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럴 수 있다면
본문: 사도행전 24:1-9 서론) 몇 주 전에 이제면 안수집사께서 제게 이런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돼지 콜레라의 일종인 돼지 전염병이 근처인 중국에 상륙했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돼지들에게는 흑사병과 같은 치명적인 바이러스이기에 한국에 상륙하면 백신이 없는 상태이기에 돼지들 모두가 몰살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기도 부탁을 드립니다.” 해서 그 이후 중보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지구상에서 변이되어 창궐하고 있는 각종 바이러스의 발생 속도에 비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학적인 능력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 향후 이런 추세로 나가면 어떤 경우에 인간은 바이러스에게 함락되어 멸망을 당할지 모른다는 우울한 전망까지 난무한 상태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 지상을 통해 본 오프라인 뉴스 중에서 북극권에 빙하기시기에 냉동되어 매몰된 인간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지구 온난화로 인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가능성까지 대두된다는 불길한 소식까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련의 소식들은 그 어느 것 하나도 가짜 뉴스가 아닌 실제로 우리 인간을 공격할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위협적인 요소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21세기 최고의 위협은 각종 질병 바이러스입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결정적인 치명타를 날릴 수 있는 바이러스가 무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면 그래도 가시적인 것이기에 대처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만들 수 있으련만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기에 더욱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전염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 바이러스라는 의미의 단어를 반대로 대단히 도전적이고 긍정적으로 표현한 본문에 기록된 누가의 보고를 우리 교우들과 함께 나누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느껴야 하고 간직해야 하는 은혜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본론) 바울은 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이방 교회의 형제들의 사랑이 담긴 구제헌금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모험이라 말씀드린 이유는 예루살렘에는 바울이 유대교 신앙을 버리고 예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자로 변질된 것에 분노하여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먹지도 않겠다고 결의했던 바울 살해 결사대원 40명이 기다리고 있었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의 집단적인 고소로 인해 사도행전 23장에서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막강한 유대 종교적인 힘을 갖고 있었던 산헤드린 공회로 끌려가 종교 재판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가야바의 법정으로 끌려가신 것처럼 심문을 당하면서 바울도 마땅히 죽어야 하는 자로 종교 재판의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태어난 자였기에 유대인들의 직접적인 살해위협에서 벗어나 이스라엘 지역에서 로마인들을 구금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가이사랴에 있었던 총독 관저의 사설 감옥으로 우여곡절 끝에 옮겨져서 그곳에서 2년이라는 세월동안 구금 생활을 하게 됩니다. 나름 로마로 빨라 넘어가고 싶었던 바울이었지만 유대인들의 방해와 같이 상황이 녹록하지 않아 그곳에서 묶여 있으면서 이모저모의 심문을 받아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 24장은 바로 그 장소였던 벨릭스 총독의 관저 감옥에서 벌어진 유대인 고소자와 벨릭스 총독의 관리들과 바울 사이에 일어난 재판 과정의 한 단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던 바울과는 상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로마의 법통이었던 변호사 더둘로를 대동하고 가이사랴까지 와서 바울을 고소한 뒤에 모사꾼이었던 더둘로가 벨릭스 총독에게 언급하고 있는 고소 내용을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우리에게 그 정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더둘로는 로마인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던 바울을 고소하는데 최적임자였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유대 종교의 금권을 가지고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 제사장 그룹은 그를 돈으로 매수하여 바울을 죽이는 데에 앞장을 서게 하는 비열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음을 본문에서 누가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뇌물에 매수된 상업적인 변사인 더둘로는 바울을 다음의 이유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본문 5-6절을 주목합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더둘로가 말하는 바울의 죄목이 무엇이었습니까? ① 전염병 같은 자. ②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는 자. ③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 ④ 성전을 더럽히는 자. 이렇게 4가지의 죄목을 들어서 바울을 고소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목해야 하는 내용은 첫 번째입니다. 전염병 같은 자라는 죄목입니다. 오늘 개역개정판 본문에서는 '전염병'이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지만 우리가 먼저 보던 개역 판에서는 '염병'이라고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전염병으로 번역한 헬라어 ‘로이모스’ 는 흑사병과도 같은 악성 바이러스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마치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의 바이러스와 같은 영향을 주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염병과도 같은 부정적인 자가 바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아주 위험천만의 인물로 바울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 새벽에 교우들과 함께 통독한 본문 5-6절을 읽다가 묘한 느낌이 저에게 들었습니다. 어떤 느낌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더둘로가 덮어씌운 죄목이 정답이라는 묘한 생각이었습니다. 왜요? 더둘로가 바울을 공격했던 악질적인 누명 씌우기의 메시지가 바울에게 너무나도 걸 맞는 바울의 신앙적 정체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전염병과 같은 존재가 맞습니다. 그가 발걸음을 옮겼던 일체의 지역에는 바울로 인해 예수라는 복음의 균이 매우 맹렬하게 그리고 빠르게 급한 속도로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한 예수의 바이러스는 개인의 육체를 완전히 사로잡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람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을 복음으로 초토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대변하던 더둘로가 인식한 전염병과 같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바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 정도로 세상이 두려워하였을까요? 1) 그는 오직 예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집중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에 집중한 것이었습니다. 더둘로를 대변인으로 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은 바울이 범죄자라는 우격다짐이었습니다. 이렇게 공격을 당하는 바을에게 벨릭스 총독은 항변하라는 기회를 줍니다. 그 기회를 받아 바울은 오늘 본문이 이어지는 10-21절에서 본인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변증을 이어나갑니다. 그 내용을 축약하면 이렇습니다. ① 나는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온 지 12일 밖에 되지 않았다. (11절) ② 그러므로 누구를 선동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12-13절) ③ 내가 예루살렘에 온 것은 내 사랑하는 형제 교회에 구제비를 전달하기 위해 온 것이다.(17-18절) ④ 동시에 나는 나를 고소한 사람들이 믿는 조상의 하나님, 율법서와 예언서도 다 믿는 자다. (14절)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는 유대인들을 소동하게 하기 위해 온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 말대로 성전을 더럽히려는 것은 더 더욱 말도 안 된다는 지론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면서 유대인들이 없는 한 가지, 그것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24:21절을 읽겠습니다. 주목하시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그렇습니다. 아무리 고소한 자들의 비난과 반대와 서슬이 시퍼런 공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본질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가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믿음은 포기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부활 사건이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이 구절을 ‘메시지’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저들이 나에게 대하여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내가 의회에서 외친 ‘내가 부활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 이 한 문장뿐입니다. 이게 어찌 형사 사건의 근거가 된다고 보십니까?” 저는 누가가 보고한 사도행전 24:21절을 대단히 큰 감동으로 읽습니다. 더둘로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바울이 아니라, 바울이 전하고 있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셨기에 가능했던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 부활의 신앙, 부활의 복음, 이것은 오늘 우리 세인교회의 지체들이 501주년 종교개혁주일 아침에 결심하고 또 결단해야 할 은혜와 결단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면서 정말로 두렵고 또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의 성장, 교회에 몰려드는 많은 성도들의 숫자, 교회가 그로 인하여 정치적인 집단이 되어 세상보다 더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가 복음의 본질에서 비껴가지 않고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하여 세속적인 일체의 사탄적인 내용들을 초토화시킬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를 죽게 했던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던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었던 바울의 그 예수의 주되심의 선포와 신앙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강해를 통해 이 강력했던 메시지에 아멘 했던 적이 있습니다. 1: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누가 예수의 사람입니까?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이루신 예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누가 세상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위력적인 자입니까?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과 이적에 열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 분에게 열광하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수많은 사람들의 구원자이신 것에 감격해 하는 자가 아니라 그 분이 바로 나의 인격적인 구주라는 사실에 눈물겨워 하는 자입니다. 주님을 내가 알고 그 분을 믿고 선택하고 그를 따랐다고 말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먼저 아셔서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고, 마치 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나를 오늘도 인격적으로 사랑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이렇게 인식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빌립보서 1: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은혜에 묻혀 사는 자를 세상은 두려워합니다. 이 믿음 위에 서 있는 자를 사탄의 일체 세력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럴 수 있는 자들입니까? 세인 지체들은 이런 복음의 균을 강력하게 전염하는 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시대의 흐름과 타협하지 않았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더둘로가 고소한 내용 중에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본문 5절을 다시 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유대인을 소요하게 하는 자’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헬라어 단어 ‘스타시스’는 반란을 일으키게 한다는 원래의 뜻이 강하지만 어떤 특정한 곳에서는 이렇게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뜻을 갖고 세우게 하다,” 이 뜻으로 바울에 대한 스토리를 적용한다면 더둘로는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바울을 공격한 것입니다. “바울, 이놈은 도대체 시대가 흐르고 있는 대세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고 자꾸만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는 자야, 거꾸로!” 잘 사유해 보십시다. 더둘로가 이렇게 바울을 공격했다면 우리는 역발상의 은혜를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바울은 정말로 그리스도인으로 세속적인 흐름에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주님이 걸으셨던 길을 잘 달려갔던 신앙의 선배였다는 은혜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받게 됩니다. 세상이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자들은 시대에 순응하며 타협하면서 같이 가는 명목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교훈입니다. 반면 세상이 두려워하는 자들은 작금의 비성서적이고 반 그리스도적인 일체의 것들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우리 인도 사람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이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진실이고, 그 다음은 비폭력이며, 마지막으로는 절제이다.”(p,436) 한 10년 전에 읽었던 칼린디가 쓴 ‘비노바 바베’에 나오는 글입니다. 철저한 힌두교 신자이자 지도자인 비노바 바베는 본인이 이야기한 이 세 가지 원칙을 평생토록 지키며 살았던 간디와 쌍벽을 이룰 만큼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받으며 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자입니다. 제가 비노바 바베를 기억하는 이유는 이런 기막힌 이유 때문입니다. 비노바 바베는 힌두교도입니다. 당시 인도를 짓누르고 있던 지배 계급은 기독교국가인 대영제국이었습니다. 상당한 아이러니이지만 주군이셨던 예수의 정신을 깔아뭉개고 도리어 인도를 침탈하여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무늬만 그리스도 정신으로 무장한 채로 철저한 세속적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라 영국은 타종교의 주군인 예수의 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하여 진실과 비폭력과 절제로 싸우고 있는 힌두교도들의 정신적인 기둥들이었던 간디와 비노바 바베를 두려워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누구를 두려워합니까? 세속적인 가치로 무장한 속옷을 입고 무늬만 그리스도인의 겉옷을 입은 자들이 겉은 이방인이지만 예수의 정신이라는 속옷을 입고 있는 진짜 그리스도인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자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우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충격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셨던 길과 방법은 세상이 추구하는 방법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에 하나 내가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걸으려면 반드시 대중적인 인기몰이가 있는 길과는 정 반대의 길로 역행해야 합니다. 이 길 가가는 무척이나 고독하고 힘이 든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 길이 아니라 너무나도 적은 사람들이 간 길이기에 척박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흐름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든 일인지 저는 지난 10여 동안 더욱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버틴 이유는 주님을 목적했기 때문입니다. 작가로 살고 있는 유시민씨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이렇게 피력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달콤 살벌’한 것은 신념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저마다 옳다고 믿는 삶의 원칙이 있다. 그것을 모두 합쳐서 신념이라고 하자. 나름의 신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목표와 방법을 설정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행위의 준칙을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신념의 역할은 인생의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신념은 때론 그 삶의 자체가 된다. 사람은 신념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신념은 단지 머리에 든 생각에 머무르지 않는다.” (p,267) 저는 작가의 글을 읽다가 무신론자인 작가이기에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겠다고 동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인 유시민씨와 목회를 하는 신앙인인 제가 다른 점은 바로 단어 하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말한 신념이라는 단어를 저는 신앙이라는 단어로 대체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념은 인간이 인간을 향한 생각의 총체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이 주군을 행한 생각의 총체입니다. 그러기에 신념에 대한 시작과 끝에 관한 모든 주체가 인간이지만 신앙에 대한 일체의 시작과 끝의 주체가 주군이신 분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 차이가 그와 내가 다른 점입니다. 만에 하나 당신이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셨던 생각, 그리고 마치게 하실 끝의 길에서 걷기를 원하는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신념이 아닌 신앙인으로 택해야 하는 주군이 원하셨던 신앙의 길에 서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길을 택한 자는 바울처럼 세상이 두려워하는 전염병과 같은 예수의 사람으로 선한 영향력을 제시하는 승리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한 곡 듣고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너의 어둠을 밝혀줄 수 있다면 빛 하나 가진 작은 별이 되어도 좋겠네 너 가는 길마다 함께 다니며 너의 길을 비추겠네 내가 너의 아픔을 만져줄 수 있다면 이름 없는 들의 꽃이 되어도 좋겠네 음 눈물이 고운 너의 눈 속에 슬픈 춤으로 흔들리겠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내 가난한 살과 영혼을 모두 주고 싶네 내가 너의 사랑이 될 수 있다면 이름 없는 한 마리 새가 되어도 좋겠네 너의 새벽을 날아다니며 내 가진 시를 들려주겠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이토록 더운 사랑 하나로 네 가슴에 묻히고 싶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내 삶의 끝자리에 묻히고 싶네 내 사람이여 내 사람이여 너무 멀리 서있는 내 사람이여 고 김광석 씨가 부른 ‘내 사람이여!’라는 노래입니다. 분명히 이 노래는 대중들에게 불리는 노래인데 저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마치 복음성가 노랫말처럼 들렸습니다. 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그 절절한 노랫말이 마치 예수께서 나를 위해 행하셨던 일체의 사랑의 행위들로 반사되어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제천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균으로 세상을 역행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천로역정을 행하는 순례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너무 멀리서 있지 않은 주님의 살과 영혼을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