게 하시는 기적, 또 한 번은 반대로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하시는 기적을 요구하는 기드온의 일체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이 기사들을 따라가 보면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뭔가 책잡히실 만한 일이 있었나 의심할 정도로 기드온에게 너그러우셨습니다. 여하튼 이 모든 과정을 끝까지 인내하신 하나님께서 드디어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시는데 성공한 내용을 사사기 6장은 보고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부름 받은 기드온과 또 다른 우역곡절 끝에 전쟁에 나갈 기드온의 용사로 뽑힌 300명이 드디어 미디안과의 전쟁에 나서는 장면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부하들에게 기드온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본문 16절을 읽겠습니다.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놀라운 것은 기드온의 300명 용사들에게는 중무장한 공격용 무기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나간 것은 고작 3개의 물건이었습니다. 나팔, 항아리, 횃불이 그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역사적인 전사(戰史)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이런 말이 안 되는 군사적인 전략은 이성적으로 결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디안과의 이 말도 안 되는 싸움의 결과는 기드온의 300명 용사의 대승으로 끝났다는 점입니다. 사사기 7:21-22절입니다.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소위 말하는 135,000:300이라는 450:1의 싸움이라는 숫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의 300 용사가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 싸움의 결과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해석하라고 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싸움에 대한 영적 가이딩(GUIDING) 을 해 줍니다. 사사기 7:9절입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주었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셨기에 이긴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싸움은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짜시고, 하나님이 연출, 감독까지 하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대단히 드라마틱한 하나님이 개입하신 승전보에 마치 옥의 티처럼 보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인 18절을 봅니다.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기드온이 미디안의 적진으로 들어가면서 300명의 부하들에게 외치라고 명령한 대목입니다. 적진에서 나팔을 불 때 행해야 하는 전투 수칙이었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를 외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제가 말씀을 드리지는 않았지만 미디안과의 전투에 나간 기드온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 앞에서 열거한 대로 기드온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 치사할 만큼 졸렬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증거를 달라고 하나님을 윽박지른 사람도 기드온이었습니다. 기적을 베풀어야 믿겠다고 생트집을 잡던 자가 기드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다 싸워놓은 싸움에 나가면서도 겁을 잔뜩 먹고 정탐 시에는 부하 부라를 데리고 나가던 용기 없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담아 듣지 않고 미디안 용사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목소리인 양 착각하던 자가 기드온이었습니다. 정말로 기드온은 이 미디안의 싸움에서 행한 것이 아무 것이 없는 무능력한 자, 그리고 무기력한 자였습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믿음이 1도도 없던 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적반하장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라니요! 기드온이 자기의 이름을 하나님과 대등하게 함께 부르면서 싸움이 임할 것을 부하들에게 종용한 것을 보면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키고 알아야 할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 내 이름을 주 앞에서 삭제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기드온의 명령 중에 아주 잘못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드온을 위하여’ 입니다. 이것은 아주 질 나쁜 명령입니다. 전쟁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여기에 첨가되어야 할 인간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앞에서 수차례 살핀 것처럼 정말 마지못해 질질 끌려왔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불신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에는 자기의 이름을 하나님의 반열에 동등하게 세우는 부정적 의도를 드러냈습니다. 신앙의 출발은 나를 하나님 앞에서 죽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도의 출발을 알리는 말씀을 공관복음서에서 빼놓지 않고 동일하게 이렇게 선포하신 것은 중요한 영적 교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마가복음 8:34, 누가복음 9:23절) 느헤미야 3:1-32절을 보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데 최선을 다해 사역했던 75명 이상의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15가지 이상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역자들이었습니다. 그 사역자들은 4KM나 되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위하여 41개조를 나누어서 성벽 재건을 사역에 참여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의 이름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열거하며 그들의 수고를 역사의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사기를 기록함에 있어서 사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감동의 흔적이 보입니다. 어떤 것입니까?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위대한 전 역사의 주인공은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일등공신이요 또 만에 하나 없었다면 성벽 재건이라는 위대한 역사는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인데 이 위대한 역사가 바로 느헤미야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 3장에서 75명 이상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정작 자기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놀라운 역사의 기록에서 자기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빼버린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자기의 이름이 높여지는 악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본문의 기드온과는 기막히게 대조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합니다. 역사는 기드온을 부정적인 지도자로, 느헤미야는 위대한 하나님의 지도자로 평가합니다. 느헤미야는 자기부인이라는 기독교의 본질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평신도 지도자였습니다. 가끔 이야기를 하지만 모세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가 광야에서 지었던 죄의 대가 때문이 아닙니다. 적어도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사랑하신 사랑의 절정이 담보된 사건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사람들에게 우상으로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는 모세의 나약함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그 근원을 제거하여 모세를 모세로 남겨 두신 극적인 하나님의 시나리오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이름은 삭제되어야 합니다. 만에 하나 내가 하나님과 동등해지고 싶은 유혹이 있을 때, 만에 하나 내가 하나님의위상과 같아지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성령의 불에 의지하여 내 이름을 영적 자판기에 있는 delete 키로 과감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이번에 제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학기말 과제로 내준 독서 보고서의 책 제목이 A,J 크로닌이 쓴 ‘천국의 열쇠’라는 책입니다. 신학생 시절에 읽었던 이 책으로 인해 저는 어떤 목사가 되어야 하는가? 에 대한 나름의 가닥을 잡을 수 있었던 은인 같은 책이었기에 현장에 나갈 목사 후보생들에게 도전을 줄 것을 믿고 책을 선택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중요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은 제 목회의 길라잡이가 되어준 프랜시스 치셤 신부였고, 또 한 사람은 저에게 절대로 닮지 말아야 하는 인물로 반변교사의 길라잡이가 되어 준 안셀름 밀리 신부였습니다. 치셤은 사제의 길을 가면서 험로의 인생길을 갑니다.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수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중국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깁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가톨릭 당국으로부터 범신론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불온분자 취급을 받으면서 왕따를 받았지만 이 땅에서 주님이 사셨던 삶을 본받지 않는 한 하늘나라가 의미가 없다고 믿으며 철저히 주님이 가셨던 자기부인이라는 좁은 길을 벗어나지 않고 불행한 삶을 사는 아픈 자들과 함께 하며 일상의 사제로서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반면 고향친구이자 신학교 동기인 안셀름 밀러는 잘 나가던 기득권 라인에 서서 승승장구하며 말 그대로 사제로서의 꽃길만을 걷습니다. 그렇게 사제 같지 않은 삶을 살면서 철저히 정치적인 이해타산을 하며 가톨릭 권력의 상층부에 머물다가 끝내는 주교의 자리까지 치고 올라가는 가톨릭 신부로서의 권력의 최정상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는 친구인 치셤을 실패한 인생의 대명사로 여기며 비하합니다. 제가 이 책을 제 인생의 5번째 안에 드는 최고의 책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적어도 성직의 길에 선 자들이 선택해야 하는 길은 안셀름 밀러가 아니라 치셤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름을 드높이는 자리는 세속의 영역에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리에는 자기를 드높이는 자리는 단 한 구석도 없습니다. 마치 치셤이 갔던 주군이신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자기부인의 길 말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고스 서원을 운영하는 김기현 목사의 글 ‘말씀 앞에 울다’를 보면 그가 히브리서 12:1절을 근거로 한 기막힌 성찰이 기록되어 있어 소개해 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김 목사는 이렇게 이 구절을 갈파합니다. “믿어야 할 이유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신앙의 증거는 충분하나, 증거만으로 불충분하다. 우리 이웃들은 우리가 믿은 대로 살지 않으면서 믿음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짜증내고 싫증낸다. 화를 낸다. 더는 듣기 싫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정당성은 삶으로 자신이 믿는 바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신자와 교회로 말미암아 확증된다. 증거 부족이 아니라 증인 부족이다.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가 문제다. 기독교를 논리로 증명하기보다는 생활로 증언하라. 증거를 들이대기 전, 먼저 증인이 되라. 허다한 증인도 한 사람으로 시작한다. 그거 너였으면 좋겠다.”(p,162) 저는 김 목사의 갈파 중에 이 대목에서 더 깊이 아멘 했습니다.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가 문제다.” 기독교의 메신저는 논리로 증명하는 자들이 아니라 생활로 증명하는 자들입니다. 그 생활은 자기부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야훼 만세만을 외쳐야 합니다. 야훼만세, 나 만세가 되면 안 됩니다. 야훼 만세 뒤에 내 이름이 나오는 유혹이 스멀대면 언제나 과감하게 내 이름을 삭제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자기부인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는 출석부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체크하도록 합니다. 적어도 양심을 파는 일들이 얼마나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치명타인지를 훈련시키고 싶었습니다. 헌데 지난 주 출석 상황을 교회에 돌아와 확인해 보니 학생 한 명이 본인의 지각 부분을 출석으로 둔갑시킨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버젓이 화이트 액으로 지우고 출석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해서 이 학생은 한 학기를 더 공부하게 할 생각입니다. 도리어 제 기억에서 이 학생의 이름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작은 것 하나부터 불의를 저지르는 자가 그것을 고치거나 깨닫지 않은 채로 현장에 나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 이름을 강제적으로 드러내지 마십시다. 내 유익을 위해 내 이름을 드러내지 마십시다. 그것은 도리어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입니다. 야훼 만세를 노래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높이실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적 신앙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문들아 머리 들어라 들릴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영광의 왕 들어가시도록 영광의 왕 들어가신다 문들아 머리 들어라 들릴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영광의 왕 들어가시도록 영광의 왕 들어가신다. 영광의 왕 뉘시뇨 강하고 능하신 주로다 전쟁에 능하신 주시라 다 찬양 위대하신 왕 왕께 만세 왕께 만세 당신은 영광의 왕이라 다 찬양 위대하신 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