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 수요일 묵상 요셉의 개과천선 오늘의 성서일과 사무엘상 2:1-10, 창세기 37:2-11, 마태복음 1:1-17 꽃물 (말씀 새기기) 창세기 37: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마중물 (말씀 묵상) 몇 년 전, 모교에서 구약을 가르치는 친구가 섬기는 교회에 와서 구약 톺아보기 사역을 했다. 친구는 요셉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를 이렇게 정의했다. “돼 먹지 못했던 인간” 왜 아니 그럴까 싶다. 형들의 잘못을 덮어주는 인성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고자질 하는 못 돼먹은 인성의 소유자, 자기의 끔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의 의를 자랑하던 밉상이 요셉이다. 한국교회의 전통은 이미 세뇌되어 있는 것은 결코 바꾸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모한 용기가 있다. 반드시 고쳐야 하는 용감함(?)이다. 꿈꾸는 소년으로 미화된 요셉, 요셉은 꿈을 꾼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꿈을 믿고 살았다는 허황된 가르침은 요셉의 잘못을 무조건적으로 인정하는 기류로 흘러갔다. 요셉이 자기가 꾼 꿈을 비로소 생각한 시기가 애굽에서 총리에 등극하고 형들을 본 이후임을 창세기 42:9절에서 밝히고 있는데도 우리는 요셉이 자신의 꾼 꿈을 언제나 생각하며 살았던 자라고 확신하고 있기에 더 더욱 요셉의 잘못을 용인하는 듯하다. 요셉은 어려서 인성이 그리 바르지 못한 자인 게 사실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사의 주인공을 성경은 그리고 있을까! 이럴 때 예정론자들이 단골메뉴로 들고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다. 그거야 그 나라에 가봐야 하는 거니까 오늘 묵상에서는 논외로 하고자 한다, 다만 요셉의 어린 시절의 못 돼먹은 인성이 어떻게 후에 형들을 용서하고 포용한 자가 되었을까는 오늘 묵상의 핵심이다. 나는 이렇게 접근하고 싶다. 꿈 때문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겪었던 고난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결국 고난이 요셉을 막 돼먹은 인간에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성숙하게 만든 도구였다고 해석하고 싶다. 결국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2:10절에서 언급한 메시지에 나 또한 동의한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더불어 C,S 루이스의 말 그대로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루이스, “고통의 문제”, 홍성사, p,141)이라는 갈파를 지지한다. 돼 먹지 못한 인간, 요셉도 사용하셨는데 나 또한 하나님이 사용하실 것이라는 소망이 은근히 생기는 아침이다. 두레박 (질문) 나는 고난 이전의 요셉 型 인간인가? 아니면 이후의 요셉 型 인간인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주님, 제천이 온통 눈으로 덮였습니다. 모쪼록 내 마음도, 교우들의 마음도, 이웃들의 마음도, 특히 정치판도 백색의 눈처럼 순결해 지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성탄절을 앞두고 있다. 말잔치 성탄의 의미가 아닌, 이웃과 함께 하는 의미 있는 성탄을 만들어 보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이태원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피눈물 담긴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자녀들이 범하는 최고의 불효는 부모보다 앞서가는 불효라는 말이 있는데 이 불효를 경험한 부모들을 어떻게 정치적 논리로 재단할 수 있단 말입니까? 원인 제공자를 모두 벌하는 책임자 처벌이라는 물리적인 결과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하늘 무너짐을 모두가 마음으로 막아주는 일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합동분향소 설치를 가장 많이 하는 이 나라를 긍휼히 여기셔서 정치적 갈라치기로 아픈 자들을 두 번 죽이는 나라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