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아이러니한 것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종편의 탄생은 친 정부적인 색채의 방송사를 양산하여 정권을 공고히 하겠다는 의지의 일환이었는데, 지금 정부가 그 정치적 함수관계로 세운 종편의 한 방송사에 의해서 여지없이 무너졌다는 점입니다. 시쳇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셈이 된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누군가의 말은 적확한 지적인 셈입니다. 그 종편의 대표적인 방송인 뉴스 룸을 이끌고 있는 앵커가 지금 전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그 앵커가 이끌고 있는 뉴스 프로그램의 평균 시청률이 9.3%를 기록했다는 인터넷 보도를 보면서 정말로 놀랐습니다. 공영방송이 아닌 한 민간 방송이 뉴스 보도 프로그램에서 일체의 공영 텔레비전의 보도 부분의 시청률을 훨씬 뛰어넘는 기염을 토했다는 것은 말 그 자체가 뉴스거리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친정부적인 대안으로 만들어진 종편 텔레비전의 한 뉴스 프로그램이 전 국민적인 신뢰를 받는 이유는 누가 뭐라 해도 그 방송 책임자이자 앵커를 맡고 있는 한 언론인 때문일 것입니다. 전혀 외압에 굴하지 않는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한 사람의 철학 때문일 것입니다. 해서 많은 대대수의 지성적 국민들은 그런 그의 올곧은 언론인으로서의 고집에 열광하고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그 앵커를 제 칼럼에 올린 이유는 대다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공통분모에 저 또한 동의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인 것이 사실이지만, 제가 그 앵커를 주목하는 것은 그를 지지하는 국민들의 입장과는 조금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매일의 뉴스 룸에서 전하는 앵커 브리핑의 질적 수준 때문입니다. 그가 준비한 앵커 브리핑의 문장들과 내용들은 여러분의 담임목사가 평가하기에는 이 시대 최고의 글이라고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저는 설교를 하는 목사입니다. 설교를 한다는 것은 저에게는 말이 아니라 글쓰기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새벽예배 설교를 제외한 일체의 설교를 문장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독서력, 지성적 내공, 편벽되지 않는 공정성, 그리고 예술적 탁월성까지 겸비한 종합적 산물이 저자에게 준비되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소개하는 앵커의 브리핑을 들을 때마다 두 가지의 양가감정이 저에게 스며듦을 느낍니다. 하나는 도대체 얼마나 피나는 노력과 공부를 했기에 저런 통찰(insight)과 직관(foresight)이 포함된 브리핑 문장을 만든단 말인가! 의 탄성입니다. 또 하나는 세속적 영역에서도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사람이 있는데, 영의 양식을 전하는 목사로 서 있는 나는 영혼을 살리는 말씀을 준비하는 삶을 사는 더 중요한 예언적 전령(herald)으로서 형편없이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열등의식의 자괴감이 있습니다. 창피함은 있지만 그래도 얼마나 준비된 설교를 전하고 있는가?, 설교 준비를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의 날마다의 도전을 그의 준비된 브리핑을 통해 공급받는 것은 저에게는 근래 접하는 공부 중에 최고의 공부입니다. 매일 그의 브리핑을 만나면서 그가 세간의 사람들에게 주는 세속적 열광과 감동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고 섬기고 있는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얼마나 큰 영적 감동의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가? 의 자기반성은 저에게는 아주 낯선 텔레비전 시청이라는 항목에 시간을 투자하는 중요한 이유가 됨을 근래 직시합니다. 동시에 목사가 얼마나 부단히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하는가? 를 그를 통해 재확인하는 것은 저에게 플러스 효과입니다. 앵커 브리핑의 장본인은 뉴스 룸을 마치는 클로징멘트(closing ment)에서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 **** 기자들은 내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이 한 마디가 저를 전율하게 합니다. 나를 전율하게 만드는 그가 옆에 있어 행복합니다. 나도 성도들을 위해 매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 샬롬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저 역시 시므온처럼 기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