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본문: 갈라디아서 1:6-9 제목: 다른 복음은 매력적입니다. 서론) 오늘 목양터 이야기마당에서 인용한 숭실대 기독교학과 권연경 교수가 쓴 ‘갈라디아서 산책’ 프롤로그에 밝힌 글을 다시 복기하겠습니다. “해수면보다 더 낮은 호수처럼, 세속사회의 상식보다 더 아래로 내려간 ‘한국교회’의 의식과 삶의 수준은 교회에 대한 실망을 넘어 복음 자체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곤 한다. 한편으로는 절망스런 상황이지만, 한편으로는 전형적인 상황이기도 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복음은 언제나 그 주변 사회의 ‘소식’들과 경쟁하며 전해져 왔다. 물론 이 경쟁은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 가장 치열한 전선을 형성한다. 세상의 편리한 소식과 복음을 뒤섞으려는 유혹과, 그 유혹에 맞서 복음을 수호하려는 노력 사이의 전투다. 갈라디아서는 이런 투쟁에 대한 가장 생생한 기록의 하나다.”(pp,11-12) 갈라디아서를 읽다보면 제일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바울의 감정선(感情線)이 보입니다. 그것은 분노였습니다. 해서 전술했듯이 바울은 그 흔한 감사의 인사도 생략한 채로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본 서에서 그가 품고 있는 분노의 감정을 쏟아내는 가장 표현하고 있는 텍스트가 있다면 오늘 읽은 본문일 것입니다. 본론) 오늘 읽은 4개의 절수에 마치 경쟁이나 하듯 바울이 반복해서 언급한 단어가 눈에 띕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이렇게 같은 단어로 연속해서 매 번 기록된 ‘다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두 가지의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6절에는 ‘변질된 혹은 또 하나의 전혀 다른 ’으로 해석되는 형용사 ‘헤테론’이고 8,9절에서는 ‘반대 편’ 이라고 해석하는 전치사 ‘파라’라는 단어로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다른’이라고 표현한 이 단어들의 또 다른 의미는 ‘변질된 복음’ 혹은 ‘복음과는 정 반대의 거리에 있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들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 번역은 이 단어들을 조금은 더 리얼하고 과격하게 번역하고 있는데 설교에 도움이 되는 해석이라 소개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메시지, 이질적인 메시지, 메시지라고 할 수도 없는 것, 하나님에 관한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메시지, p,510.) 바울보다 더 흥분된 모습으로 유진 피터슨은 다른 복음을 상대할 가치가 없는 메시지로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상당히 과격하고 감정적인 표현으로 다른 복음에 대하여 경계하는 선언을 합니다. 주목할 것은 경계 정도가 어떤 비장의 카드를 던지는 것을 연상할 수 있는 비수와 같은 발언을 본문에서 표현합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6절입니다. ‘이상하게 여긴다.’ 7절입니다. ‘너희를 교란하게 하려는 것이다.’ 8절, 9절입니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 바울의 성품과 신앙의 정도가 어떠했습니까? 우리들이 이미 나눈 고린도전서의 말씀으로만 적용해 보십시다. 고린도전서 13:4-7절을 상기해 보십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의 정의를 선포한 바울의 말 중에 다른 표현들은 차치하고 이것만 인용합시다. “사랑은 온유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에서 저주를 퍼붓고 있는 바울과 어떻게 고린도전서 13장의 메시지를 선언한 바울에게서 교집합 분모를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해석 불가입니다. 그렇다면 해석은 불가하지만 한 가지 추측만은 가능하게 합니다. 이토록 과격한 발언을 하게한 다른 복음이란 정체의 파악입니다. 도대체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바울을 이토록 이율배반적인 사람으로 여기게 할 정도로 바울을 움직이게 하였을까?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해 해석하고 연구할 내용들은 갈라디아서 여행을 함에 있어서 오늘 우리 세인지체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갈라디아서 이해의 결정적인 팁을 줄 것입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를 통타했던 다른 복음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위해서는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내용들을 종합하여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조금은 어렵고 지리 한 내용처럼 보이겠지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주후 1세기 수리아 안디옥지역, 예루살렘, 그리고 우리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갈라디아 지역에서 치열하게 일어났던 몇 몇 사건들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고도의 집중력을 주님이 주실 줄로 믿고 달려가겠습니다. 후에 살필 5:2-3절을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바울의 이 선언을 참고해 본다면 분명한 팩트가 하나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그것은 갈라디아교회에 할례에 대한 시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향후 갈라디아서 여행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선지식(先知識)이 될 것 같아 조금은 소상히 연구해 보겠습니다. 이전 설교를 통하여 전했던 것처럼 갈라디아는 지금의 터기 중부 지역과 일부 중남부 지역을 가리키는 광활한 지역입니다. 이 땅은 유대인의 관점으로 보면 철저한 이방의 땅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은 유대인들의 생활이나 문화, 관습과는 동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전혀 무관한 지역입니다. 문제는 이곳에 세워진 갈라디아교회에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관습으로 행해졌던 할례 논쟁이 불거졌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설명될 수 있는 내증이 하나 있는데 후에 살필 갈라디아서 2:1-10절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회에서 열린 할례논쟁 총회의 증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바울이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일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방문은 약간의 반대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방문을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이 세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예루살렘 총회의 방문으로 연계하는 데 별 이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디도가 왜 예루살렘 총회에 올라갔습니까? 모든 교회의 모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교회와 이방 교회의모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수리아 안디옥교회 간에 치열한 대립 점에 있었던 할례 논쟁에 대한 끝장 토론을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할례 논쟁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 초대교회사 속에 나타났던 숨 가쁜 스토리에 접근해야 합니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의 위클리프 칼리지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는 리처드 롱 에네커 교수의 주석을 참고하여 다음과 같은 연대기를 소개합니다. ① 통상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주후 30년 즈음으로 추측합니다. ② 바울의 회심은 그로부터 2-3년 정도 뒤인 32-33년 정도로 봅니다. 이 연대기를 전제하면서 갈라디아서 2:1절을 읽겠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여기에 기록된 14년이라는 산술적인 숫자에 대하여 롱 에네커 교수는 바울이 회심한 시기를 기점으로 한다고 해석합니다. ③ 이 해석을 참고한다면 예루살렘에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할례 논쟁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간 시기는 주후 약 46-47년 정도일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교회사적인 팁이 하나 있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제 1차 전도여행을 떠난 시기를 주후 44년 정도로 보고 끝난 시기를 넓게 잡아 48년 즈음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수리아 안디옥 교회라는 이방 교회의 모 교회에서 두 사람이 선교사로 파송된 시기도 44년 즈음일 것입니다. 또 하나 알아야 할 지식은 제 1차 예루살렘 총회 즉 앞서 말씀드린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이 회의는 1차 전도여행이 끝난 뒤에 열린 회의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약 주후 48년 이후라는 정보입니다. 이 정황을 총 정리하면 이런 도식이 결론적으로 도출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44년 정도에 수리아 안디옥 교회를 떠난 48년 정도까지 사역했던 제 1차 전도여행 시기에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의 제 문제에 대한 답입니다. 이 두 사람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그들을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도착하자마자 대단히 분노하며 별로 쉬지도 못하고 약 480KM나 떨어진 예루살렘 교회로 급거 올라가게 된 이유는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2장의 정보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할례 논쟁의 끝장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렇다면 이런 정리가 가능합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이미 바울과 바나바가 없는 틈을 타 유대율법주의자들이 침투하여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완성한다는 다른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유린하고 있었다는 정보를 말입니다. 왜 제가 수리아 안디옥 교회어서 주후 47-48년 즈음에 일어났던 할례 논쟁을 오늘 이 시간에 소개했습니까? 이 논쟁은 단순히 수리아 안디옥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똑같은 할례 유용론이라는 율법주의와 다른 복음이 갈라디아 교회에도 똑같이 침투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는 학자들마다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통상적으로 주후 53-55년 즈음으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 교회에서 교인들이 술렁이고 또 급기야는 배교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한 할례 논쟁은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정도의 앞선 시기에 이방 교회에서 홍역을 치룬 일이었기에 바울의 분노를 더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 난 결론은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방 모교회인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승리였고 바울과 바나바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채 10년도 안 지난 시기에 또 갈라디아 지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이 일로 곤혹을 치루고 있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도저히 참을 수 없게 거룩한 분노의 원인이요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분노로 인해 본문에서 대단히 과격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선포했던 것입니다. 본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는 지금까지 오늘 본문을 자세히 주석했습니다. 이상의 본문 주석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의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도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에서 왜 할례는 끊임없이 교회와 성도들을 영적으로 유린했는가에 대한 추적입니다. 왜 이방 교회의 성도들은 할례에 대한 유혹에서 허덕였는가? 를 추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분명히 전술했습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문화요, 종교적 관습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할례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거기에 함몰되었을까요? 설교를 준비하다가 저에게 주신 조명은 이것이었습니다.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왜 매력적이었을까요? 그것은 철저히 영적인 필드의 영역으로만 해석 가능합니다. ※ 획일성보다 다양성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로 섬겨준 김 바나바 선교사님의 선포 중에 저하고 미리 각본을 맞춘 것이 아닌데 평신도 선교사가 갖고 있는 영적 통찰이 어쩌면 담임목사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질까 하며 신기해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5:13-16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주님이 선포하신 산상수훈 중에서 백미로 뽑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당연히 이 대목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13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14절) 이 부분만 영어성경 NLT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13절)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14절) 이 선언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엄청난 선언이요 의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빠져 나갈 구멍이 보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테두리에 가두어놓은 상태로 여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인간을 획일화시키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담을 줍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이 구절을 이렇게 바꾸면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이렇게 될 경우 책임 의식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여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만에 하나 13-14절을 성경이 이렇게 기록했으면 어떨까요? “You are a salt of the earth.”(13절) “You are a light of the world.”(14절) 정관사 the 가 아니라 부정관사 a 로 표시했다면 이 말씀은 대단히 매력적이게 됩니다. 나에게 불특정한 어떤 빛이 되라고, 어떤 소금이 되리고 하면 의무감에서 해방되기에 매력을 줄만하지만 그 소금이 되고, 그 빛이 되라는 한정은 빠져나갈 구석이 안 보이기에 부담백배가 됩니다. 이렇게 획일성보다 다양성은 매력적입니다. 하나의 예를 더 들겠습니다. 일전에 한 번 소개한 글이지만 또 한 번 다루겠습니다. “죄라는 말이 요즈음에는 ‘기피단어’가 되고 있습니다. 소수자에게 상처가 되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가치 때문에 앞으로 어떤 행동을 ‘죄’라고 부르는 것을 법으로 금지할 날이 올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죄’를 부정하고 ‘죄’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과거 ‘죄’라고 부끄러워했던 것을 요즈음은 ‘기호’라고 자랑합니다.”(김영봉, “가장 위험한 기도”, p,163) 죄는 죄입니다. 다른 것으로 대치하지 말아야 합니다. 라고 선포하면 획일화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그래서 몹시 부담스럽고 거북합니다. 그런데 죄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잣대로 새겨 기호, 선택사항 등등으로 바꾸어 부릅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양성을 존중해 주는 지성적 성찰로 인정해 줍니다. 그래서 매력적입니다. 목요일에 모이는 소그룹 반에서 택한 교제가 ‘잊혀진 제자도’입니다. 저자인 달라스 윌라드 목사는 세상 말로 아무 것도 아닌 ‘꽝’ 신자로 사는 자들에 대하여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카이 아이들먼 목사의 말대로라면 ‘팬’으로 사는 자들에 대하여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고 이렇게 독설합니다. “차라리 교회 공동체에서 이탈하라” 이런 강한 저자의 글을 읽고 온 지체들의 나눔의 일성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후유, 차라리 알지나 말 걸, 그냥 예수 믿는 것으로 만족할 걸, 심지어는 죽고 싶어요. 등등이었습니다.” 정서적으로 얼마든지 지체들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달라스 윌라드가 이렇게 역설합니다. “한 눈으로는 하나님의 눈치를 보아가며 크게 혼나지 않을 일들을 즐기며 죄를 쌓아갑니다. 이런 것을 ‘죄 관리’(sin management) 라고 합니다.” (위의 책, p,165) 죄 관리의 프로세스는 너무나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빠집니다. 반면, 죄 용납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음은 독선이요, 획일화요, 대화가 되지 않는 무식함으로 비난당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강덕 목사는 이렇게 정의하면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매력적인 것들은 그래서 다른 복음이라고.
결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다른 것에 기웃거리지 마십시다. 매력적인 것에 혹하지 마십시다. 가끔 고속도로에서 심하게 정체될 때 제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국도 탈까?” 그러면 아내가 저에게 서늘하게 말합니다. “그러지 마세요. 썩어도 준치예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을 보암직하게 하고, 먹음직하게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하는 것에 눈 돌리지 마십시다. 결국 그것은 여러분을 복음의 능력에서 이탈하게 하는 치명상을 입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처럼 보이는 다른 것이지.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함께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사랑 그 아들 주셨네 그의 피로 우린 구원 받았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강같이 온 땅에 흘러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구원받고 주 경배 드리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