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진짜로 중요한 것2024-02-26 16:00
작성자 Level 10

2018년 11월 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본문스가랴 3:1-5

제목진짜로 중요한 것

 

서론)

 

20세기 불의 사자라고 불렸던 레오나드 레이븐힐이 쓴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에 나오는 글을 하나 소개하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A 교회 찬양 팀 순회공연 중’ 혹은 ‘B 신학대학교 찬양 팀 순회공연 중이라는 플랜카드를 붙이고 다니는 버스들은 많이 보이지만 ‘C 교회 순회 기도회라고 쓴 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p,134.)

레이븐힐이 이 글을 기록한 챕터가 이런 제목의 챕터였습니다.

제 12-사탄은 사교장처럼 된 교회를 결단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글을 남긴 레이븐힐은 당시 교권에 눈멀어 있었던 영국 교회를 향하여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오늘날 장로집사로 선출되는 사람들은 대개 사회에서 한 자리를 하는 사람들이다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장로와 집사로 선출되었다현재 직분을 맡기려고 할 때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사람들이 기도생활을 하는지 확인하는가내가 알기로는 대개 확인하지 않는다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사람을 뽑아놓고 주님이 복주시기를 바란다.”(p,132.)

레이븐힐이 말한 마지막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사람을 뽑아놓고 주님이 복주시기를 바란다.”

우리 세인교회도 결코 예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레이븐힐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이든 토저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레이븐힐의 메시지를 들으면 그에 대한 맹렬한 적대자가 되든지열렬한 지지자가 되든지 하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다.”

레이븐힐과 동시대에 영국에 살고 있었던 영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그의 열렬한 적대자가 많았다는 것을 교회사가 알려줍니다.

무엇을 반증합니까?

적어도 레이븐힐이 활동했던 20세기 영국은 그만큼 싸늘하게 영적으로 죽어 있었다는 것을 방중하고 있는 것인데 정말로 유감스럽게도 그 썩어 있고 죽어 있던 거점이 영국 사회가 아니라 영국 교회였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라는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영국교회가 망각한 대가는 지금 영국은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 선교를 당해야 하는 비참한 영적 늪지대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헌데 이런 진단이 어찌 영국 교회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내 조국교회는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귀하게 여기는 제 일순위에 대하여 견고합니까?

지난 주간에 한 일간신문에 기고된 글을 읽다가 너무나 수치스러워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며칠을 보냈습니다.

경향신문에 매일 마다 외고로 기사화되는 내 인생의 책에 글을 기고한 한 전문 번역가의 글 때문이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한 동안 교회를 나가던 자였는데 보란 듯이 교회를 박차게 나간 뒤의 소회를 일반 독자들에게 포플리즘 성격으로 선동하는 듯한 글을 읽고 나서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그의 글 중에 일부를 소개합니다.

나도 대학원 때 과학사·과학철학 수업에서 이 글(칼 포퍼의 추측과 논박’)을 접했다그런데 엉뚱하게도 그 덕에 한동안 안 다니던 교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애초에 내가 기독교를 등진 이유는 불가지론 때문이었다평생 열심히 교회에 다녔는데 막상 죽고 보니 천국도 지옥도 없다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그때 가서는 허망함을 느낄 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물론 교회에 나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것 말고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중략성경에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하지만나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명제를 포기하고서 자유를 얻었다.” (경향신문 10월 29일자 내 인생의 책에서)

이 글을 접하고 난 뒤에 저는 마치 강아지 똥’ 으로 유명세를 탄 신실한 크리스천 동화 작가인 권정생 선생이 미국의 부시 정권이 이라크에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할 때 아무 것도 모르고 죽어가야 했던 바그다드의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열이 40도에 육박했고 맥박도 심각하게 뛰었다던 바로 그 심정으로 저도 열이 올랐습니다나를 이렇게 수모로 치떨게 만들었던 이유는 그가 말한 마지막 바로 이 문구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명제를 포기하고서 자유를 얻었다.”

너무나도 그럴듯해 보이는 이 외마디는 무신론자들이나 반기독교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는 자들을 흥분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외침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저 같은 목사에게는 이 발언이 얼마나 인기영합주의적인 발언이며 선동 질인지를 고발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그의 독설은 부분은 맞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전부를 왜곡한 꼴이 된 건방진 발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상적인 교회에서 정상적인 목회를 하는 목사라면 절대로 성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성도들을 평생 동안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학적인 명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권이나 조직이나 공동체적인 유기적 집단은 절대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한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까지 매도하면 마땅히 거부하고 투쟁해야 합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독교가 선택한 예수가 진리가 아니라는 공격입니다.

이 공격을 받아들이라고 하면 목숨 걸고 싸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역자가 말한 나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명제를 포기하고서 자유를 얻었다.”는 이 발언의 진의가 기독교라는 가시적 집단을 향한 공격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만에 하나 예수를 포기했더니 진짜로 자유하게 되었다는 논리라면 그는 같이 갈 수 있는 자가 아닐뿐더러 그는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공격을 당하게 된 어처구니없는 현 상태에서 대하여 자업자득의 책임이 있기에 너무나 가슴 쓰리고 아프지만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진리이심을 포기하라는 식의 세속적 공격을 무방비로 당할 수만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우들과 진짜로 중요한 것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해석하면서 은혜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이 설교 제목을 설정한 것은 수치 당함을 이제는 그만 당하자는 절절함 때문입니다.

본문은 적어도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방법을 제시할 것 같기에 본문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했습니다.

본론)

 

오늘 우리 교우들과 읽은 스가랴 3장은 스가랴가 본 8가지의 환상 중에 네 번째에 해당 되는 환상을 기록한 기사입니다.

기사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스가랴가 보고 있는 4번째 환상의 배경은 하늘 법정입니다.

그 하늘 법정에서 재판이 열리고 있습니다.

피고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변호사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검사는 사탄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일지는 이렇습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였던 본문 3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아 구절에서 '더러운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입니다.

'라는 이 히브리어는 원래 '오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의미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많은 구약학자들의 이견이 팽배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주류를 이루고 있는 주장 두 가지만 소개를 합니다.

①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여호수아의 개별적인 죄를 상징한다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으로 있었던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었던 윤리적이나 혹은 개인적인 범죄를 나타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② 여호수아 개인의 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조상들의 죄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조가 지은 죄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1:6절을 보면 느헤미야의 간절한 회개 기도가 있습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 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 하여"

바로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를 한 것 같은 열조의 죄를 상징적으로 말한다는 성경해석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슬픈 노래인 애가 서에서 남 왕국 유다의 멸망 원인을 이렇게 눈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4:11-13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도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의 모든 왕들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이렇게 예언자와 느헤미야가 말했던 열조의 죄를 짊어지고 있는 상징으로 여호수아는 지금 더러운 옷을 입은 자가 되어 지금 하늘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후자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지금 하늘 법정에서 서슬이 시퍼런 재판이 열리고 있습니다.

피고 여호수아는 죄인의 상징으로 더러운 옷을 입고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검사의 역할을 하는 사탄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사탄의 의지는 매우 강력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떤 대목에서 입니까?
그의 자리에서 이 대목이 감지가 됩니다.

1절을 다시 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원래 하나님의 우편 보좌인 오른 쪽은 주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사탄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주님이 힘이 없이 그 자리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사탄이 여호수아를 정죄하겠다는 의지가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래 힐난하는 대명사인 사탄참소하는 자의 상징인 사탄이 얼마나 여호수아를 공격했을지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지만 감동 그 자체입니다.

2절을 곱씹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공격하고 있는 사탄에게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제일 먼저 하신 것이 사탄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런 뒤에 여호수아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이렇게 부르신 것은 정말로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가 정말로 그렇게 ''를 입고 있는 오물덩어리의 존재라고 보시지 않고 뜨거운 불길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은 존재라고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포로기 후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스가랴 시대에 바벨론 포로 이후 바사에 의해 지속적으로 짓눌려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에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잊지 않고 핍박과 고난을 겪어내 영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상징으로 여호수아를 인정하신다는 하나님의 신원보증 도장 찍기 선언이 바로 2절입니다.

사탄은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은 제사장이기에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심판과 징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반대로 여호수아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해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 쳐주시는 상반된 의미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인정하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두 번째로 여호수아에게 반응을 하시는 장면이 본문 4-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① 여호수아가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②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 입히셨습니다.

③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습니다.

졸지에 여호수아는 신분의 변화를 얻게 되었고 죄를 용서함 받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재판에서 이겼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가랴 예언서에 기록된 이상의 본문 줄거리를 통하여 어떤 감동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무엇이 중요한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 주님의 옳으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이면 입어야 하는 옷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흉패가 새겨진 에봇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제사장이 아닌 대제사장의 신분을 갖고 있었던 여호수아는 오물찌꺼기로 뒤범벅인 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보더라도 여호수아는 죄인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러기에 사탄은 그를 힐난할 수 있는 분명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탄에 의해서 심각한 심판의 판결을 받아도 어찌할 없는 연약한 상태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그를 누가 건져주셨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탄의 고소에서 건져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타나가 남은 검게 그을린 나무라고 인정해주셨습니다.

그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시련을 견디다가 얻은 상처라고 위로를 해 주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추한 옷을 입고 움츠려 있는 그에게 더러운 옷을 벗겨 주시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는 왕만이 쓸 수 있는 정결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당신이 인정한 새로운 제사장으로 인 치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비극이 무엇일까요?

주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영적 결여 현상입니다.

해서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주님이 나를 아시는 것으로 도무지 성차지 않아 하는 허함의 상태가 오늘 세상의 사람들은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최고의 위기요비극입니다.

요한복음 6:7절을 읽겠습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벳세다에 모여 있는 약 20,000명 정도로 추산되는 무리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빌립이 반응한 반응입니다.

200 데나리온의 물질이 있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의 허기를 채우지 못한다는 빌립의 객설이었습니다.

빌립의 계산이 맞습니까틀립니까?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정답입니다.

그런데 틀렸습니다.

빌립은 200 데나리온의 정답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라는 정답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200데나리온을 채우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신앙인도 이 목숨 걸기에는 예외가 없다는 점입니다.

떡을 추구하는 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예수님을 추구하는 것에는 건성이라는 점입니다.

정말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옳으신 주님으로 우리들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힐난하는 사탄의 정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탄의 방법은 그랬으니 말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중요했던 것은 주님이 여호수아를 옳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옳다고 인정하셨다면 옳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옳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너를 참소하는 사탄의 공격은 옳지 않고 내가 인정하는 옳음이 옳음이라는 것입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을 통해 배우는 교훈은 주님의 옳으심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리스도인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복음성가 가수인 조수아 자매가 부른 찬양 곡 중에 내가 너희를’ 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곡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유는 너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유는 나로 인함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유는 너희의 모습 때문이 아니요

너희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함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유는 너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유는 나로 인함이라

나로 인함이라 사랑을 인함이라

 

바울은 로마서 5:6-8절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런데 어찌 주님이 옳지 않겠습니까?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제 오늘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예를 다시 들추어 마무리하면서 제 설교도 마치려고 합니다.

만에 하나 기독교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말장난이었다면 나는 기독교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주장하는 종교는 기독교 말고도 수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기독교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지 않고 주군이신 예수가 진리라는 명제를 믿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이 옳으신 분이시라는 진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세인지체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이 옳다는 것(진리라는 것)입니다.

이 명제가 우리 교우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복음의 정수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유는 너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유는 나로 인함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유는 너희의 모습 때문이 아니요

너희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함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유는 너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유는 나로 인함이라

나로 인함이라 사랑을 인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