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독서 목록과 총평 1월 1) 한나 아렌트, “발터 벤야민”, 필로소픽, 이성민역, 2020년. 2) 박준, “계절 산문”, 달 출판사, 2021년. 3)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도서출판 난다, 2021년. 4)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이 만드는가?”, 허택 역, 느린 걸음, 2019년. 5) 김기현외, “내 인생의 한 구절”, 잉클링즈, 2021년. 6) 박동현, “하박국 다시 읽기”, 대한기독교서회, 2013년. 7) 김기석, “하늘에 닿은 사랑”, 꽃자리, 2022년. 8) 어멘다 고먼, “the hill we climb”, 정은귀역, 은행나무, 2021. 2월 9) 박찬웅, “연세신학 100주년 기념 성경주석-히브리서”, 대한기독교서회, 2014년. 10) 톤 막,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너에게”, 나무말미, 2021년. 11) 채운, “호모 아르텍스”, 그린비, 2009년. 12) 존 스토트,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IVP, 2015년. 13) 존 스토트, “온전한 그리스도인”, IVP, 2014년. 14) 유안진외 29인,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 문학사상사, 2009년. 15) 나사렛편집부, “은혜의 여정”, 도서출판 나사렛, 2022년. 16) 서성환, “꿈을 캐내어라”, 예영시선, 2006년. 17) 조엘 비키, “깊이 읽는 시편 23편”, 생명의 말씀사, 2000년. 3월 18) 이어령, “메멘토 모리”, 열림원, 2022년 19) 이어령,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열림원, 2021년 20) 한희철, “하루 한 생각”, 꽃자리, 2021년. 21) 이어령,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열림원, 2021년 22) 호영송, “이어령 평전”, 문학세계사, 2013년. 23) 강대석, “김남주 평전”, 시대의 창, 2017년. 24) 레베카 피펏, “토마토와 빨간 사과”, 사랑플러스, 2006년. 25) 칼 헨리외 2명, “The Genesis Debate”, IVP, 2020년.
4월 26) 전성민, “사사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선교회, 2015년. 27) 김기현, “욥, 까닭을 묻다.”, 두란노, 2022년. 28) 임택, “마을버스, 세계를 가다”, 메디치, 2008년. 29) 석용욱, “러브캔버스”, GTM, 2009년. 30) 백소영,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해”, 대한기독교서회, 2005년. 31) 김기석, “사랑의 느림에 기대어”, 비아토르, 2022년. 32)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정현숙역, 복 있는 사람, 2021년. 5월 33) 차준희, “성도가 묻고 성경이 답하다”,CUP, 2022년. 34) 데이비드 M. 카, “거룩한 회복탄력성-트라우마로 읽는 성경”, 차준희역, 감은사, 2022년. 35)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창비, 2021년. 36) 나희덕, “어두워진다는 것”, 창비, 2022년. 37) 허은실외 15인 공저, “영롱보다 몽롱”, 2022년. 38) 한희철, “지킴 20/버림 20”, 겨자나무, 2021년. 39)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 2020년. 6월 40) 김훈, “저만치 혼자서”, 문학동네, 2022년. 41) 나태주,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2022년. 42) 한병수, “사사기에 반하다”, 다함, 2022년. 43) 고은 외 68인,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실천문학사, 2017년. 44) 한희철, “여기에 물이 있다”, 꽃자리, 2022년. 45) 나희덕, “그녀에게”, 예경, 2018년. 46) 나희덕, “야생사과”, 창비, 2020년. 7월 47) 셰인 오마라, “걷기의 세계”, 구희성역, 미래의 창, 2022년. 48) 김은혜,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글 ego, 2022년. 49) 이정일,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예책, 2022년. 50) 정용섭, “마가복음을 읽는다(1)”, 홍성사, 2022년. 51) 정용섭, “마가복음을 읽는다.(2)”, 홍성사, 2019년. 8월 52) 정용섭, “목사 구원”, 새물결플러스, 2020년. 53) 헨리 먀시, “참 괜찮은 죽음”, 김미선역, 더 퀘스트, 2022년. 54) 유시민, “유럽 도시 기행 2”, 생각의 길, 2022년 55) 오택현, “창세기-연세신학 100주년 기념 주석”, 2013년. 56) 한동구, “창세기의 신앙과 신학”, 프리칭아카데미, 2010년. 57) 옥한흠, “일상을 말하다”, 하온출판사, 2021년. 58) 강산, “누가복음-풀어 쓴 성경”, 하온출판사, 2022년. 59) 옥한흠, “옥한흠 목사가 목사에게(1)”, 하온출판사, 2021년. 60) 옥한흠, “옥한흠 목사가 목사에게(2)”, 하온출판사, 2021년. 9월 61) 김훈, “강산무진”, 문학동네, 2022년. 62) 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2021년. 63) 김훈, “하얼빈”, 문학동네, 2022년. 64) 김영하, “작별인사”, 복복서가, 2022년. 65) 유요한, “계약 백성답게 살아가라”, 동연, 2022년. 66) 유요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 동연, 2022년. 67) 김홍규, “구약의 유다 마지막 역사”, 영문, 2021년. 68) 한희철, “여기에 물이 있다.(2)”, 꽃자리, 2022년. 10월 69) 레스터 L, 그레비, “제 2 성전기 유대교”, 이유미역, 컨콜디아사, 2017년. 70) 김사무엘, “에스라, 느헤미야 혼합 결혼 파기에 관한 연구”, 토브북스, 2021년. 71) 목회와 신학 엮, “에스라, 느헤미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아카데미, 2012년. 72) H.G.M 윌리암슨, “에스라, 느헤미야 개론”, 민경진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년. 73) 존 A. 마틴, 진 게츠 공저, “BKC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주석”, 이종록역, 두란노, 2017년. 74) 김근주,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기 : 에스라기, 느헤미야기, 에스더기”, 교양인을 위한 성경, 2022년. 75) 차준희, “시인의 영성 Ⅱ”, 새물결플러스, 2022년 11월 76) 박노해, “팜플렛-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느린걸음, 2007년. 77)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창비, 2016년. 78) 김경수, “돌봄 기도”, 누가, 2007년 79) 마크 맥민, “심리학, 신학, 영성이 하나 된 기독교 상담”, 두란노, 2001년 80) 김판임, “워킹 위드 지저스”, 동연, 2022년. 81) 김판임, “천재 예수, 그 생각을 탐하다”, 동연, 2022년. 82) 현용수, “잃어버린 지상 명령 쉐마(1)”, 쉐마,2007년 83) 현용수, “2007년어버린 지상 명령 쉐마(2)”,쉐마, 2007년 12월 84) 한병철, “사물의 소멸”, 김영사, 2022년. 85) 김영봉, “그 사람, 모세”, 복 있는 사람, 2021년 86) 유성은, “목회자의 리더십과 시간관리”, 평단, 2006년. 87) 유진 피터슨, “잘 산다는 것”, 복 있는 사람, 2022년. 88) 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2”, 킹덤북스, 2017년. 2022년 독서 총평 독서마저 할 수 없었다면 2022년을 정말 어떻게 버텼을까! 곰비임비 주어진 책읽기가 있었기에 2022년을 살아낼 수 있었다. 상투적 방어논리의 표현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펜데믹 3년차는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그래도 내게는 책 읽기라는 버팀목이 있었다. 매년 계획한 목표에는 한참 미흡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감사하다. 1월을 시작하면서 만난 박준의 ‘계절 산문’은 무겁지는 않았지만 애틋했다. 뭐랄까, 코로나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는 2022년에 읽기 딱 안성맞춤식의 책이라고 할까 싶을 정도로 나를 흔들어 놓았다. “사찰에서든 교회에서든 성당에서든, 제가 비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저는 아무 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빕니다.” (p,154) 2018년에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을 읽고 책 후면에 이렇게 사족을 써놓았다. “이상하게 어두웠다. 칙칙했다고 할까, 그런데 위로가 된다. 왜일까? 내 삶과 닮아서일까? 아니다. 이제는 밝은 것만 아름답게 보이는 나이가 되어 그런 것 같다. 웃프지만 행복했다.” 참 이상하다. 4년 뒤에 읽은 ‘계절 산문’에서도 똑같은 소회를 느꼈으니 말이다. 2월, 그림책 하나를 너무 가볍게 만났다. 비주얼 아티스트 작가인 톤 막의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너에게’는 시끄럽게 복잡한 오늘,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주인공 거북이가 말한다. “혼자 있는 시간은 나를 잠시 멈추게 하고 지친 나를 원래대로 회복시켜 줘. 마음이 평온해 지고, 지금 있는 걸 생생하게 느껴. 나는 바깥 세계의 소란스러움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해. 빠져 나가야 해.”(pp,63-64) 2022년 초에 이 글을 만났기에 다행이다. 한 해를 뒤돌아보니 이 글말 때문에 더 분주하고,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갈 위험을 막아주었으니 말이다. 너무 얇은 그림책이라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웬 걸, 내게는 2022년을 살아낼 위로를 준 선생님이었다. 3월은 왠지 모르게 이어령 선생의 글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달이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읽는 책은 어렵다고 눈길도 주지 않던 아내가 어쩐 일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달라고 했다. 아주 오래전, 미치 앨봄이 루게릭으로 죽음을 앞둔 스승인 모리 슈워츠와의 몇 개월간의 수기를 기록한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만났던 그런 툴로 만든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엄숙했고 진지했다. “인간은 지혜를 아는 죽는 자야. 그래서 슬픈 거라네.” (p,295)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이 남긴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슬픔도 극복하는 만물의 영장이 아닐까! 그의 지성과 영성이 오롯이 3월 한 달 나를 강타했다. 4월은 네 번째 출간을 위해 박차를 가할 때였다. 기막히게도 결국 그 출판사는 저자인 내게 수많은 상처를 남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관계가 되었지만, 분명한 것은 4번째 책은 이전 3권의 책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두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하도록 한 효자다. 이 공부에 탁월한 선생님 역할을 한 책인 전성민 교수의 ‘사사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만났다. 상당한 고무적인 감동은 건조할 수 있는 성서신학자의 사사기 갈무리들을 읽다가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는 데에 있었다. 분명 이 책을 절친 교수의 소개로 만났는데, 책을 만나기 이전에 내 4번째 글의 초고를 완성하고 비교해 보니, 전 교수의 사사기에 관한 논지가 마치 베껴 놓은 듯한 유사성으로 사사들의 면면을 비평적으로 성찰했다는 감동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5번째 책인 신-사사시대에 읽어야할 사사기(2)를 출간할 때는 전 교수에게 추천의 글을 부탁하리라는 용감함이 생겼다. 5월은 친구의 책과 여행했다. 항상 책을 보내주면서 숙제를 요구한 친구에게 나는 거의 노예다. 숙제를 하지 않으면 후한이 두려워 제일 먼저 숙제부터 낸다. 친구의 책은 목욕탕에서 반신욕을 하면서 읽은 책이다. ‘성도가 묻고 성경이 답하다’를 가볍게 생각해서 목욕탕에서 읽은 책이 아니라 친구가 출간했던 책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냄새(학자 냄새가 아니라)가 나는 良書라서 기쁘게 읽었다. 성도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일련의 일들을 따뜻하게 풀어준 책이기에 나도 가끔 교우들에게 친구의 말을 내 말처럼 전하는 수지맞는 장사를 한 수작이다. 저자에게는 저작권을 주지 않아 미안하지만, 그래도 친군데 이해하리라 믿는다. (ㅎㅎ) 6월은 김훈과의 데이트가 압권이었다. 옴니버스 형식의 단편 소설의 마지막 단편인 ‘도라지 수녀원’에 담긴 촌철살인이다.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지향성이다.” (223) 신학의 내용은 이렇지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신학적 정의처럼 멋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평생을 수도자로 살아온 성직자라고 하더라고 매일반이다. 그래서 종교는 어찌 보면 가장 외로운 場이 아닐까 싶다. 30년 이상을 목사로 살아온 나는 근래 더 고독함을 느낀다. 신앙과 삶의 괴리를 좁히는 것이 나의 남아 있는 여생의 미션이 될 것 같다. 7월은 몸이 많이 아팠다. 해서 독서의 분량을 채우지 못했다. 이제 육체가 도움을 주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한 7월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만난 책도 아픈 책이었다. 한의사 작가인 김은혜의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는 말기 암 환자들의 마지막 투병 일기를 편집한 책이다. 읽다가 많은 생각이 스쳤다. 나이가 든다는 것의 슬픔은 육체가 아프다는 것인데, 생각보다 젊은 나이에도 아픔을 당한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 동시에 그 아픔을 극복하는 것에 인간은 철저하게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 그런데도 기고만장한 인간의 자화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만감이 교차했다. 더불어 옆에 있는 자들의 고통은 죽는 자의 고통 못지않은 동굴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 절절하게 다가온 책이었다. 인간이 ‘에노스’임을 알았을 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창세기 기자의 한 줄이 얼마나 의미 있는 구절인지를 모두가 알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8월은 ‘목사 구원’을 늦깎이로 섭렵한 달이다. 저자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한 것을 알기에 나 또한 비평적 읽기에 게으르지 않으려고 신학교를 다니는 학생의 자세로 읽었다. 책을 열자마자 저자의 일갈이 눈에 띠었다. “한국교회는 목사가 삶의 본질과 근원에 대해 모르는 게 오히려 목사 노릇하기에 더 좋은 토양이다. 교인들 대부분은 세상살이에 지쳐 있기에 교회에 나와도 단순하고 매혹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종교적 위로만 받고 싶어 한다, 목사가 그런 종교 심리를 잘 이용하면 목회에 성공할 수 있겠으나 목사 자신은 시나브로 시든다.” (p,36) 정 목사의 이 글은 작심한 발언이자, 또 한편으로 보면 목사들에게는 치욕적인 발언인데 딱히 선배의 공격에 방어할 기제가 없어 아팠다. 언제까지 이런 치욕에 묵묵부답해야 하는지 모름지기 께름칙하다. 매우 무덥고 후텁지근한 여름날 밤에 서재에서 방콕하며 읽었던 신학교 선배의 글이 반대를 위한 반대로만 들리지 않았기에 더 을씨년스러웠던 기억이 또렷하다. 정용섭 목사가 살아 있는 동안 한국교회 목회자들에 대한 격려의 메시지가 나올 수 있을까! 기대를 접는 게 나을 듯. (ㅠㅠ) 9월은 김훈과 다시 놀았다. ‘라면을 끓이며’는 그것대로, ‘강산무진’은 또 ‘강산무진’대로 김훈의 필채에 감탄하며 독서를 마쳤는데 그달 마지막으로 읽은 ‘하얼빈’에서 피울음이 탄성으로 바뀌는 감동이 전해졌다. 이제는 일본이 공격을 한다고 해도 간접적으로 승인하는 정부이기에 더 바랄 꿈도 깼지만, 소설으로나마 김훈이 휘갈긴 대한민국의 원흉을 향한 장도(長刀)의 칼날이 번쩍인 것 같아, 내심 대리만족의 희열을 맛보는 수지맞는 장사를 했다. 이 문장은 다시 꺼내보아도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이토는 숨을 몰아쉬었다. 비서관이 범인은 조선인이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고 보고했다. 이토는 가늘게 뜨고 말했다. -바보 같은 놈. 이토는 곧 죽었다. 이토는 하얼빈 역 철로 위에서 죽었다,”(p,167) 10월은 2023년을 준비하는 달로 정해놓고 열심히 공부했다. 년 초에 교우들과 나눌 느헤미야 강해 준비를 위한 달이었다. 아주 젊었을 때, 섬기는 교회에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를 차례로 강해하며 사역했다. 근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때 설교 원고를 읽어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걸 설교라고 했으니 말이다. 당시 이 설교를 들어준 교우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송구하다. 그리고 그들은 성자였다. 중간기와 맞물려 느헤미야 역대기 역사서를 깊이 파고 들 예정이다. 레스터 L, 그레비의 “제 2 성전기 유대교”는 조금 낯설고 어려웠지만, 에스라, 느혜미야 시대로 점철되는 제 2성전기의 유대 배경을 통전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고, H.G.M 윌리암슨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에스라, 느헤미야의 스터디 가이드‘는 아직도 논쟁의 변이 많은 두 책의 연대기적인 이해를 도와준 교사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내년 초에 진행할 에스라, 느헤미야 강해가 설교자인 나 또한 기대가 된다. 11월은 김판임 교수의 책 때문에 행복했다. 그녀의 글을 읽는 것에 대한 기쁨도 물론이었지만, 내게 적지 않은 교통정리가 된 여성신학적인 입장에서의 글쓰기와 읽기라는 차원이 보편적인 이해로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는 것이 큰 유익이었다. 특히 ‘천재 예수, 그 생각을 탐하다’는 신약성서신학자의 거침없는 올곧음이 보여 감탄했다. 기실, 내가 줄곧 보아왔던 신약성서신학적인 글들의 계보는 서중석, 차정식, 권영경, 양용의, 조재천 등등이다. 하지만 바른 교회 아카데미를 섬기며 만났던 김판임 교수의 글에 또 다른 눈을 돌린 계기는 내가 섬기는 세인교회 고린도전후서 강해와 쿰란 공동체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 일 때문이었다. 특히 저자의 고린도전서 소논문 자료들은 너무 탁월해서 바울 서신을 연구하는 始原 같은 역할을 해주어 너무 감사했다. 11월 기도원에 올라가서 김 교수의 글을 탐독하는 기쁨을 가졌던 것도 늦가을의 감사 제목이었다. 12월은 섬기는 교회에서 한창 진행 중인 창세기 강해가 중반에 이르렀기에 하경택 교수의 창세기 연구 저널인 ‘창세기 2’를 집중해서 읽었다. 특히 내년 수요예배의 텍스트기 될 야곱과 요셉에 대한 공부를 위해 미리 정리해 둘 필요가 있어 밑줄 그으며 공부했다. 곳곳에 선생님들이 있어 현장에서 목회하는 목사는 감사하기 그지없다. 유진 피터슨의 유고 작품과도 같은 ‘잘 산다는 것’에서 다시 한 번 왜 유진 피터슨의 목사들의 목사라는 지칭을 받았는지를 재확인하며 말라버린 목회자의 영성 재확립을 다시 한 번 복기하는 글 여행을 마쳤다. 2022년, 너무 게을렀다. 12월의 남은 시간동안 열심히 독서를 해도 90권 정도에 만족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책을 내야 한다는 결기로 무장하여 글 읽기보다 글쓰기에 몰두하였는데 결과는 F학점이 되고 말았다. 다시 옷깃을 여미고 출판사를 다시 정해 내년 벽두에는 우여곡절 끝에 졸저가 나올 것 같다. 쓸데없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다보니 손해를 많이 본 해가 되고 말았다. 2022년은 개인적으로 목회나, 사역이나, 공부 과정에서 많은 패배를 맛 본 해가 되고 말았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고 2023년 하나님이 다시 일하실 것을 믿기에 마음을 추스른다. 오늘도 하늘에서 폭격한 쓰레기 공습으로 인해 허리가 온전하지 않지만 수요 예배에 나올 교우들을 위해 눈 폭탄을 치웠다. 제설하고 제설해도 눈은 계속해서 쏟아진다. 그래도 봄은 반드시 온다. 다시 힘을 내 보자. 2022년 부족한 사람을 위해 선생님이 되어주신 모든 분들게 머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다. 2022년 12월 21일 제천세인교회 서재에서 이강덕 목사 꾸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