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월요일 묵상
다시
오늘의 성서일과
사무엘상 2:1-10, 창세기 17:15-22, 갈라디아서 4:8-20
꽃물 (말씀 새기기)
갈라디아서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마중물 (말씀 묵상)
오늘 아침, ‘다시’ 라는 부사가 마음을 때린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들을 어떻게 세웠을까?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 항구에서 만나 회고한 바울의 소회를 참고하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행 20:19)
목회 현장에서 주군께서 위탁하신 양들을 돌보며 달려온 30여년의 세월을 반추하면 바울의 토로가 절절하게 와 닿는다.
‘눈물과 겸손’이라는 도구 없이 목회하는 것은 사기다.
“전문직의 약점은 자기 기술을 팔아먹는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직업적으로 설교하는 목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옥한흠, “목사가 목사에게(1)”, 하온, p,106)
고 옥한흠 목사의 이 글을 접했을 때, 비수가 꽂힌 듯 했다.
글벗이자 길벗인 한희철 목사의 글속에서 천둥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다.
“길 잃은 양일수록 상처는 많아 끌지 말고 업고 와야 하는 것은” (한희철, “하루 한 생각”, 꽃자리, 464)
이 단문의 제목이 ‘목자’다. 사정이 이런 정글이 목양터인데 어떻게 눈물과 겸손이 없이 목양을 감당한단 말인가!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거짓 교사들로 인해 무너지는 고통을 당하면서 다시 한 번 본인의 사역 태도를 다잡았다.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에 자라도록 하기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토로가 피 쏟음으로 들리는 이유는 나 또한 그의 고백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리라. 2022년의 끝자락에 있다. 펜데믹 3년차의 결과는 1-2년차와는 비교가 되지 아픔의 흔적들이 보인다. 교회 공동체이기에 속절없이 당해야 했던 무기력함에 폭격을 당했는데 목사는 또 다시 일어서야 한다. 또 다시.
두레박 (질문)
나는 눈물과 겸손을 도구로 사역하는 목사인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주님, 기술로 목회하지 않게 하옵소서. 방법론으로 성도들을 인도하지 않게 하옵소서. 수단으로 목회현장을 물들이지 않게 하옵소서. 오직 눈물과 겸손으로 강단과 교우들의 현장을 물들이게 하옵소서, 현장은 정글이지만 나침판 되신 주님이 길을 내 주십시오.
나비물 (말씀의 실천)
교우들이 맞닥트린 현실적 아픔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중보하고 엎드리는 날이 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