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흔들리지 말자2024-02-26 16:05
작성자 Level 10

2018년 2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11번째 강해)

 

본문갈라디아서 2:6-10

제목흔들리지 말자.

 

서론)

 

지난 주간에 톰 라이트 교수의 최신작인 광장에 선 하나님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차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을 드렸지만 영국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의 신약학을 강의하고 있는 톰 라이트는 이제는 거의 실신 직전인 영국 성공회의 사제로이기도 하기 때문에 영국에 몰아닥친 세속화의 거친 파도와 맞서 싸우며 분투하고 있는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사역자입니다.

그는 광장에 선 하나님’ 에서 본인이 옥스퍼드에서 교수 생활을 할 때 경험했던 삽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적어도 그는 책에서 소개하는 이 젊은이 때문에 너무 행복했음을 보고합니다.

신학을 전공하던 어느 명민한 학부생이 마지막에서 두 번째 긴 방학을 잠비아에서 보내며 현지 교회들을 도왔다그는 그 교회들이 지역 사회뿐만 아니라 더 넓은 반경에서 성취하고 있는 일 때문에 감격하며 귀국했다우리가 제 3세계라고 부르는 곳에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 주는 도구들을 제공하는 신학에 대한 생각으로 큰 환희를 느꼈다그는 훈련된 신학자로 돌아가서 개발 사역에 헌신할 각오를 품고 있었다내가 가르치던 단과대학의 학장은 마침 노동당 소속 총리에게 경제 자문을 하던 사람인데다음 학기말에 그가 이 젊은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네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젊은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 3세계에서 개발 사역자가 될 겁니다.’

학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경제학 책을 읽지 않는 건가?’

학장이 이렇게 묻자 학생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신학이 훨씬 더 관련성이 높으니까요?’

이렇게 학생의 일화를 소개한 톰 라이트 교수는 이 글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학생 말이 맞다경제학자에게는 아무런 답이 없다경제는 자동차 엔진과 같다엔진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엔진을 청소하고 고칠 수 있는지는 말해 줄 수 있다그러나 그들은 차를 몰고 어디로 가야할 지를 말해 줄 수는 없다.” (pp,45-46)

저 역시 이 글을 읽다가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왜요?

똑바른 성서적인 기초와 바른 신학에 서 있는 하나님의 한 사람은 적어도 기고만장한 교만한 세상을 향하여 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음을 이 예화를 통해 엿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필요한 그리스도인이 누구일까요?

차를 몰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고급 차들이 즐비하게 많이 탄생되는 이 시대정작 그 차가 쓰이는 용도가 쾌락과 방탕의 쳇바퀴로 굴러가는 영역이라면 그 차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차가 어디로 가야하는지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는 곳이 세속의 영역에 단 한 곳이라도 존재합니까?

너무나 비관적인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천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른 교회요바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가 보수적인 사상을 가졌든지아니면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로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가에 부합하고 있느냐입니다.

그런 사람 한 명만 있으면 적어도 작금의 교회와 성도가 당하는 이모저모의 수모들을 역전시킬 수 있다고 종은 확신합니다.

우격다짐이 아니라 본문의 주인공인 바울을 보면서 더 확신하게 됩니다.

 

본론)

 

바울은 예루살렘을 첫 번째 방문 이후, 14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음을 우리는 지난 번 강해를 통해 살폈습니다.

학자들 간의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저는 대체적인 복음주의 권에 학자들이 동의하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제 1차 예루살렘 공의회를 갈라디아서 2:1절이 증언하는 방문으로 본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할례 논쟁에 대한 끝장토론이었고유대인들을 위한 교회인 예루살렘 초대 교회와 이방인들을 위한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 교회와의 알력을 끝장내기 위해서였음도 교우들과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이 두 번째 방문에 관한 후속담을 소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 6절과 9절을 나누어서 봅니다.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6)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9)

6절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울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본인이 예루살렘에 방문한 이유는 유력한 자들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유력한 자는 아마도 9절에 언급한 베드로 그리고 야고보요한 등일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좌장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요즈음 말로 바꾸면 살아 있는 권력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앞에서 살폈던 갈라디아서 1:17절을 근거로 되짚어보면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본문 9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를 적용한다면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기둥같이 여기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본문 6절에서 무엇이라고 날이 선 발언을 했습니까?

그들은 내게 상관이 없는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이들이 어떤 종교적인 권력과 물리력을 빙자하여 나에게 그 무언가(사도직 인준)를 요구한 적이 없음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쐐기를 박는 바울의 발언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렇게 강성 발언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요?

본문 2장의 시대적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열린 제 1차 종교회의의 시기인 주후 49년 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때는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적지 않은 위기가 임했던 시기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에게 모세의 법으로 정해져 있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거짓 복음으로 유린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5:1절을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그런데 이 일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있어서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요?

불과 몇 년 전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 해괴한 일을 본인들이 제 1차 전도여행 때 세웠던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교회를 무너뜨렸던 이 기막힌 거짓복음의 위력이 다시 불과 몇 년 만에 수리아 안디옥으로 확산된 충격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복음주의권의 학자들은 갈라디아 교회가 세워진 제 1차 전도여행의 시기를 주후 48-49년 즈음으로 산정합니다.

더불어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는 그 후인 주후 53-55년 사이로 학자들은 갈무리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본문을 쓸 때는 이 두 사건 즉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와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밀어닥친 위기를 다 경험한 이후였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정말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짓복음으로 인한 교회가 와해되었던 이 두 사건을 맞아 어떻게 분투하며 교회를 지켰는지에 대하여 훗날 기록한 갈라디아서에서 단호하게 바울은 그 간증을 기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해석을 전제로 다시 본문에 집중해 보십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신의 사도의 권리를 인정해 달라고 예루살렘 교회의 기득권과 종교적인 권력을 이미 확보한 사도들에게 굽신 거리지 않았음을 본문에서 밝힙니다.

도리어 지난 주일에 2절에서 살폈던 것처럼 복음을 희석시킨 자들에 관한 도의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수뇌부에게 서슬이 시퍼런 비수를 날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으로의 회귀였고다시 복음이었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방문 목적을 밝힌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역할 분담이었습니다.

본문 7-8절을 나누겠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기막힌 선명함이 보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위기에 즈음하여 역할을 분명히 하셨던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바울의 역할은 무할례자들을 위한 사도 즉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의 직을 임명하신 것이었고베드로의 역할은 할례자들을 위한 사도 즉 유대인들을 위해 세운 사도로 세우셨음을 입장정리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이렇게 분명한 선을 그었을까요?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거짓 복음에 넘어간 한심한 자들을 향하여 본인의 사도직에 대한 정당성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인 9-10절을 읽습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이 구절에서는 왠지 모를 서늘함까지 느껴집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붕괴하고 있는 몇 몇 거짓 교사들을 알고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도 역할 분담의 사도직을 인정하며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고이방인들로 대변되는 바울의 사역 영역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줄 것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부탁을 할 정도로 사도직에 대한 진정성이 있는 인정을 해 주었건만 갈라디아 교회의 한심한 너희들이 해묵은 사도직을 갖고 논하는 거짓 교사들의 말에 넘어가 영적인 무너짐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매서운 질타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무너짐에 대하여 대단히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것도 거짓된 복음으로 무너지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가슴을 쳤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의 리더십마저도 흔들고 있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소위가 괘씸했습니다.

해서 바울은 교회의 위기를 바로 잡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거짓교사들의 권위의 근원이었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도 인정한 본인의 사도권을 다시 재확인함으로서 갈라디아교회를 추스르려고 본문에서 예루살렘 두 번째 방문기에 대한 추억을 밝힌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 해석을 전제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주후 1세기 중반 와해되고 있고 또 와해 될 수 있는 교회였던 갈라디아 교회였지만 그 교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른 복음을 무장한 사람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얻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 그리고 본문에는 이름이 빠져 있는 수많은 익명의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지체들 말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흔들리지 않는 복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교회가 흔들리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왜 흔들리고 있습니까?

사회가세속적인 문화가이질적이고 이단적인 사이비 종교들이 창궐하였기에 때문에 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창궐하고 우후죽순 자라나고 있습니까?

왜 세속적인 힘들이 교회를 유린하고 있습니까?

단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지만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봅니다.

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합니까?

목사가 타락해서 그리고 변질되어서 입니까?

장로권사안수집사가 직답지 못한 삶을 살아서 입니까?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는 곳에 예수쟁이들이 언제나 있어서 입니까?

부분적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외연을 확장해 보십시다.

저는 이렇게 진단하고 싶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복음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이 말은 목사 불리할 때 자주 등장시키는 결코 상투적인 멘트가 아닙니다.

조금 더 강하게 전합니다.

누가 복음을 상실하게 됩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자들이든지 둘아예 복음을 안 믿었던 자들이든지 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강력하게 질타한 것이 무엇입니까?

왜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 받지 않아야 하는지 헷갈려 하느냐는 질타였습니까?

아닙니다.

왜 내 사도직에 대하여 의심하느냐는 기분 나쁜 감정의 표출이었습니까?

그건 일차원적인 접근이요 대답입니다.

바울이 직격탄을 날린 것은 이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유일한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흔들렸느냐는 질타였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두 일을 경험했습니다.

한 사건은 일선에서 물러난 평생을 진보적인 분야에서 강의를 한 노 신학교수의 발언을 접한 것이었고또 다른 하나는 전직 목사였던 친구의 발언이었습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은퇴 교수는 한 포털 사이트에서 이렇게 본인의 소회를 밝혔습니다.

본인은 신학교수의 직을 물러나면서 기독교를 떠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기독교가 갖고 있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임을 밝혔습니다.

특별히 그는 예수의 대속사상에 대하여 반기를 들면서 교회를 떠나기로 했다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소개한 이 신학자는 담임목사가 신학생시절여타 다른 신학자들에 비해 상당히 토착화된 한국적인 신학을 말하고결핵환자들을 돌보는 시설을 만들고 그들을 현장에서 품는 등등 낮은 자들에게 집중하는 신학과 신앙의 일치를 보였기에 존경했던 분 중에 한 분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가 쓴 여러 교회사 관련 책들을 보면서 열광하기도 했던 분입니다.

그랬던 그였는데 그가 교회를 떠나기로 한 퇴임사에서 저는 정말로 그로기펀치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기독교의 교리를 인정할 수 없었다특히 대속론은 '역사의 예수'(맨 사람)와는 무관하다그리고 교회가 싫었다.”

그는 민중 신학자이자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학자였기에 기독교 교리에 대한 편협성이나 보수성에 대하여 싫증을 느꼈기에 얼마든지 이런 사상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거기까지는 저는 수용합니다.

그게 신학이니까요.

그런데 그 분의 퇴임사 중에 제가 아무리 양보를 해도 양보를 할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저지 말아야 하는 금기의 한계가 있습니다.

교회가 주장하는 대속의 은총이라는 교리가 아니라 예수께서 당신의 몸으로 이루신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을 부인하는 학자의 시도입니다.

이것은 결코 용인하거나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교회공동체나 진보적인 성향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선한 영향을 미친 학자라 해도 그가 교회가 만든 대속의 교리가 아닌 예수께서 이루신 대속의 은혜를 부인한다면 저는 그가 말했던 일체의 내용들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

성서는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시고 피를 흘려 돌아가셨다는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나의 주군이시라는 명제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 좋자고 만든 도그마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이요성경 전부의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만든 교리가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복음의 요체이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그가 정말로 그런 사고와 신학의 중심을 갖고 갈등을 했다면 신학교 교수로 있는 동안에는 회피하고 은퇴 이후에 말하는 비겁함은 저지르지 말았아야 했습니다.

복음을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복음은 저와 여러분의 목적이자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전직목사였던 친구가 지난 주 SNS에서 공개적으로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나는 금년 들어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그리고 앞으로도 안 나갈 예정이다들을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들을게 없다정말 그렇다의미 없이 습관처럼 다니는 게 싫다나는 나 자신이 중요하지 신이 중요하지 않다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다인간이 만들어 놓은 틀이라는 게 싫다.”

백번을 양보하여 나는 그 친구가 목사로 있을 때 제도권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와 상흔이 있는 목회자로 살았는지 잘 아는 동기 목사입니다.

그래서 제도권하면 진저리를 내는 친구였습니다.

결국 그 갈등으로 인해 목사의 직을 스스로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그 친구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조금 아프지만 이렇게 진단하고 싶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는 친구의 말을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난 예수 없이는 단 1분도 살 수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중요하지 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발언을 목사의 직을 내려놓고 한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만에 하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목사가 되지 말아야 했던 것이 더 정직합니다.

이렇게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믿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그러면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아닌 지금은 아닌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이전에 갖고 있었던 복음의 능력을 상실했든지아니면 맨 처음부터 아예 복음을 안 믿었든지 입니다.

복음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흔들리는 그 무언가의 요체가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과 복음의 실체는 어제나 오늘이라 동일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내가 타고 있는 차가 어떤 차인지를 분석하고 그 차가 고장이 나면 어디를 수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능력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은 내가 타고 있는 차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를 때 그 가야 하는 길과 방향성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갈라디아서 11번째 강해의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한 달여 즈음에 서울에서 친한 친구 목사들이 모였습니다.

교제를 하는 중에 제가 참 좋아하는 친구 목사가 이렇게 진지하게 화두를 꺼냈습니다.

내 목표는 은퇴 이후에 더 예수를 잘 믿는 거야목사직에서 물러나서 더 예수를 잘 믿는 것이 근래 내가 연습하고 훈련하는 거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정말로 가슴에 담아야 할 이야기를 친구 목사가 해 주어 너무 고마웠습니다.

복음의 사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더 엄하게 선포합니다.

흔들릴 수 없습니다.

바울은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충분히 무너질 수 있는 위기의 상황이었지만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

그는 복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는 로마서 1:16-17절에서 이렇게 천명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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