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8일 금요일 묵상 가만히 있음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46편, 누가복음 1:68-79, 스가랴 11:1-17, 예레미야 22:1-17, 베드로전서 1:3-9 꽃물 (말씀 새기기) 시편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마중물 (말씀 묵상) 대학원에서 학위 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께서 내게 이렇게 질문했다. “이 목사님, 논문의 논지가 분명해 보여 고맙습니다. 목사님의 논문처럼 이렇게 삐딱해야 하는 게 논문입니다.” 분명히 칭찬으로 받았다. 하지만 지도교수의 그 말은 지금도 내게는 학문하는 자의 태도로 자리매김했다. “대가를 두려워하지 말고 시비를 걸어라. 딴죽을 잘 걸어야 학문적 진보가 있다. 당신의 역설을 증명하고 싸워라” 등등 지도 교수는 내게 많은 공부를 시켜주었다. 시인의 한 마디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 수 있는 방법 소개가 의미심장하다. 평범하지 않은 소리이기에 말이다. 비튼 말이기에 말이다. “가만히 있어” 히브리어 ‘하르푸’의 번역이다. 본문 텍스트를 전제할 때, 이 상황은 전쟁과 같은 인간 탐욕으로 야기된 카오스가 종식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전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는 시인의 영적 선언이다. 동의하는 해석이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를 더 첨부 하고 싶다. 전쟁만이 아니다. 세속적 소음의 일소도 덧붙인다. 하이데거가 말한 ‘Dan man’은 ‘가만히 있음’을 못견뎌한다. 그의 말대로 평균적인 인간들이야 그렇다 치자. 하지만 ‘크리스티아노스’가 ‘가만히 있음’에 천착하지 못하는 것은 유감천만이다. 시인이 선포한 메시지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식하자. 시끄러운 곳에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 못한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됨 알지어다’ 오늘 내가 받은 벼락이요 천둥소리다. 두레박 (질문) 소음에 익숙해지지는 않았는지, 대중적 표퓰리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는 않은지, 도리어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자. 손 우물 (한 줄 기도)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하나님, 오늘은 특별히 이렇게 살게 해주십시오. 세속의 소리로 인해 하나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본말전도의 주인공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세미한 음성’을 놓치지 않는 지혜에 집중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목회 현장은 전쟁터입니다.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장소입니다. 교우들의 현장이 그렇고, 목사의 현장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빡빡한 인생길에 신앙의 길을 택한 자들을 위로해 주십시오. 오늘은 주님의 위로가 담긴 세미한 음성이 듣고 싶습니다. 이 음성이. I want to be with you forev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