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가 골치 아픈 송사인 예수 사건을 헤롯에게 떠넘기기 위해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그에게 보냅니다. 전국을 들썩이게 한 소문의 당사자인 예수를 보고 싶었던 헤롯은 반색하며 예수를 만나 궁금해 하던 여러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이런 헤롯의 집요한 질문에 대한 주님의 반응을 누가는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습니다.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눅 23:9) 벙어리처럼 침묵하시는 주님에게서 백 마디의 말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무게보다 더 큰 위엄을 느끼게 합니다. 사막의 영성을 추구한 토머스 머튼이 쓴 ‘사막의 지혜’를 보면 이런 글이 담겨 있습니다. “한 원로 말했다. ‘수도자는 이 사람이 어떻게 행동을 하고, 저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살피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의문들은 우리에게 기도를 멀리하게 하고 잡담에 빠지게 합니다. 침묵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주후 313년, 지하 종교에서 지상 종교로의 자유함을 얻은 기독교는 급속히 팽창되었습니다. 그 동안 숨죽이며 살아왔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완전 해방감을 만끽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그 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봇물처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진리가 정답, 저 진리가 정답, 이 교리가 정답, 저 교리가 정답을 외쳤습니다. 그 말들은 홍수처럼 밀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말들은 왠지 모르게 천박한 것들 천지였습니다. 들을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숨죽이며,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던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흐느낌들이 있었고, 고독함을 이기기 위한 소리 없음의 소리들이 그래도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말은 아니었지만 천상에 올라가는 영성의 소리였습니다. 허나 지상으로 올라온 기독교는 아우성들로 들끓었습니다. 그 소리들은 공통적으로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내 말이 정답이라는 볼멤을 담보하였다는 점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물론 그 소리들은 헛헛함의 추악한 결과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천박하고 값싼 소리들을 지하에서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던 세미한 음성을 기대하던 자들은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척박한 사막으로, 사막으로 삶의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깊은 사막에서 다시 지하 도시에서 추구하던 영성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 유명한 사막의 교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의 양식은 철저한 침묵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세미한 음성이었습니다. 벙어리처럼 살았던 사막의 교부들에게서 큰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게 나라냐? 를 비롯해서 너무나 자극적인 문구들이 대한민국을 수놓고 있습니다. 각종 패러디물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각도로 보면 근래, 우리나라는 슬로건 경쟁 대회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프로파간다’들이 즐비한 아픔의 한 복판을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선동 단어들이 사람들의 감성들을 자극해서 거기에 들어가지 않으면 마치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 되어버려 어떻게 하든지 그 무리 속에 들어가려고 발버둥치는 비극적 형극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도 당신과 같이 흥분하고 있고, 나도 당신과 같이 같은 의식으로 뭉쳐 있음을 외치고 있음을 증명하는 꼴이 된 것입니다. 토머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어느 철학자는 사람들을 만나러 나갈 때마다 이전 보다 더 못한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철학자의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분주함과 요란함은 영성의 적입니다.
근래 한 목회자가 영성일기를 쓰자, 24시간 주님을 바라보자, 오늘 주님은 나의 왕이셨는가? 등등의 글들을 얼굴 책에 올리면서 많은 논쟁거리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 목회자가 말하고 있는 내용들은 목사로서 오늘 우리나라의 아픔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가? 에 대한 원론적인 접근인 것을 저는 압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말과 언어가 아닌 침묵의 행동으로 보여주면 더 큰 울림이 되지 않을까 싶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목사가 위기일 때 가급적 하늘의 소리를 듣기 위해 침묵하고 엎드리는 것은 가장 위대한 저항입니다. 동일하게 성도들 역시, 침묵과 엎드림의 소리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침묵은 소리 없는 하나님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벙어리처럼 사신 주님이 어느 때보다 그리워지는 시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