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6일 금요일 묵상 질문하자.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80:1-7, 17-19, 사무엘하 7:18-22, 갈라디아서 4:1-7 꽃물 (말씀 새기기) 사무엘하 7: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마중물 (말씀 묵상) 다윗이 나단을 불러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피력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지 않고, 아들 대에서 이 일을 하게 하시겠다고 답하셨다. 하나님의 답을 들은 다윗은 하나님께 본인의 삶의 여정 중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 겸 소망을 아뢴다. 기도를 시작한 다윗은 곧바로 기도 제목을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질문한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물론 질문이지만 나에게는 다윗의 영적인 ‘자기 인식(self-awareness)’ 으로 다가왔다. 그렇다. 자기를 인식하는 것의 첫 출발은 자기에 대한 정직한 질문을 통해 토로되는 자기 앎이라는 고백이다. “이해하려 하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이 우리의 지혜였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179)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자들의 불문율과 같은 이 문장에서 인간이 왜 인간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질문하기 때문이다. 마셜 골드스미스의 말대로 인간은 ‘호모 콰렌스’의 種이다. 질문을 봉쇄하는 억압은 전체주의, 병영국가, 파시즘 체제에서나 볼 수 있는 야만적 행태다. 이런 차원에서 아우슈비츠는 인간이 겪었던 최악의 참극이었다. 신학교 2학년 1학기 때였다. 조직신학(1)을 수강하던 어느 날, 삼위일체가 그날 강의 주제였다. 선생님은 여러 가지의 예를 들며 삼위일체를 설명했다. 열강이었다. 강의 막바지에 질문을 요구하는 선생님에게 평소에 갖고 있었던 질문을 드렸다. “교수님, 강의를 들었지만 저는 삼위는 이해가 되고 믿어지는데 일체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일체를 조금 더 설득력이 있게 말씀해 주십시오.” 신학교 2학년 시절, 신학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 저는 그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당황하던 선생님이 내게 이렇게 하명했다. “이강덕, 그냥 믿어. 삼위일체를 믿지 않으면 목사 안수 못 받는다.” 당시에 선생님의 답은 거의 윽박지름이었다. 불편한 질문 사절이었다. 나는 지금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교우들에게 설명할 때 불완전하지만 ‘三位’의 하나님을 ‘페리코레시스’의 개념으로 접근해 설명하는 정도로 그친다. 하지만 ‘一體’에 대해서는 설명을 가능한 하지 않는다.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게 있다는 게 난 사실 더 은혜다. 질문하자. 아니 질문하는 교회를 만들어야겠다. 교회가 질문을 봉쇄하면 폐쇄적 집단이 된다. 질문을 통해 더 나약한 내 자아를 인정하고 주군께 내 삶을 의탁하는 삶으로 인도하는 통로를 열자.
두레박 (질문) 하나님, 나는 누구지요? 손 우물 (한 줄 기도) 주님. 세인 공동체가 치열하게 질문하는 공동체가 되게 해 주십시오. 질문을 막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치열하게 질문하는 교우들을 어느 정도의 답을 주기 위해 목사로 더 철저히 준비하고 공부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눈이 너무 많이 내렸습니다. 이럴 때 항상 드리는 기도이지만 교우들 중에 낙상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저들의 보폭을 지켜 주십시오. 특히 연로한 교우들과 함께 해 주셔서 이번 겨울나기가 어렵지 않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