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에서 사역을 할 때 모 언론사에 칼럼을 연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조건은 기고 내용을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싣는다는 전제였습니다. 기고자가 전심하여 기록한 내용을 칼질 당하면서까지 글을 공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언론사에서는 제 의견을 존중해 주어 약 1년 동안 제 글들을 독자들과 함께 진솔하게 공유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번 주부터 크리스천 연합 신문에 제 글을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기고 내용은 ‘가시 떨기나무 아래에서’ 라는 코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던 시내 산 가시떨기 나무 아래와 같은 저의 목회 현장은 언제나 저에게는 목사로서 소명을 재확인하는 긴장감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는 가장 깊은 은혜의 샘이 흐르는 장소라는 특징이 있기에 글 게재 코너 제목으로 그렇게 정하기로 했습니다. 글 내용은 우리 교회 교우들과 함께 2011년 7월부터 2014년 12월까지 살펴보았던 사사기 강해의 내용을 시대적 상황에 맞게 다시 정리하여 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성서해석으로 접근할까 합니다. 물론 기고자의 신학적 성찰과 민감한 담론에 대한 석의적 해석을 최선을 다해 써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일이 잘 진행이 되면 묶어 책을 출간할 의지로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역은 저에게는 또 다른 중요한 공부요, 발전이요, 사유의 장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했던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이라는 표제를 굳이 동원하지 않더라도 현장 목회자가 주어진 성경 본문 텍스트를 오늘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가장 부합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콘텍스트에 적용하는 일은 매력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그 만큼 피를 말리는 또 다른 투쟁임을 알기에 긴장하며 나아가려 합니다. 작고한 진보적 지식인이자 언론인이었던 리영희 선생은 ‘전환 시대의 논리’에서 이렇게 갈파한 것을 보고 밑줄 쳐 놓고 촌철살인 목록에 등재해 두었습니다. “언론의 두 얼굴 중 하나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와 또 하나는 ‘이제는 비밀을 말할 수 있다.’라는 유형이다.” 선생은 이 두 가지 경우 모두가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말도, 발표도 하지 못한 언론이 상황이 말할 수 있는 때가 되자 비로소 자기의 말을 하는 아주 비겁한 경우라고 비판했습니다. 듣고 보니 그의 의견은 경청할 필요가 있는 교훈이었습니다. 글과 말은 해야 할 때 함으로서 가장 빛나는 것임을 저 또한 인정합니다. 바로 이것이 정론의 가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크리스천 연합 신문이 보수적 계통의 크리스천 언론이지만 편집 기자와 이야기하면서 글을 그대로 올린다는 것을 전제하여 허락한 바, 교단과 관계없는 저이기에 조금은 자유롭다는 장점으로 아픈 이야기도 모자이크하지 않고 그대로, 아름다운 이야기도 각색하지 않고 그대로 민낯의 얼굴을 드러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인격적인 성령께서 도우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오늘따라 새벽에 강해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서 예언자 아모스의 말씀이 그래서 그런지 더 크게 보입니다.
“오직 정의(쩨다카)를 물 같이, 공의(미슈파트)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