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박물관의 고려청자 전시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 무리의 중학생과 인솔 교사가 들어왔다. 그때 나는 놀라운 말을 들었다. ‘이 도자기는 고려의 도공들이 억압 속에서 노예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으며, 차라리 증오해야 할 물건들이다.’ 한 젊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단언한 내용이었다.” 고려대학교 불문과 교수인 황현산 선생이 쓴 ‘밤이 선생이다.’라는 산문집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 글을 읽다가 아주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봄(seeing)과 품음(receiving)이라는 양가감정의 어우러짐이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한 사건의 인지를 대중적으로 보고 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똑같은 사건의 봄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철저한 역사의식을 토대로 생각하는 자들의 전형입니다. 일천한 지식이지만 저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사람들이 훨씬 더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든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랬나 봅니다. 저는 제 책에서 소개한 소설가 은희경이 쓴 ‘새의 선물’ 서평을 통해 개인적으로 ‘보여 지는 나’ 라는 상투성에 대하여 주인공 진희가 끝임 없이 고민하고 투쟁하고 있음에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무언의 응원을 보냈음을. 작금에 내 조국을 보면서 나는 목사로서 어떤 생각을 하여야 하는가? 에 대해 나름 무척이나 많이 숙고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경이 된 나라의 형국이 어찌 보면 나라를 이렇게 만든 자들만의 범죄인가? 를 되물어도 돌아오는 답이 너도 공범이라는 자책 때문입니다. 이 되돌아오는 답은 그냥 상투적인 목사로서의 소회가 아닙니다. 한 지역 교회를 맡아 사역하는 평범한 목사로서 나 또한 철저한 역사의식에 대한 공부와 가르침에 있어서 스스로는 물론, 섬기는 교회의 교우들에게 소홀했다는 점을 부인할 없기 때문입니다. 봄(seeing)이라는 시각에 있어서 더 더욱 그렇습니다. 너무나 대세에 휩싸여 전혀 하나님의 뜻과 그 역사의 한 복판에서 당신의 통치 역사를 이루어가는 주관자이신 주군의 세밀한 말씀에 민감하지 못하여 역사적 해석이 담보되지 않은 품음(receiving)으로 그 봄을 너무 쉽게 용인해 왔던 것이 나 또한 공범이라는 데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아픔입니다. 아무리 목사의 위상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목사는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원동력인 복음의 선포자인데 그 복음의 위력을 가볍게 여긴 죄가 나에게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복음의 위력을 세상에 선포하지 않는 죄, 바로 그 죄가 오늘 내 사랑하는 조국을 이토록 무참하게 유린하는 자들이 널뛰게 한 원인임을 무섭게 돌아봅니다. 본 회퍼는 언젠가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촌철살인은 가슴을 후벼 파놓습니다. “싸움은 무기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자는 반드시 해석해야 하는 자라는 것을 목회를 하면서 수없이 되새김질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해석은 감정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아야 함을 또한 수없이 성찰했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자는 품음이라는 해석의 결과를 반드시 도출합니다. 난 그 품음이 천박하고 상투적인 품음이 아님을 믿습니다. 그 품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라는 하나님의 무기가 그 안에 내포되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정부가 비정상을 정상화시키겠다고 할 때,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 반대를 외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정부가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기 전에 정상을 비정상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부터 포기하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제가 품었던 봄(seeing)이라는 해석의 품음(receiving)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나라에 다시 봄(spring)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그 봄은 가장 상식적인 정상이 정상으로 인정받을 때 오는 하나님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주여, 이 나라를 긍휼이 여겨 주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