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7-대강절 네 번째 주일) 본문: 갈라디아서 1:11-12 제목: 출처를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론) 대강절 넷째 주일에 나오신 교우들을 강복합니다. 행복한 주일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제모교인 서울신학대학교를 졸업한 모 선배의 마태복음에 관한 강해 집을 오래 전에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그 선배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한 목사로 인정받는 분입니다. 당시 저는 마태복음을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연구하던 차라 참고할 겸 해서 마태복음과 연관한 여러 책들을 구입해 읽던 차라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고 있었습니다. 헌데 그 선배의 책을 읽다가 순간, 이게 뭐지! 라고 탄식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선배가 책에 문자화를 시켜 기록한 글들을 이미 다른 책에서 읽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선배가 기록한 글과 이미 다른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양쪽에 펴놓고 비교하면서 선배가 참 안쓰럽고 부끄러웠던 기억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약 2page 에 걸친 글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자기의 글로 둔갑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읽을 때만하더라도 표절에 대한 엄격한 금지법이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던 시기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선배의 행위는 너무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의 글을 허락 없이 베끼는 행위는 도둑질이기 때문입니다. 연세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한 박준서 박사가 쓴 ‘성서와 기독교, 구약 편’에 보면 그는 제 8계명 즉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의 신학적 의미를 이렇게 역설했는데 동의했습니다. “구약에서 인간이 일하는 것(노동)은 창조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에 나타난 에덴의 낙원에서도 인간은 땅을 경작하며 일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노동을 하지 않고 불로소득 하는 절도는 단순히 경제 질서나 사회 질서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창조 질서의 위반이다.”(성서와 기독교, 연세대학교 출판부,P,65) 언젠가 차준희 교수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친구가 이렇게 저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 설교 원고에 각주를 다는 데 조금 심하다. 논문도 아닌데 인용한 글을 각주로 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는 지나친 배려 같다.” 친구의 말을 듣고 이렇게 답변한 적이 있습니다. “차 교수,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래야 내가 공부한다. 둘째, 배려가 아니라 상식이다.” 학자가 학위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노력한 대가가 얼마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목사가 책을 한 번 출간하기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을 물질로 비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건 물질의 가치를 뛰어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허락 없이 자기의 것으로 갈아 채는 것, 그건 중대한 범죄행위이자 상식 이하의 사람들이 행하는 질 나쁜 도적질입니다. 그러므로 내 것이 아닌 것을 말하거나 인용할 때는 반드시 그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그래서 저 역시, 제 책에 인용한 시나 노랫말은 출처를 밝히는 것은 물론 저작권협의회에 적절한 사용 대가를 지불하고 게재한 것입니다. 재론하지만 내 것이 아닌 것은 반드시 그 출처를 밝히는 것이 마땅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보면 서두에서 제가 말씀드렸던 출처를 밝히는 데 민감했던 바울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이 출처를 밝히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전한 복음’이었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가 앞서 보았던 거짓 교사들이 전한 다른 복음의 정 반대 급부에 있는 복음입니다. 조금 풀겠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할례나,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다른 복음과는 전혀 생리가 맞지 않는 바울이 이미 전한 복음일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내가 전한 복음’이 무엇이었습니까? 후에 살피겠지만 미리 선을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16절은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복음의 정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걸고 사수해야 하는 복음 그 자체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또 하나의 구절을 소개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내가 받은 복음’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수없이 들었던 것처럼 행위가 아닌 믿음입니다. 이렇게 단호하고도 분명한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을 오늘 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인 믿음의 출처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대부분의 이성적인 현대인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대목이 아마 이 대목일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려면 인간이 해야 할 몫이 없는데 너무 허접하다는 반론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기가 수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께서는 종교를 분류하면서 구원의 주체에 따라 타력 종교와 자력 종교가 있다고 성숙자반에서 설명하고 있는 데 그의 지론에 의하면 우리 기독교는 철저히 타력종교에 해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유교적인 문화와 불교적인 종교성을 지니고 있기에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에서 볼 때 누군가에 의해 구원이 주어진다는 타력적인 의미보다 내가 정한수를 떠 넣고 빌어야 하고, 목욕을 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열심을 내야하고, 며칠 동안 작정 기도를 해야 하고 등등의 무언가 행위적인 내 실천을 통해서 구원의 도에 이를 수 있는 자력종교적인 배경이 더 강하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만’ 이라는 요구 조건에 비해 더 솔깃할 것이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아마도 갈라디아 지역에 살고 있었던 개종한 그리스도인들도 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었는데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것 등등은 인간이 무언가를 반응한다는 차원에서 그들을 유대교 쪽으로 이동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요인으로 작동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행위에 대한 반응과 ‘믿음으로만’ 이라는 대칭 구조로 접근할 때 믿음으로만은 여러 차원에서 불리합니다. 그런데 저는 더 궁지에 몰릴 수 있는 위험인자를 하나 더 교우들에게 던지려고 합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행위의 일체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행위를 요구하는 것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질 나쁜 이단적인 행태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가 얼마나 믿음이라는 요소에 대하여 중요한 부점(附點)을 주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중요한 믿음의 생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더 난감해 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8-9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정말로 쐐기를 박는 듯한 결정타를 행위를 요구하는 자들에게 먹입니다. 믿음의 출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믿음조차 인간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성경의 메시지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이점에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행위론자들에게는 어안이 벙벙하게 만드는 바울의 충격적인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행위론자들은 충격적인 메시지이겠지만 저에게는 바울의 이 선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으로 다가오는 은혜라는 점에서 사뭇 다릅니다. 왜 다를까요? 아마도 오늘 설교의 주제가 될 것 같습니다. ※ 그래서 내 믿음의 역동적인 주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2절) 내가 전한 복음의 출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였다고. 이런 분명한 출처를 밝히고 있는 바울의 말을 저는 이렇게 바꾸려고 합니다. 내 신앙의 주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만에 하나 복음이 사람에게서 주어진 것이라면 즌 그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 복음이 어떤 교회 공동체에서 주어진 것이라면 그 공동체를 기쁘게 해주어야 합니다. 만에 하나 복음이 어떤 사회적인 집단에 의해서 주어졌다면 그 집단에 충성하며 그 집단을 기쁘게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11절 하반절)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12절 전반절)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종강하는 강의에서 이렇게 그들에게 말한 것이 있습니다. “목회 현장은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적인 이론만으로 해석이 안 되는 것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 그래서 순간순간 다른 것에 기웃거리려는 유혹에서 허덕일 때가 많다. 그럴 때 다시 옷깃을 여미고 돌아가야 할 목표는 ‘다시 예수’다.” 폼 잡으려고 학생들에게 립싱크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목회의 마지막 필드에 들어선 목사가 앞으로 정글로 나와야 하는 제자들에게 정말로 파로 토하는 심정으로 전한 사자후였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엔도 슈사쿠의 걸작 중에 하나인 ‘사해 부근에서’를 독서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는 일본의 가톨릭 대학의 동창이었던 ‘도다’가 지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성경학과 히브리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로 날아갑니다. ‘나’는 가톨릭 신앙을 가졌고 그로 인해 가톨릭 계통의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도무지 일본 사람으로 예수라는 존재에 대하여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지푸라기라고 잡는 심정으로 한 발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대학 동창인 도다를 만나기 위해 이스라엘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경학을 공부하고, 히브리어 원전을 전공하는 도다는 ‘나’보다도 더 심각한 범신론자가 되어 예수라는 존재를 믿음의 대상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연구의 대상 정도로 접근하고 있는 거의 무신론자로 전락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 두 사람은 서로가 원하는 것을 마땅히 찾지 못하고 성경에 기록된 예수라는 존재가 활동했고 방문했던 곳을 방문하면서 그가 어떤 존재로 살았는지를 ‘역사적 예수’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여행을 마칩니다. 그렇게 여행을 마친 이 두 사람은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같이 했던 소회를 소설의 말미에 기록하고 있는 데 이 기록들은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아닌 엔도 슈사쿠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내레이션으로 소설은 마무리됩니다. 오늘 저는 우리 교우들과 ‘사해 부근에서’ 말미에 있는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도다와의 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도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가 여전히 자넬 따라다니나?” 침묵하는 도다의 말을 대신하여 ‘나’는 내레이터가 되어 이렇게 독백합니다. “대학 기숙사 시절부터 삐걱거리는 성당의 문을 열던 그 때부터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긴 세월이 지났는가? 그런데도 나도 도다도 여전히 예수한테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의미심장한 독백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언제나 네 곁에 내가 있다.”(p,385) 아무리 부인하고 떠나고 싶고 뒤로 돌아서고 싶지만 그렇게 행하는 주체인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믿음의 진짜 주체이신 ‘하나님’이 여전히 나에게 해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너를 떠난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네 옆에 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의지가 아닌 주님의 의지가 내 믿음의 요소라는 강력한 천명입니다. 21세기 변증학자로 알려진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관계적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관한 특정한 것을 믿으며, 이런 점에서 믿음에는 분명한 내용이 있다.”(알리스터 맥그래스, “기독교 변증”, p,200) 맥그래스의 이 글을 접하다가 스스로 자문하고 자답한 것이 있습니다. ‘분명한 내용’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렇게 저는 스스로 자답했습니다. 그 분명한 내용이란 ‘하나님이 나와 가까이 계시겠다는 의지’를 믿는 것이라고. 전도서 기자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전도서 3:11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이 구절에서 특히 애정이 가는 대목이 있습니다.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영어성경 NRSV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는 점입니다. “He has put a sense of past and future into their minds.” 아마도 직역하면 이런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 안쪽에 미래와 과거의 감각을 두게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마음 안쪽에 미래와 과거의 감각을 두게 하신 분이 주님이시라면 마땅히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셔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제천세인교회 지체 여러분! 오늘은 대강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출처는 무엇입니까? 하루에도 수없이 변덕스럽게 변하는 내 마음입니까? 제천세인교회라는 공동체가 여러분의 믿음의 출처입니까? 세인교회 담임목사로 강력하게 말합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믿음의 출처가 아닙니다. 그러면 매 주마다 설교를 전하는 목사입니까? 이재철 목사는 이렇게 퇴임의 변으로 말했습니다. “나를 그냥 버리지 말고 거침없이 버리십시오.” 목사도 시무할 때까지만 여러분의 영적 지지자이지 믿음의 주체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목숨으로 사수할 믿음의 출처이자 주체는 누구이어야 합니까? 이 땅에 구원의 주로 오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 평강의 주로 오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가 띠 띄워야 하는 믿음의 줄입니다. 이 은혜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세인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내 주 같은 분 없네. 내 주 같은 분 없네 그 어느 누구도 내 생명 다하도록 주 얼굴만 구하리 내 주 같은 분 없네 그 어느 누구도 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위에 오 하나님 주 나의 모든 것 내주 같은 분 없네 이 땅위에 오 하나님 주 나의 모든 것 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 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