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6-대강절 세 번째 주일) 본문: 갈라디아서 1:10 제목: 목표 설정이 분명합니까? 서론) 교우들께서 중보 해 주셔서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원 한 학기 강의를 은혜 중에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해서 교우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와 문안을 드립니다. 학기를 마무리하면서 학생들에게 마지막 학기말 고사를 대신하는 숙제를 내 준 것이 있었습니다. 제 4의 바이블이라고 혹자들이 말하는 A,J 크로닌이 쓴 ‘천국의 열쇠’라는 소설을 읽고 그 안에 등장하는 두 명 주인공 신부를 소재로 나는 어떤 목회와 목회자가 될 것인가? 를 고민하는 보고서를 내라고 했는데 76명의 학생들이 나름 최선을 다해 글을 써서 페이퍼로 제출했습니다. 이 소설은 제가 신학교 4학년 시절에 읽었던 책이었는데 그 때 이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목양의 현장에서 어떤 사역자가 될 것인가를 질문하게 했고, 결국 그 안에 등장하는 주인공 신부 한 사람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게 했던 책이기에 후배들이자 제자들인 학생들에게 저와 같은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학기말 고사를 대신한 보고서로 채택한 것입니다. 소설의 줄거리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 소설에는 두 명의 신부가 등장을 합니다. 한 명의 이름은 프랜시스 치셤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안셀름 밀리입니다. 이 두 사람은 신학교 기숙사를 함께 쓰며 동문수학한 친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신부로서의 행보는 극과 극이었습니다. 치셤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주류의 길로, 밀리는 대단히 안전한 주류의 길로 들어섭니다. 치셤은 자기의 안위를 위하여 보신하는 나약한 삶이 아니라 거침없이 가톨릭이 가지고 있는 교권 정치에 맞서기도 하고,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아 기득권을 획득한 자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가장 악조건의 장소로 좌천되어 치열하고 힘든 사목을 하며 일생을 보내지만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제의 삶을 살아냅니다. 반면, 밀리는 출세를 위하여 정치와 타협하고, 위에 있는 권세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아부하면서 승승장구합니다. 거짓과 인위적인 숫자 조작도 서슴지 않고 출세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공주의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드디어 성공의 자리에 앉은 밀리는 치셤에게 갑 질하는 위치에서 그를 농락하는 쾌감을 누리기까지 합니다. 소설의 기록 그대로를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치셤 신부는 철저하게 실패한 것처럼 여겨지는 신부의 삶을 산자였고, 밀리는 최고로 성공한 신부의 자리까지 올라서는 승자처럼 보이게 저자는 소설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자적인 해석이 아닌 크로닌이 진짜로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 소설의 저자인 A,J 크로닌은 자신이 살았던 1940년대 유럽 종교의 가장 강력했던 힘을 갖고 있었던 가톨릭 신앙의 맹점과 허구성 그리고 무기력함을 고발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는 배경을 전제할 때 적어도 저자는 교회가 종교적인 기능과 역할을 감당하려면 치셤이 걸었던 그 길을 선택해야 함을 역설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더불어 제가 이 소설은 선택하여 보고서를 쓰라고 한 이유도 저자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궤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점수를 매기기 위해 학생들의 페이퍼를 세밀하게 읽었는데 76명의 학생들 중에 상당수는 교수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프랜시스 치셤의 길을 가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적어도 안셀름 밀리의 길을 가는 목사가 되겠다고 보고한 학생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의 보고서에서 제게 눈에 띈 몇 개의 보고들이 있었습니다. “치셤의 길을 가야하는데 오늘도 나는 밀리가 되고 싶어 하는 내 자아와 치열하게 싸웁니다.” “나는 지금 치셤과 밀리의 경계선에 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치셤이 되어야 하지만 내 솔직한 마음은 밀리이고 싶습니다.” 학생들의 보고서 글들을 읽으면서 30년 전, 졸업하여 서울신학대학교 교문을 나설 때의 저를 반추해 보았습니다. 나는 어떠한 마음이었는가? 그 후로 1992년 목사 안수를 받으며 하나님께 드렸던 세 가지의 결단과 서원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하나님, 정치하는 목사가 되지 않겠습니다. 돈에 굴복하는 목사가 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1:10절 말씀대로 사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저는 오늘 교우들과 갈라디아서 6번째 강해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6번째 강해의 텍스트는 제가 목사 안수 받는 날, 하나님께 드렸던 서원제목에 담겨 있는 구절입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은 제 인생에 있어서 목사로 살아오면서 저를 붙들어 주면서 목사로의 자존감을 지키도록 저를 날마다 곧추 세워준 키워드와 같은 말씀입니다. 해서 본문 설교는 저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설교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본론)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여기에 기록한 ‘좋게 하랴’는 헬라어 단어 ‘페이도’는 ‘설득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어원적인 의미를 적용할 때 이렇게 본문 10절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던 유대 율법에 무장되어 있던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전하며 부화뇌동했을 것입니다. “바울이라는 사도 같지 않는 자가 너희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할례와 같은 불필요한 율법의 내용들은 구원을 받는데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설득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거짓 교사들은 바울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기에 너희들이 넘어 갔지만 할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절차라고 부추겼을 것입니다. 이런 부화뇌동에 참 많은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이 흔들렸고 결국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에 넘어가는 어처구니없는 실망감을 바울에게 던져준 꼴이 된 것입니다. 이에 격분한 바울은 격한 감정을 갖고 갈라디아 교회의 배교한 신자들은 물론 흔들리고 있는 신자들을 향하여 직격탄을 날린 것이 바로 본문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본문을 읽겠습니다. “내가 이처럼 강경하게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조정하려는 것이겠습니까? 혹은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대중의 박수를 받으려는 것이겠습니까?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는 것이 나의 목표라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려고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이처럼 강력하고 담대하게 경고성 멘트를 날리며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직격탄을 날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의 목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4-5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이 구절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족장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장면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 지역에서 나름 우상을 섬기고 그 우상에 관련된 것들을 판매하면서 부를 소유하여 부유하게 살고 있었던 아브람을 일방적인 하나님이 부르신 기사입니다. 그리고 그의 주권으로 부르셔서 갈대아 우르라는 우상의 땅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신 그 유명한 신탁이 본문입니다. 다시 밀해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권고였습니다. 해서 아브람은 식솔들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 땅인 가나안에 들어갔음을 창세기 12:5절이 증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벌어진 관계의 내용을 설명하던 창세기 기자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한 구절을 남겼는데 저는 그 구절을 앞에서 읽은 12:4절이라고 여겼습니다. 창세기 12:4절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동선(動線)과 그의 조카 롯의 동선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갔다는 보고입니다. 우리는 이미 창세기 보고를 통해 아브라함의 인생이 어떤 스토를 남겼는지, 그리고 롯의 인생 역시 어떤 이야기와 흔적을 남겼는지 알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학자들마다 세밀한 논쟁의 여백이 있기는 있지만 대체로 아브라함은 꽤 괜찮은 해피엔딩의 라이프스토리를 남겼다고 보는 반면, 롯의 인생은 적지 않은 유감을 남긴 언 해피엔딩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인식하는 선이해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혈육지간의 두 사람의 인생이 극과 극으로 양분되었을까요? 복음주의 학자가 한 주석 중에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의미 있게 담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따라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롯이 따른 것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라는 것이 두 사람의 인생 여정을 차이 나게 한 요인이었다는 해석이었습니다. 한 학자의 주관적인 해석이기에 이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 는 개인의 몫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해석을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왜 이 해석을 수용했을까요? 또 하나의 성경적 기사에 대한 연상 때문입니다. 창세기 13:14절을 읽겠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여러 차례 우리 교우들과 함께 나눈 말씀입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따라나섰습니다. 그 결과 롯은 아브라함이라는 바람막이가 있어 때때로 어려움을 당할 때 힘이 되었겠지만 도리어 아브라함은 롯을 살피기 위해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했음을 추측하게 하는 여러 정황들이 족장 역사에 등장합니다. 위에서 읽은 창세기 13:14절은 단순한 글로 보고되었지만 어떤 의미로 보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다시 하나님을 집중하는 획기적인 구분점이 된 기사입니다. 조카의 식솔들과 힘께 많아진 재산과 가축들로 인해 적지 않은 분쟁이 야기되자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분가할 것을 요구하고 그로 인해 롯은 비옥한 땅인 소알을 선택하여 떠나게 되었다고 창세기 13:10-12절에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소알의 반대편이었던 헤브론이라는 척박한 지역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서 그곳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음을 창세기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고서를 열면 소름을 끼치게 하는 창세기 기자의 보고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됩니다, 창세기 13:14절 전반절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롯이라는 사람을 붙들고 있었던 아브람은 롯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작은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집중했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이 아브람을 위해 일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사람에게 매여 있던 아브람의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끼어들 여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롯이 떠나자 드디어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보고가 13;14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던 아브람이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람의 전 인생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런데 롯에게 집중하면서부터 하나님은 아브람의 인생에 개입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세인 지체들이 오늘 설교를 통해 집중 또 집중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표입니까?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본문에 맞게 적용을 좁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역사 대하소설가인 조정래 선생이 독자들과 대화한 내용을 묶어 낸 책이 ‘시선’ (해냄 간)입니다. 조 작가는 책에서 문학의 목표를 묻는 독자의 물음에 기막힌 답을 내놓았습니다. “문학의 대상은 영원히 인간입니다. 그 인간의 문제를 얼마나 총체적으로 그리고 감동적으로 그려내느냐 하는 것은 작가의 능력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지요.” (p,271) 위대한 대하 소설가의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문학의 영원한 대상은 인간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자존감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한 작가의 자존감보다 떨어져서야 되겠습니까?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3:12-14절을 나눕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이자 설교자였던 존 스토트는 자신의 ‘갈라디아서 강해’ (IVP 간)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의 정체성과 거짓 교사들이 가르친 다른 복음과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선명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공로 없는 은총의 복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신을 부르신 분을 떠나는 것은 참된 복음에서 떠나는 것이다. 교사들이 사람을 높이면서, 사람이 자신의 도덕, 종교, 철학 혹은 고결한 인격에 의해 구원에 무언가를 기여할 수 있다고 암시할 때마다 복음은 훼손된다. 이것이 첫 번째의 시험 기준이다. 참된 복음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찬미한다.”(p,31.) 존 스토트의 해석을 수용한다면 바울과 거짓 교사들의 분명한 차이점은 구원의 조건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은혜로 받는 구원을 전한 반면, 거짓 교사들은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전했다는 차이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 교리의 핵심적 정의는 바울이 전하고 존 스토트가 응원하고 있는 값비싼 그러나 공로 없는 은총의 복음입니다. 저 역시 이 복음의 정수에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으며,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이 요구하고 압박한 내용은 할례와 절기의 준수였습니다. 할례를 받는 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경계하고 있는 표면적 유대인이 되기 위한 징표였습니다. 로마서 2:28절을 봅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이어 로마서 2:29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렇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으로의 인치심이 바로 할례였고, 더불어 절기를 지키는 것은 마땅히 표면적 유대인이 된 사람이 행하여야 하는 행위의 단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의 율법적인 조항은 은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행위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목표를 하고 달려가야 하며 붙들어야 하는 것은 표면적이 유대인이 되기 위해 유대의 기득권자들이 사수하고 있는 율법으로의 회귀 즉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은총의 복음을 사수하는 것입니다. 기득권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면 그리고 빼앗기지 않으려면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려면 한 가지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목표에서 이탈하지 않으면 됩니다. 담임목사의 본문 해석을 기억하며 본문을 다시 읽어 보십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뉴욕 리디머 교회의 담임목사인 팀 켈러는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에서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당신이 꾸준히 교회에 나가고 있고, 독실한 교리적 신념도 다 갖췄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려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당신의 진짜 구원은 무엇인가? 당신은 정말로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 말고 실제로 당신의신은 누구인가? 당신이 혼자 있을 때 당신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게 당신의 진짜 신이다.”(PP,246, 248)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보다 큽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이 만든 신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설정해야 할 목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당신의 사람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무엇이 변치 않아 내 소망이 되며 무엇이 한결같아 내 삶을 품으리 그 누가 날 만족케 해 내 영이 쉬며 그 누굴 기다려 내 영이 기쁘리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아래 내 소망이 있네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아래 내 생명이 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