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안전하시기를 기대합니까?2024-02-26 15:58
작성자 Level 10

9월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안전하시기를 기대합니까?

본문시편 18:1-3

 

서론)

 

서울대학교 경영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김병도 교수가 도전력이라는 본인의 저서에 이런 글을 기록했습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다하지만 항구에 안전하게 묶어두려고 배를 건조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글은 김병도 교수의 독창적인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1928년에 출간한 베스트셀러 내 다락방의 소금이라는 책에서 신학자인 존 세드(John Shedd)입니다.

헌데 김 교수가 이 말을 인용한 진짜 이유는 이것을 말하고 싶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이유는 목수가 배를 건조한 목적과 같다현재의 편안함에서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새로운 이론을 수립하고획기적인 발명에 도전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이유이다.”(pp,132-133.)

사회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전지대’ 즉 ‘comfort zone’이라는 단어입니다.

본능적으로 인간은 안전한 것을 추구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모험하지 않으려는 습성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안전지대에 머물려고 하는 사람은 성장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깨지고 자빠지고 넘어져도 그 과정을 겪어야 인간은 성장합니다.

안전지대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결코 자라지 않습니다.

1940년대 초에 에드먼드 힐러리라는 청년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러 나섰다가 실패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실패의 잔을 마시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그 유명한 이 말을 남깁니다.

산아너는 자라지 못한다그러나 나는 자랄 것이다나의 기술도나의 힘도나의 경험도 자랄 것이다나는 다시 돌아온다그리고 기어이 네 정상에 설 것이다.”(정영진, “사람이 따를 리더행복을 부르는 리더”, p,222.)

이 말을 한 후 10년이 지난 1953년 5월 29일에 그는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정복하는 데 성공을 합니다.

힐러리가 에베레스트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안전함과 편안함이라는 존에서 빠져 나와 에베레스트라는 결코 안전하지 않은 목표에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역발상의 교훈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짜로 안전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장소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과 고난이 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기려고 하는 용기를 갖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살려고 노력했던 한 주인공이 오늘 설교의 주인공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다윗이 노래한 시라는 표제 붙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편 기자는 이 노래의 구체적 정황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증언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그렇다면 이 시의 역사적 배경은 사울의 치세 하에 있었던 시대적 정황을 전제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그리고 복음주의권에서 해석되는 18장의 역사적 이해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오늘 한 걸음만 더 나아가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8:1-3절의 형식은 사무엘하 22장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다시 읽어보아도 전체가 아멘을 하게 만드는 은혜로운 노래요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무엘하 22:1-4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시편 18:1-3절을 고스란히 사무엘서 역사서 기자가 옮겨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편만의 본문을 갖고 이해를 한다면 사울의 치세라는 것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분명한 역사적 배경을 확신할 수 있을 터인데 사무엘하에 이 기록에 똑같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해석의 추를 넓혀야 한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정리해 보십시다.

사무엘하 22장은 다윗의 말년 역사입니다.

반면 사울의 통치와 다윗의 고난의 시기는 당연히 다윗의 말년 통치보다 당연히 훨씬 더 앞서 있는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18편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이 고백은 단순히 다윗이 왕이 되기 이전의 역사적인 배경만을 놓고 해석하기 보다는 다윗의 전 생애를 놓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올바른 해석이 될 것입니다.

왜 이 점을 제가 세밀하게 부각시키고 있습니까?

이것 때문입니다.

본문 부제를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시편서만 놓고 볼 때는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신 날이라는 문구가 확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원수의 손이라는 문구는 사무엘서에 기록된 다윗의 말년 고백을 전제할 때 더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해석을 전제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본문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정말로 은혜로운 다윗의 신앙고백은 단순히 다윗의 젊은 날의 고백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에게 걸쳐 경험했던 수많은 고난의 끝에서 하나님께 드린 신앙고백의 절정이라는 교훈을 말입니다.

가볍게 드린 신앙고백이 아니라 다윗이 드린 신앙고백의 클라이맥스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다윗의 고백은 어떤 면에서 우리들이 가슴으로 쓸어 담아야 할 보석과도 같은 교훈이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 우리 교우들과 두 가지의 교훈을 나누어볼까 합니다.

 

1) 다윗은 안전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지 않았다는 교훈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그의 전 생애를 뒤돌아보면서 이 은혜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음을 본문이 제시합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보호해 주셨다고 토로합니다.

사울에게 살해 위협을 당하던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왕위에 올라 정정이 불안하였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직접 다윗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다윗을 놀랍게 보호하셨던 것을 그는 인정합니다.

압살롬의 반역에 따른 패륜적 범죄의 대상이 되는 기가 막힌 웅덩이에서도 하나님이 본인을 건져주었음을 시 한편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자식들로 인하여 다윗의 집이 벌집을 쑤셔 놓은 것과 같은 시련의 터널에서도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다윗을 인도하셨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위기의 위기 때마다 언제나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셨던 것을 다윗은 감격으로 고백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 어느 때 단 한번이라도 다윗의 삶은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는데 하나님은 그 때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라는 가장 안전한 곳으로 다윗을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윗에게 임했던 수많은 고난들이야 말로 다윗에게는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경험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교훈 말입니다.

성경을 펼쳐 보다가 다윗의 위대함을 보게 하는 한 장면에서 숙연해졌습니다.

사무엘상 30:6절입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이 사울의 살해 위협을 피해 블레셋이 통치하고 있었던 시글락 지역에 그의 가족은 물론 부하들의 식솔들까지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쩔 수 없이 블레셋의 적대세력인 아말렉과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전쟁에 나간 틈을 타 아멜렉 군대가 시글락에 침입하여 부하들의 자녀와 부녀들을 포로로 끌고 가고 성읍은 불태우는 참화를 일으킵니다.

때가 되어 시글락으로 다윗의 부하들이 돌아왔는데 가족들이 참변을 겪은 것을 목도한 부하들이 이렇게 모든 것의 원인이 다윗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윗에게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킵니다.

다윗은 졸지에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위기에 봉착한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급했는지를 보여주는 문구가 다윗이 크게 다급하여입니다.

돌을 들어 다윗을 치려 하는 무리들 앞에서 다윗이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했는지 알려주는 본문이 읽은 사무엘상 30:6절 후반절입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시 한 번 주목할 은혜에 도전하십시다.

다윗의 위대함이 여기에서 보입니다.

다윗은 위기 때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가장 좋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단순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단순성은 위기가 올 때 무너져 내립니다.

반면 위기에 봉착했을 때 도리어 그 위기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면 바로 거기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권면해도 될 것 같습니다.

진짜로 안전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안전지대를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기 때 도리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진짜로 안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목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위기 때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거하게 하시는 안전함이 진짜임을 심비에 새기는 지체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진정성이 있는 안전함은 내가 주께 속해 있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다윗의 고백 중에 눈여겨 볼 대목이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나의 힘나의 반석나의 요새나의 피할 바위나의 방패나의 구원의 뿔나의 산성이라고 고백합니다.

즉 다윗의 고백 공식에서 배워야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X.’ 고 고백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윗의 고백 공식은 이 공식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X.’고 공식이었습니다.

이 도식은 대단히 중요한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주권의 문제와 소유권의 문제입니다.

전자는 신앙생활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고 하나님은 부속적 존재라는 토로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신앙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고 나는 단지 도구라는 고백이 담보된 것입니다.

같은 말 같지만 전혀 같지 않은 고백입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자신의 일체적 삶을 주관하시는 존재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나의 궁극적인 반석이 되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내가 피할 바위가 하나님이시며나의 영혼의 든든한 산성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고백인 것입니다.

주님은 내 삶의 주격이시고 나는 언제는 주님의 소유격이라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고백을 결국 성 어거스틴이 이미테이션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결코 안식할 수 없다.”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finds it’s rest in you.)

사무엘상 28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침입을 당하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적의 침입을 받은 사울은 당황합니다.

이전에는 외세의 침입을 받을 때마다 불편했지만 그래도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수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죽고 없습니다.

너무 급한 나머지 사울이 선택한 방법을 사무엘 기자는 이렇게 고발합니다.

사무엘상 28:7절을 봅니다.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전 단락에서 소개한 다윗의 행보와 묘하게 대비되는 뉘앙스를 느꼈습니다.

위기의 순간 하나님을 찾았던 다윗그러나 위기의 순간 신접한 무당 엔돌을 찾은 사울에게서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이것입니다.

신앙의 주권을 하나님께 둔 다윗과 신앙의 주권을 자기에게 둔 사울의 대비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소유격으로 인정하는 자들은 영혼이 안전할 수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나의 주격을 인정하는 자들은 언제나 진정한 안전에 거하게 됩니다.

왜입니까?

전자는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거부하지만 후자는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자처하시기 때문입니다.

본회퍼 연구자인 만프레도 베버가 쓴 정말 기독교는 비겁할까?’를 보면 본회퍼가 남긴 촌철살인의 글들을 소개한 몇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독일 나치치하에서 투쟁하다가 순교를 당한 본회퍼 목사가 전한 내용입니다.

안전을 추구하는 길에는 평화로 가는 길이 없습니다평화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엄청난 모험이며 절대 안전을 약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평화는 안전의 반대말입니다안전을 구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보호자가 되려 함이지요평화는 하나님의 계명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고 안전장치 대신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모든 민족의 역사를 그 분 손에 의탁할 뿐 사사로운 유익을 위해 이용하려 들지 않습니다그러므로 싸움은 무기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하는 것입니다.” (pp,50-51)

본회퍼 목사의 마지막 전언이 가슴을 때립니다.

여러분이 진짜로 안전하기를 기대한다면 무기로 싸워 나를 보호하려는 덮개 씌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할 때만 진정한 안전이 임한다는 고백이 재 강조하지만 정말로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양육반에서 읽은 카일 아이들먼 목사의 걸작인 not a fan 에 나오는 구절을 읽으면서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요즘 예수님 주변에 팬들이 많다팬은 일이 잘 풀릴 때 예수님을 응원하겠지만 반대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몸을 돌려 다른 선수에게 들러붙는다팬은 안전한 관람석에서 응원만 할 줄 알았지 경기장에서 필요한 희생과 고통은 조금도 모른다예수님에 관하여 모르는 것이 없어도 그 분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팬은 희생 없이 즐기기만 원한다.”(p,30)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진정으로 안전하고 싶으십니까?

전혀 자라지 않는 컴퍼트 존에서 팬으로 살고 있는 지금의 자리에서 빠져 나옵시오.

그리고 신앙의 링 안에서 주님을 내 신앙의 보호자로 인정하고 그분을 의지하여 치열하게 싸우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신비롭게도 가장 안전한 은혜 안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찬양을 드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로다

나의 몸과 마음 주를 갈망하며

이제 내가 주께 고백하는 말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생영의 피난차시니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여호와를 찬양하리

내 평생에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으로 내 손 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