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3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8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1:13-17 제목: 플랜 A 서론) 욥기 23:10절을 읽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우리가 너무나 은혜롭게 받는 말씀입니다. 엘리바스의 세 번째 변론에 대하여 욥이 대차게 대들던 두 번의 경우와는 달리 세 번째 반론에는 공격적인 모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태도에 더 집중하여 나아가는 듯한 모양새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고백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이 아신다. 그런데 그 길을 순발력이 있게 빠르게 가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거치는 단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단련이라는 코스다.” 욥은 고백합니다. 언젠가 교우들에게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연단(鍊鍛)’이라는 한자에 담긴 의미를. ‘불릴 련(鍊)’은 같은 동작을 10,000번 연습하는 것을 말하는 무술단어이고, ‘쇠 불릴 단(鍛)’은 망치로 1,000번을 두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연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여야 하는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욥은 이것을 알았기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어마 무시한 그 연단의 과정을 통과한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이 순금 같이 제련된 믿음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몇 년 전에 읽었던 승려 혜민이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본인의 산문집에서 이렇게 표현한 글을 보고 동의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3대 재앙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다고 실망하지 말고 우리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나아가요.”(p,149) 너무 빨리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3대 재앙이라고 언급한 타종교 성직자의 말을 수용한다면 반대로 너무 많은 고난과 고통이 임한다고 해서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는 공식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리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이나 연단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그 속에 담겨 있는 진짜 의미를 파악해 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목회를 하는 동안 현장에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 배운 목양의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이 오셔야 끝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명제는 어떤 이에게는 위로의 메시지로, 또 어떤 이에게는 경종의 메시지로 다가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힘을 믿고 기고만장하며 승승장구한다는 생각을 가진 자에게 그 성공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 때 그 날에 그것이 사상누각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며, 반대로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것 같고,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은 자도 그것이 주 안에서 일이라면 그 날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선한 의도가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주목하고 민감하게 분별하려고 노력해야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 즉 플랜 A입니다. 저는 송년주일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부른 한 사람, 바울에게 갖고 계셨던 플랜 A가 얼마나 정교하며 철저했던 계획이었는가를 살피면서 그 계획은 단순히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 한 사람에게만 갖고 계셨던 플랜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갖고 계셨던 계획임을 살피면서 한 해의 주일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의 메시지를 바울이 강하게 역설한 이유의 배경에는 자신의 사도권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인 거짓 교사들은 물론 그들의 말에 현혹되어 바울을 의심하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쌍으로 겨냥한 작심발언이자 항변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내용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13-14절을 읽어봅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바울은 먼저 자신이 회심하기 이전의 상태를 술회합니다. 그는 제일 먼저 자신도 유대교인이었음을 밝힙니다. 이 과거 정체성에 대한 드러냄은 다분히 지금 갈라디아 교회를 유린하고 있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겨냥한 발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은 본인이 그냥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던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교회를 심히 박해한 이유는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기 때문이고, 조상의 전통들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그 전통을 파괴하는 자들에 대하여 분개했기 때문임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3-5절을 소개합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누가는 사도행전 9장과 22장 그리고 26장에서 바울이 회심했던 다메섹 간증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세 곳에서 공히 그의 출신 성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가말리엘이라는 당시 율법교사로 최고의 반열에 서 있었던 자의 수하에서 공부하던 철저한 바리새인임을 밝힙니다, 동시에 그는 그냥 유대교를 신봉하던 평범한 유대교인이 아니라 당시 유대교를 흔들고 있었던 신흥종교처럼 보였던 예수 공동체에 속해 있는 자들을 발본색원하여 척결하는 선봉에 섰던 자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의 종교적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교적인 열심을 갖고 있었던 자기가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는지를 본문에서 이어 간증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15-16절 전반절입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이 고백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아시는 분들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메섹 회심 사건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색출하고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할 수 있는 권리까지 부여받은 사울이 다메섹에 거의 이르렀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을 우리 독자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았음도 우리는 익히 사도행전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신학화하여 표현한 내용이 바로 조금 전에 읽어드린 15-16절 전반절의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바울을 그의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신 예정으로, 동시에 그를 사도로 부르신 소명의 근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택함과 동시에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예정하시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상이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의 주석입니다. 본문의 이해를 통해 우리는 오늘 아주 놀라운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재 강조하지만 바울이 강하게 역설하고 있는 오늘 본문의 배경은 사도권에 대한 변론의 성격이 크다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동의하면서 더 큰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서 오늘 설교의 은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 바울을 예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플랜 A는 오늘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플랜 A라는 교훈입니다. 이 교훈을 설명하겠습니다. 금년에 우리나라 들어다 놨다 했던 스포츠 행사를 들라면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 월드컵일 것입니다. 조별 에선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셨기에 축구팬들에게 감독으로 있었던 신태용 감독은 물론 선수들까지 몰매를 당하기도 했지만 조별 마지막 경기인 피파 랭킹 1위인 독일과의 경기에서 2:0 이라는 스코어로 믿기지 않는 승리를 함으로 여론의 뭇매를 덜 맞게 된 웃픈 이야기를 남긴 것이 러시아 월드컵이었습니다. 이때 스포츠 전문가들이나 앵커들의 입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고유명사와 같은 용어가 있었습니다. 플랜 A, 플랜 B라는 단어였습니다. 이 단어를 액면 그대로 설명하자면 플랜 A가 전형적인 대표 팀의 전술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플랜 B는 경기를 하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백업으로 만들어놓은 제 2의 전술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플랜 A와 플랜 B를 놓고 볼 때 플랜 B는 비상용이라는 성격이 강한 대안 전술인 반면, 플랜 A는 최고의 가치를 두는 대표 팀의 팀 컬러를 보여주는 제 1의 포맷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도식에 대하여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들고 훈련하고 정형화한 방법들은 완벽하지 않을뿐더러 상황이나 상대의 정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불합리한 전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플랜 B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관점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설명하면 오늘 설교의 제목과 본문 이해를 통해 주시는 영적인 감동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은혜입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는 플랜 B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은혜입니다. 오직 플랜 A만이 존재합니다.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플랜은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플랜 A만 존재하지 B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플랜 A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은혜로 당신과 나를 지명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문구로 표현했습니다. 15절 전반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이 구절에 등장하는 헬라어 ‘아포리조’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런 뜻입니다. 큰 운동장에 금을 그어 놓고 특별하게 한 쪽에 따로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표준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15절 전반절을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나를 모태로부터 따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SET OFF’ 즉 구별하여 따로 떼어 놓으신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동안 현장에서 예정론이라는 신학 사상에 대하여 논할 때면 저는 언제나 비판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적 틀로 해석할 때 예정론은 어떤 의미로 볼 때 상당히 이기적인 신학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을 인간의 측면이 아닌 캘빈의 원래 의도한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측면으로 해석할 때 너무나 큰 은혜요 감동의 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해서 저는 오늘 설교를 인간적인 면에서 해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큰 틀에서 해석한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외형적인 조건이나 삶의 조각조각을 들추어 내 볼 때 하나님으로부터 지명당할 그 무언가를 갖고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었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는 하등의 조건을 구비한 자가 아닙니다. 도리어 외형적 삶의 틀로 비추어 보면 믿음의 조상은 고사하고 믿음의 반열에서조차 탈락되기 십상인 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이 지명하신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까? 수백 번 강조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비교해 볼 때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으로 쓰이는 우리나라 말은 참 많습니다. 오십보백보입니다. 도찐개찐입니다. 초록이 동색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받게 된 것, 지명당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때문입니다. 왜 나를 지명하셨습니까? 나는 지명당하기 싫습니다. 나는 준비가 안 되었단 말입니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이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거대한 플랜 A안에서는 소용이 없는 발버둥입니다. 그렇습니다. 플랜 A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지명당한 것입니다. 이것을 일찍이 신탁으로 받았던 제 2 이사야는 이렇게 예고하였던 것입니다. 이사야 41:8-9절입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이것이 은혜로 다가오는 자는 플랜 A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2018년 한 해, 이 은혜의 도가니 안에 저와 여러분이 있었다는 것에 정녕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플랜 A의 두 번째 은혜는 부르신 뒤에 나와 함께 일하자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15절 후반절부터 16절 전반절을 봅니다.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은혜로 나를 부르셨기에 자신은 부름 받은 자라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천명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부름 받은 자에서 만족하지 않고 주께서 함께 일하자고 겹겹의 소명을 주셨다는 강력한 소명의식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내 사도권을 갖고 시시비비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사도권을 저울질함으로서 나를 난도질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인간적인 외형으로 자신을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AD 200년 즈음의 작품인 ‘바오로와 데클라 행전’이라는 외경을 인용한다면 바울의 용모는 정말로 추남 중에 추남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작은 체구, 대머리, 구부러진 다리, 매부리코와 맞붙은 눈썹의 소유자가 바울입니다. 위경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무엇을 내세울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습니까? 주군이 부르신 부름의 사람이라는 영적 자존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부르셔서 구원해 주셨고, 동시에 나에게 같이 일하자고 동역을 청하신 주님의 그 부르심을 확신한 자였기에 외모의 졸함도 그를 열등감이 있는 사람으로 몰 수 없었고,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고 거짓 교사들에게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영적 자존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적 내증이 있습니다. 로마서 8:30-34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은 나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대적하는 자가 있으면 이기게 하십니다. 나를 송사하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죄 없다고 변호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위해 계획하신 플랜 A입니다. 조준모 형제가 만든 복응성가 중에 ‘내가 너를 사랑함이라’ 는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를 들여다보면 말 그대로 백골난망의 은혜가 보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네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못 잊어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함이라 내가 너를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욕되게 하리요 아무도 너를 만질 수 없음은 내가 너를 사랑함이라 가만히 보면 저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교우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이 은혜에서 빗겨나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은 것도 기적이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도 또 다른 기적입니다. 부인하고 싶으십니까? 미안하지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이 만들어 쓰고 계시는 것은 은혜요 기적입니다. 왜? 이것이 하나님의 플랜 A에 있는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플랜 A를 이제 이해하셨습니까? 설교를 맺으면서 이런 기가 막힌 은혜를 받는 자가 저와 우리 교우들이라면 적어도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최소한의 영적인 삶을 한 가지 권면하고 설교를 끝마치려고 합니다. 본문 16절을 다시 봅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이 구절에서 저에게 다가온 감동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기뻐하셨을 때에’입니다. 주군이신 예수께서 언제 기뻐하셨습니까? 바울이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울의 입을 통해 증거 될 때 주님은 기뻐하셨다고 바울은 술회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부르시고 같이 일하자고 하신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울이 그렇게 살아냈을 때 주님은 기뻐하셨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플랜 A는 주님이 나를 위해 세우신 가장 완벽한 계획입니다. 혹시나 실패할까 하여 세운 플랜 B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세우신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같이 일하자고 청하신 주님의 그 뜻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렇게 응답하여 그 분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플랜 A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나 주님과 함께 상한 맘을 드리며 주님 앞에 나가리 나의 의로움이 되신 주 그 이름 예수 나의 길이 되신 이름 예수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