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17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3:6-14 제목: 우기지 말자 서론) 언젠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데 중년 남자 두 사람이 치열하게 핏대를 올려가며 논쟁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갖고 싸웠는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 애국가 2절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소절을 읽어드립니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한 남자가 말합니다. “남산 위에 어떤 소나무는 진짜로 철갑을 두르고 있는 소나무가 있다.” 그러자 친구로 보이는 옆에 있는 남자가 혀를 차며 말합니다. “그건 그만큼 남산에 있는 소나무가 튼실하게 자라났다는 상징이지 진짜로 그런 게 아니다.” 이 두 사람의 논쟁 중에 누가 정답인지는 초등학생도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결과는 전자의 사람이 이기는 분위기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집요하게 우기는지 옆에서 보는 제가 질릴 정도였으니 두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우기는 친구에게 두 손, 두 발 다 든 사람이 나중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내가 졌다.” 언젠가 연합회 모임을 갖는데 한 회원이 대형교회 세습의 문제를 갖고 침을 튀겨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의 교회의 일을 왜 배 나라 감 나라 하느냐” 고. 그 분의 열변을 듣다가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대화 불능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고집을 관철하기 위해 논리를 무시하고 우기는 사람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기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⓵ 아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⓶ 심각한 열등감 속에 자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지성인과 상식적인 사람들이 갖는 공통의 분모는 보편적인 논리에 공감하여 그 의견을 수용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이고 사회학적인 영역에서의 해석입니다. 오늘 제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일반적인 해석보다도 조금은 더 심각한 영역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해석입니다. 종교적으로 뭉쳐 있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배워왔고, 따랐던 신념에 위축되는 그 무언가를 만났을 때, 결코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폐쇄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심각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연구하게 될 내용이 바로 이 점을 지적합니다. 본론) 본문은 갈라디아서에서 본체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대단히 중요한 단락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의롭다하심을 받는 구원 받음의 조건이 믿음이었다는 2주 전에 설교와 맞물려 또 하나, 성령의 일하심과 임하심이라는 임재의 조건 역시 행위나 율법이 아닌 믿음이었음을 심도 있게 살폈습니다. 이렇게 선언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바울 사도였음도 나누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선언한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언일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바울 스스로가 유대인이었고, 히브리 사람 중에 히브리 사람이었고, 율법의 뼈대 있는 학파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율법이 아닌 믿음이 구원 받음과 성령 받음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천명한 것은 본인이 갖고 있었던 기득권과 차지할 수 있었던 헤게모니를 포기하는 것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위험한 자충수를 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왜 이런 위험한 자충수를 두었을까? 바울은 자칫 잘못하면 본인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권력이라는 유혹을 완전히 상실할 수 있는 그 미끼를 덥석 잡지 않고 미련 없이 주저하지 않고 왜 믿음을 강조했을까? 그것은 바울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일하심과 임하심으로 인해 아주 세밀하게 느끼는 신앙의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무리수를 두는 일이 아니었고, 믿습니다! 를 세게 외치는 종교적 쇼맨십에 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선언한 것은 선명하게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대단히 인격적이고, 지성적이며, 이론적이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바울은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믿음 제일주의라는 종교적 밀어붙임이라는 수단으로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눈 감게 하고, 귀를 멀게 하고, 무조건적으로 믿게 하는 최면 걸기와 같은 그런 값싼 방법이 아니라 적어도 대단히 성서적이고, 이론적이고 역사적인 내용을 가지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며 해석했다는 점에서 본문의 감동이 있습니다. 본문 6절을 읽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오늘 본문 해석을 위한 바로미터의 역할을 하는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신분과 선민공동체의 뿌리를 두 사람에게 둡니다. 한 명이 바로 아브라함이요, 또 한 명이 다윗입니다. 후자의 사람인 다윗에 대한 해석은 여타설교를 통해 상당히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윗공동체라고 말할 때 적어도 두 가지를 전제합니다. ⓵ 언약 공동체로서 선민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⓶ 절대로 이스라엘은 패하지 않는다는 시오니즘이라는 민족주의입니다. 이 두 가지의 이유 때문에서 그래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남북 이스라엘이 바벨론과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반드시 우리는 회복될 것이라는 대단한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설명은 이 정도로 약하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포인트는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뿌리는 족장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그러므로 유대인이었고, 여타 다른 민족은 철저하게 배제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고집하는 계보는 혈통적인 계보입니다. 그래서 혈통적인 계보에 들지 않는 여타 다른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탈락되어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믿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혈통이요,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 즉 율법을 부여 받은 유일한 민족이 본인들이라는 종교적인 원류 의식만이 중요했습니다. 이방인은 누구입니까? 율법을 부여 받지 못한 버려진 족속에 지나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래서 언감생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6절은 그 시작부터가 의미심장합니다. 다시 6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아마도 유대인들에게는 폭탄과도 같은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믿음 때문이었다는 선언은 경천벽지 할 만한 충격적인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의 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와도 같은 명제를 바울이 뒤집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믿음 때문이라는 전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선민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직격탄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무슨 말입니까?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갖고 있는 자가 그의 후손이라는 파격을 의미하는 것이 7절입니다. 이것에 대한 선언이 비논리적이었습니까? 만에 하나 그렇다면 설교 제목처럼 우기는 것이 됩니다. 헌데 바울의 이 선언은 결코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성서적이며, 논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예를 들겠습니다. 본문 8절로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쐐기입니다. 반론할 수 없는 너무나 선명한 이론이자 논리입니다. 조금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민족의 뿌리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창세기 12:3절에 나오는 복을 유대인들이 자연스럽게 태생적으로 받는 복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 됩니다. 창세기 12:3절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렇게 엄청난 복은 유대인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복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 복의 통로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당연히 그 복을 받을 것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특권 의식으로 유대인들은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 유대인들에게는 결정적인 유대적인 자존감인 이 명제를 보기 좋게 전복시켜놓았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적어도 저에게는 9절의 이 말씀이 대단히 위력적인 말씀으로 접목됩니다. ‘아브라함과 함께’라는 이 대목입니다. 창세기 12:3절은 풀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만’ 얻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본문 9절은 전혀 다른 바울의 해석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방식으로’ 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9절은 반드시 한 가지를 전제하는 것임을 천명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이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더라도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믿음이 없이는 구원 받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성경적 내증 중에 가장 결정적인 뒷받침을 해 주는 내용을 소개하고 오늘의 언어로 설교의 교훈을 적용하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읽겠습니다. 로마서 4:9-13절입니다.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바울이 로마서에서 전한 이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시점을 설명합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이 할례 전인가? 할례 후인가? 에 대한 신학적 접근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가 할례를 받기 이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고. ‘무할례시니라’ 그렇다면 이런 논증이 가능해 집니다. 할례를 받은 이후에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율법주의 그리고 할례 이후의 구원이라는 논리가 설득력을 더하게 됩니다. 허나 실상은 그 반대였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시점을 ‘무할례시니라’라고 말함으로 할례 무용론을 적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들의 억지와 우김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자는 누구든지 즉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명쾌한 보편적 구원론을 설파한 것입니다. 이 분명한 성서적, 이론적인 근거를 토대로 바울은 본문 11-14절에서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렇다면 이상에서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통해 오늘 사순절 두 번째 주일에 우리들이 받아야 하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 구원의 단서가 조건이라고 우기는 무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경에 분명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음에도 왜 많은 사람들이 믿음 그 외의 것을 조건으로 답니까? 그것은 종교적인 님비 때문입니다. 님비(NIMBY)가 무엇입니까? 기득권 강화입니다. 내 땅에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내 땅에 들어오려면 무언가를 지불하라는 폭력을 가하는 것이 님비입니다. 그 무언가가 조건입니다. 그 무언가가 권위를 차지하는 비용입니다. 그 무언가가 주류 안에 들어오는 데 지불해야 하는 최소한의 대가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한 할례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특권 즉 시오니즘과 다윗왕조의 권위를 그렇게 쉽게 내 줄 수 있겠느냐는 압박이었습니다. 주군이신 예수께서는 정말로 값없이 당신의 몸을 주셨건만 그를 먼저 따랐던 기득권주의자들은 주님의 몸값을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탈을 주저 없이 저지른 것이 할례주의자들의 죄악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신자가 되려면 세습에 동의하라는 것이 할례를 받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습을 인정하는 교회입니다. 동의하시고 교회에 들어오십시오.” “우리 교회는 동성애자들을 절대로 발을 디뎌서는 안 되는 교회입니다. 도장 찍고 교회에 들어오십시오.” “우리 교회는 자유 한국당 지지자들만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더불어 민주당 지지자만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하면 사인하십시오.” 친구 교수가 모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 선교회의 지도위원으로 있을 때 서울의 한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양심수가 있었는데 설교 중에 그 양심수가 조계사에 들어가 피신을 했습니다. 이 일을 소개하며 이제 교회가 얼마나 대중들의 외면을 받으면 옛날에는 교회에 들어와 구원을 요청하던 일들이 불교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하며 교회가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자고 설교를 한 것입니다. 설교 이후, 친구는 그 선교회의 지도부에 있는 임원단에게 엄청난 후폭풍을 맞았다는 후문을 들었습니다. “교수님, 그런 설교를 하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런 설교를 빨갱이들이나 하는 설교입니다. 다시는 그런 설교를 하지 마십시오.” 일전에 설교를 했던 것처럼 교회는 ‘누구의 교회’가 아니라 ‘누구나의 교회’이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롭다함은 아브라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하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려면 이것에 도장 찍어야 합니다. 저것에 도장 찍어야 한다고 우기면 어찌 그것이 교회일 수 있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남겨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그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을 멸망하지 않게 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받아들이는 믿음 외에 무슨 조건이 더 필요합니까? 더군다나 그 믿음조차도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조건이 구원을 받는데 그리 많습니까? 우기지 맙시다. 궁색하면 우기게 됩니다. 뭔가를 추접하게 요구하게 되면 우기게 됩니다. 구원은 은혜이지 조건이 아닙니다. 이름난 대면 다 알 정도의 근본주의자인 한 목회자가 이전에 했던 말이 소름끼치며 다가왔던 악몽이 있습니다. “이명박에게 투표하지 않는 자들은 내가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워버릴 것이다.” 만에 하나 구원의 조건이 어느 대통령에게 투표를 하는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구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 신은 나보다 훨씬 더 못한 존재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천박한 생각을 갖고 있는 자도 이렇게 가볍거나 무지하지는 않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국립 수목원장을 역임한 나무 박사, 신준환 박사는 ‘다시 나무를 보다.’에서 인디언 격언을 하나 소개합니다. “늪을 건널 때는 가장 멀리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p,73) 근래 현대인들에게 임한 치명적인 적은 원칙론이 아닌 방법론에 빠지게 하는 유혹들이 많아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보다는 수단에 더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정말로 경계해야 할입니다. 주님은 조건이 아니라 은혜를 주셨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님이 주심 은혜를 보는 사람들이지 교회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조건을 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은혜라고 하셨으면 은혜입니다. 얄팍한 지식으로 우기지 마십시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김기석 목사가 ‘거둠의 기도’에 드린 기도를 같이 드리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셈법을 따라 살지 못하고, 악마가 우리들에게 속삭이는 셈법에 따라 사는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이제부터 정말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의 셈법을 따르는 새 사람들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우리 자신을 선물로 내어 주며 사는 참 사람들이 되게 도와주소서. 아멘”(p,62) 하나님의 셈법을 인간의 셈법으로 우기지 않는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똑바로 보고싶어요 주님. 온전한 몸짓으로 똑바로 보고싶어요 주님. 곁눈질하기 싫어요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은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하며 외면을 하네요. 주님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주님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 이 생명도 달라시며 십자가에 묶였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씻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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