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런 부부 없습니까? (2)
본문: 고린도전서 16:19-20
서론)
저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론이라고 할 수 있는 캘빈의 예정론을 반대하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해서 신학교를 다니면서 예정론과는 정 반대되는 신학적인 맥을 이어왔던 웨슬레 신학의 자유의지론 신학을 공부했기에 예정론에 대하여 상당한 거부감이 몸에 배어 있는 기초적인 신학 테두리가 저에게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자유의지론자인가?
네, 그렇습니다. 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연세대학교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그 동안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예정론에 대한 공부를 조금은 더 깊이 있게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내가 얼마나 편협하게 자유의지론에 빠져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또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예정론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한다면 저는 예정론자는 아닙니다.
저는 절대 예정을 결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구원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자들만을 위한 계획이라는 칼빈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당신은 기회주의자이고, 중간에 있는 회색주의자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에게 교리적인 면에서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정직한 것이 아니냐고 압박을 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예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에 대하여 목숨 거는 자가 아니라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해서 교리는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군이시며 나의 전부라는 사실만이 중요합니다.
저는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싫습니다.
저는 편향을 싫어합니다.
보수가 건강한 것은 진보가 견제하기 때문이고, 진보가 건강한 것은 보수가 견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한 경쟁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알미니우스 신학의 계보를 이은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 목사는 철저한 예정론자인 조지 휘필드 목사와 동시대에 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의 행보는 교리적인 면에서 대단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사역을 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에 있어서 결코 양보하거나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건넨 편지와 글을 보면 이들은 교리적인 차원에서 첨예한 대립의 각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교리적으로는 서로 결별합니다.
그런데 놀라울 것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동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공통분모로 영적 위기였던 18세기 영국을 다시 깨우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종들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 관하여 전해져 오는 일화가 있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조지 휘필드 목사의 장례식 설교를 존 웨슬레 목사가 맡았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장례식에서 조지 휘필드의 사역을 추앙하고 응원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자 어느 부인이 웨슬리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휘필드 목사님을 천국에서 만나게 될 날을 고대하시겠군요.”
그러자 웨슬레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부인.”
웨슬레 목사의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당황한 부인이 깜짝 놀라며 이렇게 다시 말했습니다.
“난 웨슬레 목사님께서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러자 웨슬레 목사는 손을 저으면서 이렇게 다시 반응했습니다.
“저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휘필드 목사님은 천국에서 별처럼 환하게 빛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섬길 것입니다. 그래서 나같이 미천한 종은 휘필드 목사님의 지나가는 모습일지라도 어쩌다 보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선의의 경쟁자였던 두 사람의 훈훈한 예를 보면서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부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이어 다시 한 번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하여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가 절대적으로 어려웠던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철저한 크리스티아노스(그리스도인)라는 정체성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았음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이 정체성을 전제로 쉽게 지나치면 안 되는 나머지 하나의 은혜를 추적하면서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2) 이들 부부는 서로가 선의의 영적 경쟁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접해 보십시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바울은 주후 55년경에 집필한 고린도전서에서 이들 부부의 열거 순서를 아굴라와 브리스가라고 적고 있습니다.
남편인 아굴라의 권위를 세워주었다는 말입니다.
대다수의 복음주의 신약학자들이 말하는 로마서의 집필 연대는 고린도전서보다는 후대라고 봅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약 주후 57년 정도로 추측합니다.
헌데 이 편지에서는 이들 부부를 기록한 서열 순서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롬 16:3)
고린도전서에 비해 부부의 기록 서열이 바뀌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아내인 브리스가의 권위를 더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또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18:2절을 봅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이 다 끝난 뒤에 바울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본 그의 주치의 누가에 의해서 기록된 글입니다.
그렇다면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시기는 너무나도 당연히 바울의 순교 이후인 주후 64년경 이후일 것입니다.
이 때의 기록에 의하면 2절에서는 아굴라가 브리스가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사도행전의 한 구절을 더 섭렵하십시다.
18:18절을 봅시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이 부분에서는 다시 또 브리스길라의 기록이 남편보다 앞서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의 기록을 살피겠습니다.
4:19절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바울의 순교 직전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인 디모데후서는 사도행전과 비슷한 주후 64년경에 작성되었다고 학자들은 추론합니다.
바로 이 책에서 아내가 남편보다 기록 서열이 앞서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순서가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머리에 쥐나게 이렇게 복잡한 것을 끄집어냈을까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끄집어내야 할 만큼 중요한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자들은 아내의 이름이 남편의 이름보다 앞서게 한 선례가 당시에는 없었기에 브리스가가 먼저 거론되며 이름이 앞서 기록된 이유는 브리스가는 로마의 귀족 신분을 갖고 있었던 유대 디아스포라였고, 아굴라는 노예 출신이었기에 신분상의 문제로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하였는데 제가 보기에는 너무 궁색한 뜯어 맞추기 해석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아굴라의 이름이 먼저 거론된 오늘 본문과 사도행전 18:2절의 경우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기에 부연할 필요가 없지만 로마서 16장과 사도행전 18:18절의 경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는 오늘 설교의 교훈과도 연관되어 있는 중요한 공부가 아닐 수 없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미국 나약 신학교 성경해석학 교수인 김동수 박사는 ‘로마서 주석’에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어떤 학자는 브리스가의 이름이 아굴라보다 종종 선행되는 것은 브리스가가 아굴라보다 사회적으로 더 높은 집안 출신의 사림이었기 때문이고 혹은 그녀가 그 남편보다 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보다도 브리스가가 아굴라보다 주님을 먼저 믿기 시작했거나 혹은 그녀가 교회 사역에 더 헌신적으로 섬겨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p,977)
김 박사의 해석에 담임목사는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들이 고린도전서를 통해 상세히 살펴 본 것처럼 바울은 여성을 폄하하거나 비하하던 가부장적인 생각을 틀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김 박사의 의견에 동의하는 저의 신학적 선택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천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28절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고린도전서 8:6절을 연구할 때 우리는 당시 거의 파격이라고 할 정도의 바울의 폭탄 선언도 배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만물이 그에게서 났다는 선언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존재라는 혁명적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요즈음 말하는 반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똑같은 가치의 존재로 여겼던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로마서라는 대작을 당시 기라성 같은 남성 제자들을 배제하고 겐그레아 출신의 나약한 여성에게 맡겨 로마에 전달할 것을 계획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도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 부부는 영적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선의의 영적 경쟁자였다는 교훈 말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조금은 도전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들 부부는 때에 따라 서로를 영적으로 이끌어주는 긴밀한 동역자였다는 말입니다.
다만 이런 결론적인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은 오늘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나름의 유추가 가능합니다.
바울과 함께 선교의 현장에서 사역하던 초기적 상황에서는 이들 부부에게 있어서 남편 아굴라가 영적 권위에 있어서 아내를 리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선교 후반부로 가면서 아내인 브리스가(혹은 브리스길라)가 남편을 영적으로 리드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해석은 시사(示唆)하는 교훈이 큽니다.
이제 성경에서 증언되는 또 다른 부부 한 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나와 남편이었던 엘가나입니다.
한나와 엘가나에게 얽힌 대단히 아름다운 스토리를 하나를 소개합니다.
사무엘상 1;22-24절입니다.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 하니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에 그 여자가 그의 아들을 양육하며 그가 젖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아시는 것처럼 한나는 아들을 낳지 못한 이유 때문에 상당히 힘들어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기를 대신한 것처럼 보이는 몸 종 브닌나의 득남과 견제는 한나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해서 요즈음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 예배당으로 나가 서원 기도를 드린 끝에 사무엘이라는 정말로 소중한 아들을 낳게 된 스토리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헌데 아들이 자라 젖을 뗄 즈음이 된 나이에 본인이 하나님께 서원했던 약속을 떠올립니다.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아마도 조금 전에 읽어드린 사무엘상 1:22-24절의 정황으로 보면 사무엘의 나이가 만 3세를 넘지 않을 정도의 나이로 추정되는데 이 어린 것을 한나는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여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로 데려가서 하나님께 드리자는 청을 합니다.
아내의 이 청을 받은 남편 엘가나의 반응이 바로 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3절에 기록된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라는 이 대목은 실로 엄청난 행위입니다.
젖을 갓 뗀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아내의 소망을 허락하는 장면입니다.
감동적인 스토리로 여겨지는 이 이야기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조금 더 열어 보십시다.
사무엘상 1:11절을 읽습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실로 성소에 도착한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낳기 전의 기도입니다.
무슨 기도입니까?
아들을 주시면 아들을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실은 대단히 위험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앞 뒤 정황을 보면 이 기도는 전적인 한나 만의 기도였다는 점입니다.
남편의 의견이 배제된 기도였다는 점입니다.
사무엘상의 전반부는 주전 1,00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때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여성의 인권은 보장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아들을 드리겠다는 한나의 기도가 얼마나 위험천만의 기도였는지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은혜로 사무엘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젖 뗄 즈음이 되었습니다.
아내인 한나는 남편에게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이행하자고 압박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 엘가나는 아내의 말에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라고 허락합니다.
사무엘상 1장의 행간 밑에 숨겨져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무엇입니까?
남편 엘가나는 무리수인 것처럼 보였던 한나의 서원기도를 인정한 것은 물론 남편의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불쾌할 수 있는 아내가 자행한 일에 대하여 이미 용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언이 ‘그대의 소견에 좋을 대로’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통해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엘가나는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일을 허락할 수 있었을까? 에 대한 답 말입니다.
저는 그 답을 사무엘상 1:21절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 엘가나와 그의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엘가나와 한나는 매년 고향인 라마다소임에서 동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실로로 정기적인 제사를 드리러 올라갔다고 사무엘 기자가 보고합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부부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절정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 두 부부는 정기적인 예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던 이들에게 찾아온 은혜는 이것입니다.
아내가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은 그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고 또 아내가 남편에게 아들을 성소에 드리자는 목을 건 요청도 남편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았기에 담대히 요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가나와 한나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하나님께 드려진 아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이자 첫 번째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신정정치 시대에서 왕정 정치시대로 넘어가는 위험스러운 이스라엘의 과도기를 영적으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앞서거니 뒤서기는 했지만 언제나 주의 나라와 소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수많은 백성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선의의 영적 경쟁자로서 서로를 격려하고 때로는 채찍질하며 선한 싸움을 싸워온 아름다운 부부였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작고한 신영복 선생의 역작인 ‘담론’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1회 완료적인 변화란 없습니다. 개인의 변화든 사회의 변화든 1회 완료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설령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물주고 키워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관계라면 더구나 그렇습니다. 제도가 아니고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고 결정적인 방법은 없습니다.”(p,244)
선생의 기가 막힌 갈파를 통해 제가 가슴에 담아둔 것은 ‘사람이 움직이는 존재’라는 사유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부도 여기에서 열외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려면 부부이든,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이든 그 움직임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선한 자극이 되는 경쟁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브리스길라외 아굴라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엘가나와 한나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가 선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경쟁하여 1회적 변화가 없는 인간임을 명심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경쟁의 도구는 하나님께 날마다 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예배입니다.
선한 경쟁의 구도를 예배를 통해 발전시켜 나아가는 우리 교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임재
하늘의 문을 여소서 이곳을 주목하소서
주를 향한 노래가 꺼지지 않으니
하늘을 열고 보소서
이곳에 임재하소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기도의 향기가 하늘에 닿으니
주여 임재하여 주소서
이곳에 오셔서 이곳에 앉으소서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소서
주님의 이름이 주님의 이름만이
오직 주의 이름만 이곳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