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본문 : 미가 6:6-8 제목 : 너야, 너! 서론) 일본의 교세라 그룹의 CEO인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이 어떤 모임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무엇 하러 왔는가? 이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태어났을 때보다 조금은 더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고 숭고한 영혼을 가지고 죽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고도원의 “혼이 담긴 시선으로”, p,229.) 뭔가를 어떤 영역에서 타인에게 영향을 줄 정도로 성공한 사람들의 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냥 얼떨결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철학이나, 자기 생각을 견지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온 무언가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나모리 가즈오의 이 말을 가슴에 새긴 것은 적어도 이 정도의 철학적 사고를 갖고 있었던 그가 본인의 삶을 성공하기 위해 살아내려 했던 그 노력이 얼마나 컸을 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인 교회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정신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그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미국 브룩 힐즈(Brook hills) 교회의 담임목사인 데이빗 플랫 목사는 ‘래디컬’ 에서 이런 말을 남겨놓았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복음은 순종을 요구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면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삶과 가족, 그리고 교회를 정직하게 뒤돌아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물으셨다면 그 다음에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대답하여야 한다.”(p,40) 왜 뜬금없이 급진적 제자도를 미국에서 주창한 데이빗 플랫 목사의 이야기를 인용했을까요? 적어도 오늘의 시대에 산한 영향력을 제시하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내려면 두 가지의 질문을 치열하게 싸워내야 함을 저 역시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①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를 매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근원적인 고민과 성찰을 해 나가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질문이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께 질문되어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의 주군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주군은 영이시기에 육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 영이신 주님을 보고 싶을 때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영의 사람이 된다는 말은 영적인 존재이신 주군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을 근거로 해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들이 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해서 성경은 이런 종류의 문구들이 대단히 많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나를 찾으라, 내가 너를 만나리라” 우리들이 말씀에 굳게 서서 하나님께 영적으로 질문하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해 주십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두 번째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영적 반응입니다. ②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수없이 경험했던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과의 신실한 교제 뒤에는 언제나 조명해 주시는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단계는 대단히 중요하게 그리스도인들이 접하는 단계입니다. 개인적으로 저에게 적용하여 교우들에게 서비스를 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의 바른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하시는 경우는 저에게 대입해 볼 때 거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조명하신 뒤에 알려주시는 요청하심은 타당한 순종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광신이나 맹신이 아니라 합리적 신앙이라는 것을 전제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내용을 증명해 내보려고 할 것입니다. 본론) 미가 예언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을 염두 해 두고 볼 때에 주전 8세기 후반 즈음에 사역했던 예언자 미가의 활동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전 8세기 후반의 남 유다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은 많이 위태로웠던 시기였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감히 선민 공동체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멸망을 당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던 남 유다 역시 바로 그 앗수르의 위협에 굴복하여 약 100여 년 동안 봉신 국가로 조공을 바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기에 그 심각성은 상상을 뛰어넘는 위기감 100%의 시기였습니다. 헌데 요담과 아하스의 뒤를 이은 히스기야는 100년 동안 이렇게 수모를 당하고 산 조국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이사야 선지자의 극단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에게서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이로 인하여 남 왕국 유다는 앗수르에게 주전 701년에 침공을 받고 예루살렘을 제외한 48개 성읍을 빼앗기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다행이 예루살렘만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안전하여 근근이 남 왕국 유다의 맥을 이어가고는 있었지만 국가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심각성은 외치의 문제보다 내치의 문제였습니다. 이 정도의 위기를 만난 남 유다라면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하나가 되어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남 유다의 소수 지배 계층들은 전혀 서민들을 돌보지 않고 도리어 착취의 대상으로 핍박을 가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자행합니다. 정치인들과 부유층에 있는 자들은 서민들과 농민들을 괴롭히며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해서 가난한 집의 여인들과 아이들은 버려졌습니다. 오늘 새벽에 성서일과로 읽은 미가 2:9절을 보십시다. 그 증거입니다. “내 백성의 부녀들을 그들의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원히 빼앗는도다” 미가 3:1-3절을 연속해서 보십시다.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말 그대로 당시 사회 지도층의 힘이 있는 자들은 식인종들과 같은 악을 행하였습니다. 힘없는 자들의 노동을 착취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약한 자들에게 있어서 최후의 양심적인 보루가 되어야 할 법정은 뇌물과 더러운 돈으로 오염되어 더 악질적인 판결을 내리는 죄악의 보루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3:11절에서 이렇게 고발합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제 서민들과 민초들이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시대의 예언자들 즉 종교 지도자들뿐입니다. 그들만이라도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의 지지자가 되어 주어야 했는데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보십시다. 정말로 기가 막힌 참담한 당시의 종교적인 타락의 상태를 보겠습니다. 미가 3:5절입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설상가상 그리고 적반하장으로 이미 맘몬에 물든 선지자들은 고통을 받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미가 3:11절입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무슨 말입니까? 이렇게 엉망으로 사는 데 괜찮다는 것입니다. 끄떡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심판을 하겠느냐? 그런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가 막힌 영적, 정치적 상태가 미가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영적 흑암의 시대라고 말해도 괜찮은 시대가 바로 미가 예언자의 시대였습니다. 이제 이런 배경을 전제로 오늘 6장을 소개합니다. 가난한 자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핍박하던 소수의 부유층과 정치 권력자들이 자기들의 죄에 대한 근원적인 회개나 돌이킴이 없이 그들이 생리적으로 갖고 있었던 종교성을 토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리자고 뜻을 모았음을 예언자 미가는 비꼬고 있습니다. 없는 자들의 것을 착취한 자들이 모여 하나님께 드리자는 제물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그들은 의기양양했습니다. 갖고 있는 재물들이 너무 많으니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최고의 것으로 드리자고 떠벌인 것입니다. 아마도 대리만족이나 보상심리이었을 것입니다. 최고의 것을 드리자고 말하는 미가 시대의 권력자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더 기막힌 것은 최고의 제물을 드리자고 거국적인 운동이 일어났으니 종교지도자들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말 그대로 대목을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가 예언자가 이렇게 들떠 있는 가중한 자들을 향하여 비수를 던집니다. 찬물을 끼얹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7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무슨 말입니까? 가증한 짓을 하고 있는 유다 지도층을 향한 비아냥입니다. 환언하면 너희들이 아무리 좋은 하나님께 드려도 헛 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헛수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이 드리는 그 최고의 제물을 받으시기나 하겠느냐는 냉소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짓하지 말라는 비수의 선포였습니다. 그러면서 미가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본문 마지막 8절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이 저에게는 대단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8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짜로 받으시는 제물은 가증한 최고의 제물이 아니라 이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바른 삶이라는 제물입니다. 이 말을 저는 이렇게 승화시켜 적용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원하는 제물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바로 너 자신이라는 제물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저와 여러분에게 원하는 제물은 바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나’라는 제물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아서 로마서 12:1-2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로마서 12: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0세기의 선지자라고 말하는 아이든 토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짜 예배자’라는 책에서 이렇게 사자후를 토해 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네 생각 속에 거하고 싶다. 네 생각들을 내가 거할 수 있는 성소로 만들라고 하셨다” (p,171)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제물은 금, 은, 보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원하는 제물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바로 ‘나’입니다. 바로 ‘너’란 말입니다. 교회 홈페이지에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근래 설교하기가 무섭습니다. 주일에 예배당에 앉아 있는 지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팔짱을 끼고 P,T, 포사이스가 ‘현대성’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말한 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위다.’라고 시위하며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두렵고 힘이 듭니다. “어디 한 번 나를 감동시켜 봐라.” 그럼에도 종이 근래 자꾸만 두렵고 떨리는 것은 성도들이 나를 감동시켜보라는 압박보다 나이 탓인지, 상처 탓인지 하나님이 나에게 그 동안 민감하게 주셨던 감동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근래에 하나님께 제일 많이 기도하는 제목이 ‘회복’입니다. 교우들에게 부탁합니다. 담임목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목사가 가장 절망할 때는 목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이상과 몽조가 희미해 질 때입니다. 그러니 내가 전하는 복음의 능력이 발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선포한 말씀으로 성도들이 변화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요 근래 그런 조짐들이 저에게 강하게 들어 많이 힘이 듭니다. 그래서 회복을 저 또한 기도하며 엎드립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하나님이 바른 신앙의 길에 서 있는 나를 원한다는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리 꼬고 앉아서 팔짱 끼고 나를 감동시켜보라고 압박하는 신자가 된다면 그건 참극입니다. 주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제물은 바로 ‘변화된 나’인데 그건 기대조차 할 수 없는 남의 나라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영국이 낳은 불의 사자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에서 잠자고 있는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마귀는 사이비 신자들을 대적하지 않는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참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독액을 비축해 둔다. 그의 불구대천지 원수는 참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다.”(p,61)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우리 교회는 사단이 독액을 준비하고 있는 그의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영광이 있습니까? 우리 세인 지체들은 사단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정말로 싫어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까? 정말로 그런 능력의 그리스도인들이 되려면 당신이 바로 제물이 되십시오. 세상의 형식과 방법에 길들여져 있는 점잖은 그리고 폼 잡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호화찬란한 제물을 드리려는 형식적 그리스도인 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산 제물이 되는 바로 당신이 되십시오. 예언자 미가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원하는 제물은 바로 너라고 너!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따스한 성령님 따스한 성령님 마음으로 보네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만족함을 느끼네 사랑과 진리의 한 줄기 빛 보네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그 사랑을 느끼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곳에서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