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 갈라디아서 공부 본문 : 갈라디아서 2:16 서론)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전혀 모르시면 저와 비슷한 세대를 살고 계시는 분이고, 알고 계시면 저보다는 연배가 밑에 있는 분일 것입니다. 오늘은 빼빼로데이 입니다. 전에 함께 동역했던 강지숙 전도사는 이 날만 되면 저에게 빼빼로를 준비해서 ‘목사님, 사랑합니다.’라고 제 책상 위에 올려놓곤 했는데 이제는 인기가 바닥에 떨어져 그런 교인이 한 명도 없는 걸 보면 저는 참 불쌍한 목사인 것 같습니다. 제 설교가 워낙 무뚝뚝하고 둔탁해서 우스갯소리를 하나 던졌습니다. 빼빼로 데이라는 신조어가 왜 생겼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마케팅의 일환으로 기업이 만들어낸 장사의 노하우 중 하나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별 시답지 않은 상술로 보이는 이런 마케팅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 쪽에서 볼 때 대단히 큰 이익을 창출하게해 주는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해주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케팅이라는 경영학적인 단어를 풀면 어떻게 쉽게 풀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소비자라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심리를 집요하게 끊임없이 탐구해 가장 적절한 소비욕구를 가지도록 공부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발전이 정체될 때 죽습니다. 제가 책에서 읽은 글 가운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묘지의 비석에 이렇게 쓰였다고 합니다. “스물넷에 사망, 칠십에 묻힘.”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힌 것은 70세였지만 꿈과 비전을 잃어버려 실질적인 사망에 이른 것은 24세였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굳어지면, 공부하는 것을 포기하면 젊은 나이에도 이런 가장 슬픈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 있는 비석 문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공부 중에 특별히 영혼을 부요하게 하는 세속적인 영역과는 구별되는 공부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말씀 공부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갈라디아서라는 신약성경의 9번째 책을 교우들과 주일 낮 예배 시간을 통해 공부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론) 갈라디아서 공부를 택한 이유는 두 가지의 이유 때문입니다. 1) 본말이 전도(轉倒)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공 예배 설교를 통해 상당히 많은 시간과 횟수를 투자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강조하고 언급했습니다.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20세기 말까지 신앙적 교리에 대하여 철저하게 가르치고 강조함으로서 대단히 고무적인 교회의 외적 성장과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허나 반대로 그렇게 교리적인 무장을 강조하면서 같이 성장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 결과 예수 믿는 자로서 앎과 삶이 유리된 기독교인들은 사회에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독특한 교리적인 구별성 때문에 행위에 대한 무게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졌고 이런 일 때문에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삶 즉 행위를 소홀히 여김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 어떻게 하든 이런 비난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이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삶에 대하여 강조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저의 목양의 철학이나 성경적인 해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조가 크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교리적인 본질을 호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저에게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말씀드린 것처럼 지성적인 세속의 그룹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선포하셨던 가장 중요한 케리그마의 내용까지 포기하라는 세태이기에 이것은 막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우들과 함께 다시 한 번 기독교의 교리적 본질을 다루어야 하겠다는 각오가 저에게 임했습니다. 가장 좋은 공부는 로마서 공부이겠지만 시간적인 요구가 너무 광대해 질 것 같아 로마서의 요약본과 같은 갈라디아서를 택하기로 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표제는 기독교의 정본(正本)과 같은 핵심적인 가치요, 흔들릴 수 없는 케리그마의 요약입니다. 앞으로 이 정본과도 같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공부해 나아가려 합니다. 결코 이 은혜의 본말이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전도(轉倒)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 ‘은혜의 보편성’을 재조명하기 위함입니다. 앞으로 공부를 하겠지만 총 6장으로 이루어진 갈라디아서의 구도는 이런 그림을 갖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자격을 갖춘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행하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강요에 대하여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갈라디아서 3:28절을 읽겠습니다.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가 어떤 글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대표적인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었다고 추론되는 주후 53-55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로마의 황제 글라우디우스 통치를 받고 있었던 중남부 터키 지역이라는 지역적 배경을 전제할 때 혁명과도 같은 선언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말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구원을 받은 일체의 사람들에 대한 영적 정체성을 피력한 바울 사상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에서 인종적, 사회적, 성적 차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내포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로마인이라는 대표성이 시대를 주름잡던 때였습니다. 유대 종교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우월성이 종교적 권력을 휘두르던 때였습니다. 반면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신약학자들에 의하면 바울이 제 1차 전도여행을 통해 세운 교회들이 포진되어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 더베, 이고니아, 루스드라(행 13-14장 참고)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의 공동체 지체들이라고 동의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유대율법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던 자들에 의해 종교적 차별을 당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고, 더불어 로마인들에게는 인종적인 차별을 당하고 있었으며, 가부장적인 남성 권력적 구도에 있었던 탓에 성적 차별도 당하고 있었던 3중고의 피해자들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전제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내적 조건을 차치한 그 어떤 다른 것을 종용하거나 압박하는 일체의 것들을 배격하고 거부한다는 바울의 확신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옴을 갈라디아서가 제공합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공교회에 선언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보편적임을 강력하게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주후 381년에 만들어진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있습니다. 이 신조에는 저와 여러분이 주목해야 할 교회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이어야 한다.” 이 4가지의 교회에 대한 고백 중에서 갈라디아서는 세 번째 ‘보편적’이라는 고백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해주는 바울의 편지입니다. 교회는 특정적인 누구의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남녀노소의 교회가 되어야 하며, 빈부의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되며, 인종적, 계층적, 성적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교회는 ‘누구의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며, ‘누구나’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에 대한 고백과 신앙적 고백은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보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신학적 의미를 갈라디아서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앞으로 살피겠지만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은혜의 보편성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는 것은 비성서적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교단의 주장은 그것이 도리어 비성서적인 은혜의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백인과 흑인을 나누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나누고, 어린아이와 어른을 나누며, 경상도와 전라도를 나누고, 교단과 교단을 나누고, 박사 학위 소지자와 무학자를 나누고, 고용주와 피고용자를 나누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는 것은 교회에서 허용해서도 안 되며, 일체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는 이런 차별함은 그림자도 만들어서는 안 되는 아주 질 나쁜 행위입니다. 마태복음 21:14-16절을 봅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이 구절이 너무 신선하지 않습니까? 지금 읽은 이 본문의 정황이 무엇입니까? 성전 청결 사건이 무대입니다. 소위 고난주간이라고 말하는 월요일에 주님이 행하셨던 성전 정화 사건이 배경인 이 기사를 묵상하다보면 신선한 감동이 몰려옵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아이들을 보고 노하매” 맹인과 저는 자들은 유대 종교적인 체계 안에서 절대로 성전에 들어오면 안 되는 영작 금치산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정화되고 난 뒤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금기의 땅이었던 성전으로 이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신선한 은혜입니다. 아이들은 여성과 더불어 유대 율법적인 체계 안에서는 계수하지 않던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던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모습에 종교적인 기득권자들은 노를 발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뭐라 선포하셨습니까? 시편 8:2절을 인용하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주님은 지금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은혜는 ‘누구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의 것임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6) 율법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을 육체가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이 선언은 참 유명한 목사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저 또한 이 구절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허나 이 구절에 대하여 조금 더 해석의 외연을 확장한다면 이렇게 보폭을 넓일 수 있을 것입니다. 특정한 계층이나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공동체는 주님의 공동체나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해석으로 말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갈라디아서 공부는 ‘누구의 교회, 누구의 것’을 주장하는 패러다임을 ‘누구나’의 패러다임으로 바꾸는 신앙의 공부가 될 것입니다. 지난 주간 대학원 강의 시간에 발제를 맡은 그룹이 저에게 제출한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김병도 교수가 쓴 ‘도전력’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단 기독교적인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원들을 당황시킨 도전력은 프롤로그를 통해 불확실성의 시대를 무엇으로 돌파한 것인가에 대한 도전을 던지고 있다. 아이러니는 그것이 도전이라는 점이다. 에필로그를 통해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하므로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확인하고 개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이 아주 낯선 일에 뛰어들어 도전하고 실패하는 길 밖에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도전 정신이 사라져 버린 증거들을 제시하고 근본 원인들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도전 정신을 회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도전을 가로막는 몇 가지의 이유를 제시했는데 모두 동의하기 어려웠다. 이 책은 비기독교인의 책으로 경제학자인 그의 눈으로 대한민국을 읽고 있다.” 이 글에 대한 배경을 잠시 설명하자면 이 그룹이 맡은 발제의 테마는 ‘리더의 자질 중에 균형, 도전력, 독서’라는 것을 연구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발제물을 준비하라는 부담을 주면서 제가 도전력에 대한 참고 도서로 제시한 책이 김병도 교수가 쓴 ‘도전력’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숙제를 위해 이 책을 읽었는데 학생들이 적지 않게 당황하며 이의를 제기하면서 곤혹스러워했다는 보고를 발제물과 함께 클래스에서 전했습니다. “도대체 신학대학원 수업에 불신자가 쓴 책을 참고도서로 소개하는 게 제 정신이냐는 반론이었습니다.” 그래서 김병도 교수의 지론에 대하여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맺은 것입니다. 물론 저에게도 불만을 표출한 것입니다. 발표를 마치고 교수 코멘트를 하는 시간에 제가 발표한 그룹을 향하여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앞으로 믿는 사람하고만 놀고, 그들하고만 밥 먹고, 그들하고만 소꿉장난을 하라고.”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그래도 신학의 지평을 넓히는 가장 좋은 기회인데 이렇게 폐쇄적인 신학구조를 가지고 현장에 나갈 여러분들을 보면 한국 교회의 미래가 암담하다고.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신학적인 사고와 이해에 있어서 우물 안에 개구리가 되지 말고 보폭을 넓히라고. 요새형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입니까? 그 교회의 공동묘지에 남은 TO가 4개 밖에 없어서 새 신자가 들어오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교회입니다.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부터 갈라디아서를 주일마다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두 가지를 기대하며 나누기를 다시 한 번 교우들과 복기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흔드는 일에 요동하지 않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은혜의 보편성을 공유하는 기회가 갈라디아서 공부를 통해 획득되기를 기대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결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빼빼로 데이의 탄생은 결코 가벼운 놀이의 산물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하나의 상업적인 전술은 소비자의 심리를 철저히 공부한 결과 나타난 노력의 산물이었고 그 결과 매년 이 날이 되면 적지 않은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게 만들어주는 효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갈라디아서 공부를 통하여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영적 이윤을 창출하는 행복한 여행이자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