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90번째 강해) 제목: 마라나타 본문: 고린도전서 16:21-24 서론) 1992년 10월 28일 KBS 9시 뉴스에서 취재 기자가 연결되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을 들썩여놓았던 다미 선교회 집회 현장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물론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공영방송국에서 집회현장을 취재할 정도로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은 대 혼란의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펄시 콜레’라는 극단적 신비주의자 쓴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극단적 시한부 종말론이 대두되었고 그 결과 다미 선교회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집단이 배태되어 해프닝이 일어나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것입니다. 다미 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이 가져온 사회적 파장은 당시 이 일을 주도했던 이장림 목사가 구속되고 실형을 선고 받음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대단히 큰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오로지 휴거될 것만을 믿고 직장, 학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자들이 당해야 했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기에 이 일을 주도했던 자들의 소위는 아주 질 나쁜 일이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일련의 일들은 대사회적인 관점에서 본 결과물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관점에서 본 부정적인 결과물보다 더 심각하게 교회적인 차원에서의 참담한 결과물들이 남게 되었다는 점은 아프고 쓰린 부분입니다. 재림 신앙의 퇴색입니다. 이 사건 이후, 기존의 건강한 교회에서 주장하는 재림론 마저도 많은 신앙인들에게 외면당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기에 가장 평범한 신앙의 기조를 유지하는 교회 목회자들이 재림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영적 긴장감은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기막힘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사단의 전략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재림을 설교할 수 없게 만들고, 또 설교를 행한다고 해도 믿지 않게 하는 대단히 반기독교적인 사탄의 전략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여행의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90번째 강해의 테제로 재림을 말할 수 있어서 대단히 다행으로 생각하며, 동시에 기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재림은 기독교가 양보할 수 없는 본질적 교리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몸으로 오신 주님이 우리가 죄를 지은 대가로 겪어야 할 고난과 죽음을 대신 하셨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렇게 우리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신 주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다시 부활하신 것까지가 복음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부활까지만 듣는 것이 복음이라면 상당한 손해를 보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완성도는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계시다가 아버지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 되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선악간의 죄를 심판하신 뒤에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믿는 것이 복음의 완결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구도로 볼 때 재림 즉 주님의 다시 오심은 복음의 완결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재림을 설교하지 못하게 하고, 또 믿지 않게 하는 1992년의 해프닝은 철저한 사단의 계략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설교자인 저의 영적 소신입니다. 물론 저는 오늘 우리 교우들과 함께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재림의 메시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92년의 이장림처럼 교우들을 겁박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설교를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재림에 대한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은 92년이나 지금이나 공히 복음적이지 않고, 성서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 우리 교우들에게 이렇게 직설적으로 선포하는 것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본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 21절입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전서 1:1-16:21절까지의 기록은 서기(secretary)가 했다는 말입니다. 마치 로마서라는 대작을 더디오가 기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로마서 16:22절입니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고린도전서 16:22-24절이라는 세 구절은 바울이 친필로 붓을 들어 썼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① 이 편지가 바울 자신의 편지임을 확인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② 그 만큼 마지막 인사는 중요한 바울의 신학을 총 정리한 성격이 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중요하게 여겨 직접 친필로 기록한 내용이 무엇인지 접근해 보십시다. 본문 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2절은 오늘 설교의 주제절일 뿐 아니라 고린도전서를 총망라하는 바울의 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어찌 보면 극단적인 발언처럼 보이는 흔적을 편지 말미에 남겨 놓았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이러한 발언이 SNS에 공개되었다면 비 신앙인들이 벌떼처럼 바울 공격하였을 것입니다. 광신도, 정신병자, 대화 불가의 무식한 종교인 등등으로 도배하며 바울을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22절에 등장하는 저주라는 단어는 그 시대의 배경적인 이해를 전제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가 있었겠구나 하는 공감을 표하게 됩니다. 어떤 면입니까? 추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지난 강해들을 통해 살폈듯이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울을 반대하는 적대 세력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이들 중에는 헬라적인 철학을 견지하면서 고린도라는 도시에서 지성적인 부류에 들어간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십자가의 도와는 상관없이 모여 있는 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또 한 편으로는 유대적인 율법에 빠져 있으면서도 예수에 대하여도 한편을 열어놓은 양다리를 걸친 자들도 있었습니다. 동시에 아볼로파와 같은 바울을 지지하는 공동체와 색깔을 같이 하지 않는 분파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합집산으로 모여 있는 바울을 반대하기 위해 모인 반대주의자들은 바울이 무엇을 하든지 반대하며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편을 가르지 않는 사도로서의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그 증거가 본문 23-24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여기에 기록된 바울이 행한 축도의 대상을 보면 그 증거를 확신하게 됩니다. 23절의 ‘너희’와 24절의 ‘무리’가 그 증거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너희’와 ‘무리’는 바울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대명사요, 형용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그들이 바울을 불신하고, 거부하고, 팽한다고 하더라도 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아가페 사랑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무리들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품어야 하는 대상이라고 간주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예외로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예외가 바로 22절에 발언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렇습니다.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예외였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저주’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나쎄마’의 문자적인 의미는 ‘멸망에 바쳐진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를 갈라디아서 1:6-8절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6-8절 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8절에 기록된 ‘저주’가 바로 ‘아나쎄마’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전제한 저주의 대상은 다름 복음을 전하는 자였습니다.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의 본문을 종합하면 이렇게 도식이 형성될 것 같습니다. 누가 저주를 받는 사람입니까?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는 자들은 예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서슬이 시퍼렇게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그런 뒤에 아주 의미 있는 인사를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전한 것은 마치 신의 한 수처럼 보이는 대목입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마라나싸’였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부터 아람어식 표현입니다. ‘마라나+싸’입니다. ‘오시옵소서.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적인 신앙의 전통은 누가 뭐라 해도 주님의 다시 오심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순교적 각오로 신앙의 반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은 이유는 마라나+싸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진짜로 시한부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무장했던 자들입니다. 적어도 바울 시대로 여겨지는 주후 1세기에 주님의 재림은 임박한 사건으로 여겨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 역시, 주님이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던 것이 그의 여러 서신에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 시대는 순교적인 시대였기에 성도들의 신앙생활 유지는 정말로 힘들고 어려웠을 것이고, 이로 인해 주님의 다시 오심을 통한 위로는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요소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배에 모일 때마나 ‘마라나싸’를 인사의 상용어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예수를 사랑하는 것의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을 향하여 이렇게 쐐기를 박듯이 선언합니다. 마라나싸- 주님, 오시옵소서. 바로 이 대목에서 설교자인 저는 제 신학적 성찰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고린도서 강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①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의 심령 안에 이루어진 평강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② 아직 실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는 주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실 그리고 완성하실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바울이 선언한 ‘마라나싸’의 인사는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아직 실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임할 것에 대한 선언이자 확신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 오셔서 완성할 주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자는 의미였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장림을 비롯한 각종 이단들이 주장한 시한부 종말론의 오류로 인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적인 교리를 시답지 않게 여기는 이 영적 비극의 시대에 저는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이렇게 권하며 선포하고 싶습니다. 사탄의 전략이 상당히 교묘하고 위험스럽게 다가오고 있지만 결코 재림의 신앙 즉 마라나싸의 신앙에서 물러서지 않기를 기대하며 선포합니다. 이것을 잃으면 내 신앙의 전부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고린도전서를 마감하는 설교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저는 분명히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복음적인 신앙의 엑기스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실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또한 기다리는 것임도 선포했습니다. 그렇다면 설교의 마지막에 주목해야 하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적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재림을 기다리는 자의 삶의 형태입니다. 적어도 이 땅에 다시 오실 주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이 선택할 신앙의 형태가 있음을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직언합니다. 본문 마지막 절 24절이 그것을 알려줍니다.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그렇습니다. 재림 신앙을 갖고 이 땅을 살아가는 자의 궁극적인 형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두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여기에 기록된 ‘무리’로 번역된 단어는 원어성경을 보면 명사가 아닙니다. ‘판톤’ 이라는 형용사입니다. 번역하면 ‘모든’입니다. ‘모든’이라는 단어에는 예외가 되는 부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열외 군번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두를 의미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의 대상은 하나에서 열 모두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모두에게 실천하는 것은 이렇게 신학적으로 정립될 수 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불현 듯 성령이 조명해 주신 한 구절을 말씀드리고 설교를 끝맺으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9:17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잘 아시는 것처럼 이 구절은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다메섹에 직가라는 곳의 유다의 집으로 끌려들어가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있을 때에 주님이 제자 아나니아에게 현현하셔서 다음과 권하셨습니다.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여 그의 눈을 뜨게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주님께 직고힙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주변 지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주의 형제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친 자인데 어떻게 그에게 가서 안수를 하라는 말입니까? 의 고변이었습니다. 이 말을 받으신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당신의 선교적 비전을 알려주셨습니다. 사울은 이방을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계획을 말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아나니아는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사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사울을 만나 안수를 해서 그의 눈을 뜨게 하는 장면이 바로 사도행전 9:10-19절에 보고됩니다. 바로 이 기사 중에 가장 감동적인 주지했던 시도행전 9:17절입니다. 안수를 하면서 아나니아가 부른 호칭에 주목합시다. ‘형제 사울아’ 여기에 번역된 ‘형제’의 헬라어 원어 ‘아델페’는 당시에 이런 자에게 불러주는 호칭입니다. ‘주 안에서 형제 된 자’ 무엇을 말씀드리려는 것일까요? 아나니아는 요주의 인물, 아직도 검증되지 않은 관찰해야 할 인물인 사울을 형제라고 호칭했습니다. 이 말은 아나니아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리고 그 날에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믿음의 형제들을 위로하실 것을 믿고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불편한 자 사울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품은 대단히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제천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저는 이제 2016년 9월 18일 주일부터 80회에 걸쳐 진행한 고린도전서 강해의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라는 위대한 서신 여행을 함께 달려내신 교우들이여! 그러므로 고린도전서를 마감하면서 저와 여러분이 가슴에 담아야 할 은혜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바울의 이 기막힌 메시지를 함께 듣고 알았던 동시대 동역자 베드로도 이렇게 힘을 합쳐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8절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마무리하는 찬양을 드리고 기도하겠습니다. 마라나타 마라나타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땅에 모든 끝 모든 족속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마라나타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춤추며 경배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자 십자가를 들고 땅 끝까지 우린 가리라 우리 주님 하늘영광 온 땅 덮을 때 우린 땅 끝에서 주를 맞으리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