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생각하는 신앙을 가지라2024-02-26 16:02
작성자 Level 10

2018년 12월 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대강절 두 번째 주일)

 

본문갈라디아서 1:6-9

제목생각하는 신앙을 가지라

 

서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공부하도록 필독도서로 선정한 책 중에 하나가 Your partner 대표인 심윤섭 대표가 쓴 리더십의 또 다른 얼굴팔로워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한 글을 소개합니다.

“100년이나 계속된 전란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일본 통일을 이룬 우리도 너무나 잘 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장 사랑했던 팔로워가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였다두 사람이 평생의 인연을 맺은 계기는 의외로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다히데요시가 매 사냥을 나갔다가 목이 말라 절에 들렸는데 그곳에 이시다 미츠나리가 일을 하고 있었다히데요시가 미츠나리에게 차 한 잔을 달라고 했다이에 미츠나리는 커다란 잔에 마시기 적당한 온도로 차를 내왔다한 잔을 다 마시고 히데요시가 더 달라고 하자이번에는 중간 크기의 잔에 따뜻한 차를 내왔다이 잔도 비운 히데요시가 세 번째 잔을 요구하자 미츠나리는 작은 잔에 뜨거운 차를 가지고 나왔다세 잔의 차를 다 마신 히데요시가 의아해 하며 각기 다른 잔에 다른 온도의 차를 내온 이유를 물었다그러자 미츠나리는 이렇게 답변을 했다첫 번째 잔은 목이 마를 것 같아 빨리 마실 수 있는 있도록 적당한 온도로두 번째 잔은 차의 향을 느낄 수 있도록 따뜻한 온도에 맞추었고마지막 세 번째 잔은 천천히 차의 향을 음미하도록 그리고 급히 마셔 체하지 않도록 작은 잔에 뜨거운 차를 가지고 나왔다고 대답했다.”

저는 책에서 이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상시에 삶의 철학을 갖고 사는 자는 어떤 불리한 상황이나 돌발 변수가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무게가 있는 자라고.

사람들이 왜 조그마한 일에 흥분하고 넘어지는가?

삶의 철학이 없기 때문에 넘어집니다.

삶의 철학이 없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각하지 않는 가벼움으로 인해 인생의 여정에서 추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의 비극은 철학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철학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아주 이상한 선입관이 있습니다.

점쳐주고작명해 주고사주팔자를 봐주는 그런 미신 같은 것들의 직업을 떠올리는 선입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은 인간이 추해지지 않게 해주는 바람막이와 같은 대단히 중요한 학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철학의 과정은 생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의 내용은 사유를 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 보십시다.

만에 하나 전 세계에 최대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러시아중국이라는 나라의 수장들이 공동의 선을 이루어야 한다는 글로벌한 상식의 철학이 없는 자라면 어떠하겠습니까?

어떤 비극이 이 지구상에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집니다.

지금 미국이라는 나라의 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가 줄기차게 주장한 AMERICANISM 이라는 국수주의로 인하여 전 세계가 추구하는 보통의 질서 속에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우리는 눈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전 세계를 이상기온의 공포로 몰아넣은 원인을 추적하면 철학이라는 것을 내동댕이친 전 세계의 이기주의적이고천민자본주의적인 발상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사정이 이렇게 긴박한 데도 일부 지도자들은 자국의 경제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데 혈안이 되어 전 세계인들이 공히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공생의 도를 헌 신짝 벗어던지듯 내 던지며 무감각하게 방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철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로 시선을 돌려 보십시다.

대학마다 철학과가 폐지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지원을 하지 않자 학교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그러다보니 취직이나비전에 불투명한 학과로 전락되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습니다.

대학마다 미련 없이 철학과는 폐지하고 교양과목에도 철학에 관련된 과목들을 폐강하는 일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사고가 끊긴 세대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사실은 앞으로가 더 걱정이 되는 것은 저만의 소회가 아니라 많은 지성인들이 공히 염려하는 일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신앙적인 색깔이 없는 일반적이고도 지성적 차원에서 생각하는 철학이 있는 개인생각하고 공동의 선을 이루고자 하는 철학을 갖고 나아가는 사회조금 더 거창하게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국가가 되어야 함을 외연을 확장하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설교를 전개한 속내를 펼쳐보겠습니다.

이렇게 철학적인 사고 구조는 국가적으로사회적으로 좁게는 개인적으로 대단히 중요한데 이런 공식은 신앙인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점에서 오늘 설교를 시작됩니다.

철학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말을 던지고 보니 조금은 낯 설은 느낌이 있어 언급한 위의 문장과 가장 가까운 문장으로 이렇게 다시 바꾸어보겠습니다.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라

왜 그렇습니까?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정말로 비극을 넘어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권면은 오늘 우리 세인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지체들에게 백번을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론)

 

본문 6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이 구절에서 주목할 단어를 발췌하겠습니다.

속히입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이 단어를 ‘quickly’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재빠르게입니다.

재빠르게라는 이 부사를 해석하면 이렇게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렇다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유대로부터 내려온 거짓 교사들이 전하는 할례라는 다른 복음에 대하여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받아들여 배교라는 카드를 꺼내들면서까지 거기에 함몰되었다고 해석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계속 강조했던 것처럼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별로 생각이 없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내 버린 꼴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왜 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가볍게 대우했을까요?

생각하지 않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이런 비극을 초래합니다.

 

※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믿음의 주체가 아닌 객체에 관심을 갖게 만듭니다.

 

이게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본문에 근거하여 설명 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 지방에는 생각보다 회당이 많이 존재했습니다.

제가 4년 전에 둘러보았던 바로 이 지역 갈라디아 지역만 해도 회당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었던 회당 중앙 강단에서 설교했던(사도행전 13:16-41) 바울을 흉내 내면서 설교해 보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고니온에서도 바울은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루스드라버가에서도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이 없어 확언할 수는 없지만 전례를 참조한다면 회당에서 사역했을 개연성이 농후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긴장감이 이들 지역에서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만들어진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교적인 율법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이방인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고그들은 갈라디아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었던 회당에서 진행되던 유대 율법적인 종교의식에 참여한 소위 말하는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그 결과 그들은 적지 않은 갈라디아 회당 종교의 재정적인 지원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유대 회당을 유지하고 이끌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무시하지 못 할 고객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느 한 순간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어떤 이유때문인가요?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 사역을 사도행전 13장에 누가가 세밀하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무대로 잠시 들어가 보십시다.

13:14-41절에 보면 바울은 비시디아 회당에서 유대인의 역사를 아우르는 대단한 설교를 행하였음을 알려줍니다.

유대 역사를 비추어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의 캐리그마에 관한 설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색다르고 신선한 메시지를 전하는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 있었던 자들이 사도행전 13:42-44절에서 다음과 같이 반응을 했음을 누가는 보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무슨 말입니까?

비시디아 안디옥의 영적 기상도가 바뀌었음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에서 기독교로의 탈바꿈입니다.

엄청난 반응이었습니다.

마치 혁명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비시디아 유대 종교 집행부는 이런 원인을 제공한 바울을 대단히 위험한 인물로 경계하기 시작했음을 계속 이어지는 사도행전 13:45절이 전합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이런 악연이 바울과 갈라디아 지방의 유대인들에게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자들에 의해 세워졌고 그 세력을 갈라디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제는 든든한 교회 공동체로 서 가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는 유대 종교가 무시할 수 없는 종교적 대안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세력으로 서 가고 있었던 갈라디아 교회에 심하게 적대감정을 갖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호시탐탐 갈라디아 교회에 대하여 공격할 시기와 방법에 골몰하였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바로 그때 같은 기독교 공동체인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온 자들이 갈라디아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마음을 뻥 뚫리게 해 주는 좋은 소식을 벌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지난 주일에 살폈던 할례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행간에 숨겨져 있는 기막히고 숨 가쁘게 펼쳐진 영적 대결이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 바로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갈라디아에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너무나도 고맙게 이 일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이슈화시켰고 이게 웬 떡인가 싶어 그들은 사이드에서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면서 쾌재를 불렀을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이 논쟁이 수면 위로 부상하자 생각 없이 기독교로 개종했던 유대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잊고 있었던 할례의 종교성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고 거기에 맞물려 이방적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대중적인 심리에 속절없이 넘어가 다시 유대교에서 정한 율법적 종교로 개종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줏대 없이 갈라디아 지방에 살고 있던 자들은 배교를 서슴지 않았을까요?

이 주석을 통해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영적 교훈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교훈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의 결론은 항상 종교적 행위라는 객체에 함몰된다는 교훈입니다.

진짜로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주체적인 내용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그 예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종교적 행위와 상징에 불과한 객체들에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환언한다면 이렇게 조망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항상 주객이 전도되는 비극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의 신앙의 주체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객체인 종교적인 행위에게 떠밀려가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주객이 전도된 것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실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행동을 하다 눈여겨보던 바리새인들이 건수 하나를 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 몇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와서 다음과 같이 항의합니다.

마가복음 7:5절을 읽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이 항의를 받으신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선포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이어지는 마가복음 7:6-9절을 봅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로 성토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당시 가장 종교적이라는 자들의 마음속에 정작 추구해야 하는 신앙의 주체 즉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진짜의 본질에는 별 관심이 없고 도리어 본인들이 정해 놓은 종교적인 비본질을 토대로 일반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객체를 갖고 장난질치고 있다는 호통이었습니다.

바리새라는 종파는 태생이 아름다웠습니다.

중간기 400년 동안 열방 강국들에 의해 유린되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거의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희석되는 것을 보며 이래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 마음을 갖고 하나님이 만드신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으로 태동된 분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태동의 시기에 이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신앙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만들어낸 율법 정신이 하나님 정신으로 돌아서자는 원래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하여 암묵적으로 침묵했습니다.

율법 정신이 하나님 정신으로 회복되는 것인데 도리어 그 율법이 자기들의 제도적인 권위그로 인해 부과되는 각종 이권과 결부된 부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이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다는 비아냥거림 그대로 이들도 하나님 정신이라는 신앙의 주체적 정신은 사라지고 그들이 만들어낸 율법으로 차지하는 이익이라는 객체에 함몰되는 어처구니없는 종교 집단으로 추락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추한 종교집단으로 변질된 바리새인들은 향하여 독설을 주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에게 정곡을 찌르신 예수님의 이 직설을 보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찾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고민하지 않는 신앙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사유하지 않는 신앙은 언제든지 이런 천박한 아류의 집단으로 급전직하할 수 있다는 교훈을 말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회심했던 자들이 할례 논쟁에 휘말려 다시 배교하며 유대 율법적 종교로 그렇게 속히 (빠르게돌아선 이유의 배경을 추적하면 바울이 떠난 이후 그들을 생각하는 신앙으로 성숙시킬 영적 지도자의 부재 그리고 연이은 트레이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에서 착념하고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야할 사역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신앙의 주체라는 사실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훈련이며 생각하게 하는 신앙의 훈련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아프게 다가오는 현장 목회의 쓰라림이 있다면 그것은 목사는 물론 성도들이 언제부터인지 생각을 멈추었다는 절망감입니다.

언젠가 김기석 목사의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를 읽다가 글 속에서 이 메시지를 만났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떤 철학자가 느린 삶에 대하여 강의해 달라는 방송국의 강의 요청을 거절한 이유가 느림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 바빠지는 것이 싫어서였다.”(p,236)

생각한다는 것은 절대로 천박해지거나 비본질적인 것으로 눈을 돌리는 일을 막아주는 방법입니다.

박노해 시인도 다른 길이라는 시집에서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는데 의미 있게 받아들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똑똑하고 편리해진 시대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밖에 없는 무력해진 세계에서그들은 내 안에 처음부터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잃어버린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p,8)

생각하는 자는 자기를 성찰합니다.

자기를 성찰하는 자는 나를 성숙한 자로 만들어 나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신앙의 성찰은 신앙의 주체이신 주군께 향하는 목적을 견고하게 할 것이며결코 신앙의 비본질적인 양태에 눈을 돌리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속히 혹은 재빠르게 자기의 유익을 따라가는 얍삽한 믿음을 갖지 않고 든든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갈라디아서 강해 5번째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로마서 8:18절을 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얼마나 넘겼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당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인에게 나타날 영광을 생각해 보니 그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것을 바울이 본인에게 주어질 영광’(헬라어 독사의 번역)과 고난의 상관관계를 믿습니다.’가 아닌 대단히 중요한 것의 결과물로 고백한 산물이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생각해 본 결과라는 점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는 감정적인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영광의 도래는 로기조마이’ 즉 이성적으로 신중하게 심사숙고한 결과였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소망하고 또 소망합니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생각하는 신앙이 멈추면 내 신앙의 성장도 멈춥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신앙의 주군이신 예수님 그리고 그 분을 주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입니다

내가 서있는 곳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내 영혼 거룩한 은혜를 향하여

내 마음 완전한 하나님 향하여

이곳에서 바로 이 시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