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은혜는 시제를 초월합니다.2024-02-26 16:06
작성자 Level 10

2018년 3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16번째 강해)

 

본문갈라디아서 3:1-5

제목은혜는 시제를 초월합니다.

 

서론)

 

글을 하나 소개하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두 경험을 구별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 시공간적인 거리이지결코 공간을 초월한 시간이나 시간을 뛰어넘은 거리는 아닐 것이다특정한 장소에서 산다는 것은 특정한 시간을 선택한다는 뜻이다모든 구체적인 경험은 그 특정한 시간 속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가토 슈이치, “양의 노래”, P,433)

일본의 대표적인 참여 지식인으로 의사이자 작가였던 가토 슈이치가 그의 대표적인 자전적인 글인 양의 노래에서 표현한 글입니다.

이 글을 메모해 둔 이유는 그의 의견 개진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작가는 전후 형편없었던 조국인 일본의 패망을 눈으로 지켜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의 지성적인 인물이었기에 제국주의적인 망령을 휩쓸고 있는 일본의 멸망을 당연한 일이라고 수용할 정도로 깨어 있었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의 통찰처럼 일본은 패망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조국의 멸망을 예언한 자이기는 하지만 조국의 멸망을 목격한 자로서 대단히 충격적이고 아픈 기억으로 그 사건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해서 그는 일본에서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당시에 그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유럽과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공부를 한 뒤에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과는 전혀 서구의 다른 제도와 의식과 문화에서 살았던 어떻게 보면 행운아였습니다.

전혀 제국적이지 않은 민주적인 공간이었던 유럽과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저자는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지식인으로서 올바른 사유와 정직한 성찰을 하면서 일본에 있었으면 절대로 경험하지 못할 지성의 틀을 세워가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가토 슈이치는 이런 두 문화적인 공간과 영역에서 살았던 자였기에 시공간의 의미를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책에서 설명하고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사고는 본인이 경험했던 시간과 공간에서 철저히 느꼈던 일체의 일들만을 믿고 또 그 영역과 눈으로 확인 된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철저히 과학적이고 무신론적인 시공간의 이해를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천명한 셈입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 우리 교우들에게 한 가지의 화두를 던지고자 합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우리들이 믿어야 하는 것은 시공간에 제한 속에서 확인되는 것 만일까요?

가토 슈이치가 말한 대로 인간은 제한적인 시공간의 지배를 받으며 그 안에서 이루어진 것만을 믿어야 하며동시에 제한받는 시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소위 말하는 팩트일까요?

저는 가토 슈이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연히 지난 주 SNS에서 참 은혜로운 간증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MUSTARD-TREE(세계 젊은이들을 세워 열악한 나라에 있는 또 다른 젊은이들을 세워가는 NGO 비영리 단체창업주인 최영환 대표의 메시지였습니다.

한동대학교 언론정보문학부를 졸업하고 학사장교로 DMZ에서 군 생활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곳은 민간인 출입 금지 지역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었습니다.

민간인 출입 금지 지역이었기에 그곳에는 교회가 세워질 수 없는 곳이었고 당연히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던 그는 군 생활 하는 크리스천 병사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수가 없는 상태를 안타깝게 여기고 최 대표는 교회를 세워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는 어느 날본인이 근무하는 부대의 사단장의 출입 허가증을 받은 한 민간인이 근무하는 지역을 방문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온 이유가 교회를 짓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총지종을 물어보니 건축업자인 이 성도가 섬기는 교회의 권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회원들이 기도 중에 자꾸만 교회를 하나 세우라는 영적 부담감을 하나님이 주셔서 그들이 회의를 한 끝에 건축하는 일을 하는 본인에게 요청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이 교회를 건축할 장소를 알아보던 중에 최대표가 근무하고 있는 부대의 사단장 장로님과 우연히 연결되었고그 즉시로 사단장 장로님은 최대표가 근무하고 있는 지역에 교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교회를 세워달라고 부탁하게 되었고 드디어 단 한 번도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던 그곳에 교회 건축이란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흔히 갖게 되는 선입관이 생깁니다.

오늘 목사가 기도 응답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는 선입관을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을 일하게 하시는 도구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최대표의 간증을 대신 전하는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 시공간 안에서 특정되어진 일들이라고 말한 가토 슈이치의 말을 반론하기 위함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경험하는 일체의 일들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다고 믿는 것은 과학주의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철저한 인본주의적인, 합리주의적인 실용주의는 보이는 것을 믿으라고 종용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폐쇄성은 그 보다 더 넓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18절에서 대단힌 감동적인 메시지를 남깁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하루살이가  내일이라는 그 위대한 날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매미가 내년 여름이라는 그 무한한 잠재성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무신론적인 망령들은 너무나도 잠깐인 것에 천착하게 하여 결코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그 영원한 것을 미디 못하게 합니다.

신앙인들은 무신론적인 논리를 뛰어넘는 자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기저는 시공간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시간을 통제하시고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전 존재를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하는 또 다른 필드는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영적인 논리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 바로 이 영적인 논리를 펼쳐나가고자 합니다.

 

본론)

 

본문 1절을 읽어보십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더불어 이어지는 3절을 연이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 두 절에서 바울이 연속하여 사용한 단어가 바로 아노에토스’ 즉 어리석다.’ 는 단어였습니다.

이 단어는 다른 의미로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이 보기에는 지금 할례를 받는다고 선언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엉뚱한 일임을 개탄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원래 오늘 우리가 살펴야 할 본문은 14절까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1-14절을 살피다보면 두 가지의 테마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5절까지 에서는 성령의 일하신 기초에 대한 담론이고, 6-1절까지는 아브라함이 받았던 의()에 대한 담론이기 때문입니다.

주일 낮 예배의 시간적인 제약으로 오늘은 바울이 제시한 담론의 첫 번째 내용을 나누기 위해서 5절까지의 내용만을 다루려고 합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겠다고 선언한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너무나 속이 상하고 안타깝고 또 한편으로는 분노스러워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혹은 이해하지 못할 짓을 하는 자들’ 이라고.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번역에서 바울의 감정적인 안타까움을 조금 자극적으로 토해 냈습니다.

정신 나간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왜 이토록 바울은 굵은 감정의 선을 내세우면서까지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을 비토 했습니까?

2-5절 본문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역설하며 반문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이 어떤 이유 때문이겠는가?
2절에서 분명히 밝힙니다.

너희들이 성령을 받을 만한 무슨 예쁜 행위를 행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너희들이 갖고 있는 믿음 때문이었는가?

바울의 역정이 얼마나 컸으면 바울은 이 2절의 질문에 대한 강조를 5절에서 다시 재론합니다.

성령의 임하심고 그 분의 능력행하심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율법의 행위 때문인가들을 때 생긴 믿음 때문인가?

2,5절에서 연이어 질문한 바울의 답은 말할 것도 없이 후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 대목에서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 성령의 임하심과 일하심은 철저하게 믿음을 고백한 자에게 나타나는 은혜라는 교훈입니다.

 

저는 아주 가끔 이런 표현을 많이 쓰곤 합니다.

성도들에게 다가오시는 성령의 임재하심은 철저하게 전인격적이라는 용어를.

우리 교우들이 다시 한 번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입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20세기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아이든 토저가 쓴 이것이 성령님이다.’를 보면 저를 감동하게 해 준 촌철살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열심을 성령님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흔히 열심과 흥분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그러나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법석을 떠는 그곳에 성령님이 계실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라나의 경험에 따르면 우리가 열심이라고 칭하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은 곳에서도 그분이 임재 하셨다그렇다면 그 분은 어떤 분인가그 분은 인격체이시다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그 분은 다른 존재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인격체이시다따라서 그 분은 인격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성품과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다.” (pp,144-145)

아이든 토저의 말을 제가 수용한 것은 그가 대가(大家)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갈파가 대단히 성서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인격체이신 성령 하나님의 임하심을 성서적인 내증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사마리아 지역을 순회하고 예루살렘 교회에 돌아와 순회 보고를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압권은 말할 것도 없이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거할 때 일어났던 환상과 그 와중에 받은 가이사랴에 살고 있었던 이방인 고넬료 식솔들의 방문과 그로 인하여 가이사랴에 가서 행했던 고넬료 가정에 대한 간증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자 담임목회자였던 야고보에게 상세하게 그 내용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정말로 의미 있는 간증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15-16절을 읽어드립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베드로는 이미 영적으로 준비된 가이사랴에 거주하고 있었던 고넬료의 집으로 동선을 옮기고 그의 집으로 심방을 가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전한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소개하고 있지 않아 정확하게 그 내용을 전달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그가 이제까지 해 온 사역을 근거한다면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캐리그마였을 것이며동시에 복음의 엑기스였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대목입니다.

캐리그마와 복음의 진수를 고넬료의 가정에 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⓵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점.(15)

⓶ 말씀을 전할 때 성령 세례에 대한 복음이 생각났다는 점.(16)

우리는 지난주에 이런 은혜는 나누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6)

기억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갖고 있었던 고넬료의 식솔들과 그 믿음을 전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은혜가 무엇이었습니까?

성령의 임하심과 일하심이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났다는 은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인격적으로 일하시는 성령님은 믿음을 갖고 있었던 베드로고넬료에게 임하셨습니다.

산상 부흥회에 참석하여 핏대를 세워가면서 주여삼창하는 자리에, 떼창’ 하는 자리에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씀을 전하고 듣는 자들에게 임하셨던 것입니다.

상납금을 바치듯이 거액의 헌금을 사도들에게 내놓고 그 성령을 나에게 팔라고 요구했던 시몬의 그런 싸구려 매매로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내가 하나님을 만들었습니다적어도 이 엄청난 금덩어리(헌금물질)들을 모아서 하나님께 드렸으니 이제는 내가 하는 대로 그대로 순종만하시면 된다고 압박할 때 임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말씀을 말씀으로 듣고말씀으로 전하는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믿음으로 역사하시는 전인격적인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이 믿음을 기초로 강력하게 선포한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인 갈라디아 교회의 초창기 성도들에게 전인격적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임하신 성령의 일하심으로 인해 아름다운 갈라디아 교회를 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리석게도 이렇게 성령 하나님이 일하시는 은혜의 통로였던 믿음에서 떠나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겠다고 퇴보한 것입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신앙적인 퇴보를 보고받은 바울은 이렇게 강력하게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질타한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번역으로 바울의 강력했던 성토인 다시 1절을 온전히 읽어 보겠습니다.

정신 나간 갈라디아 사람들이여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여러분은 분별력을 잃었습니까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삶의 중심에 놓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니여러분은 제 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그 분의 모습이 여러분에게 선할 텐데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분명한 바울의 경고가 보입니다.

믿음에서 떠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떠나는 이유는 중심에 예수를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으로 시작했던 갈라디아 교회가 이제는 썩어질 육체로 다시 마치는 비극을 선택했다고 경종한 것입니다.

본문 3절의 메시지를 다시 복기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구원 그 이후 반 소그룹 텍스트에서 달라드 윌라드 목사가 이렇게 통찰했던 것을 지체들과 공부했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언제나 이것을 보아 알 수 있으니곧 성령은 우리를 예수께서 되실 법한 모습과 하실 법한 행동으로 이끄신다는 점이다.” (달라스 윌라드, “잊혀진 제자도”,p,55)

예수께서 되실 법한 모습과 하실 법한 행동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입니다.

하실 법한 행동은 무엇일까요?

여전히 그리스도가 되심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예수님의 주님 되심이라는 권위가 지속되도록 역사하는 영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하심과 일하심에 대하여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저 역시 강조하고 싶은 은혜가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율법이 아닌 믿음이라는 점 말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우리는 복음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옛 구습인 율법의 굴레로 퇴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이 교훈을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갈라디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을 향하여 왜 할례라는 율법으로 돌아가려 하느냐고 강하게 질타한 바울의 음성이 주후 1세기에 존재했던 갈라디아 지역에 살고 있었던 교회공동체에게만 쏟아 붓는 메시지로만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 음성이 2,00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넘어 오늘 우리 세인공동체에 속해 있는 지체들을 향하여 역설하는 메시지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어디 이 뿐입니까?

갈라디아 지역이라는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대한민국의 제천이라는 로컬 처치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선포되는 레마로 오늘 본문의 가르침이 저에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기가 막힌 은혜를 근거로 저는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모든 구체적인 경험은 그 특정한 시간 속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다.”고 말한 가토 슈이치의 일설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일하심으로 해석할 때 얼마나 무색한 발언인가를 다시 한 번 각인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도 인정한다면 우리는 오늘 설교의 교훈을 이렇게 가슴에 담아내야 합니다.

 

※ 성령의 임하심과 일하심이라는 은혜가 시제를 초월하여 오늘도 믿음을 갖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연속성을 갖는다는 교훈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셨던 구원의 그 계획하심은 갈라디아 교회에서처럼 오늘 우리 세인교회에서도 연속됨을 명심하십시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구원의 그 성취하심은 갈라디아교회에서만이 아닌 오늘 우리 세인 교회의 삶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연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은혜임을 상기하십시다.

성령님께서 과거에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하심으로 완성하셨던 구원의 그 완성은 오늘 현재에서 여전히 세인교회에서도 현재 진행형임을 되새기십시다.

이렇게 성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과 임하심은 과거에도 있었던 사건이며오늘도 있는 사건이며내일도 있을 사건임을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며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은혜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라는 평론집에서 이런 글을 하나 남겨놓았습니다.

히말라야 설산에 오른 작가가 이렇게 읊조립니다.

자신의 내면의 깊은 심연만이 아니라 그처럼 높은 설산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사람들은 너무 오래 동안 잊고 지낸 것은 아닐까?”(p,346)

무슨 말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 대한 자탄의 메시지가 아닙니까?

이것이 어찌 작가 한 사람의 탄식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오늘우리는 은혜를 일회적인 사건으로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한 번 주어졌던 은혜라고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그 은혜의 주어짐을 잊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의 망각은 곧 본질의 망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로다

나의 몸과 마음 주를 갈망하며

이제 내가 주께 고백하는 말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생명의 피난처시니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여호와를 찬양하리

내 평생에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으로 내 손 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