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36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감당하시면서 만난 무리들을 보시고 느끼는 감정을 마태가 기록한 이 글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단어는 ‘불쌍히 여기시니’입니다. 소그룹 성경 공부와 공 예배 설교를 통하여 수차례에 언급했듯이 이 번역은 헬라어 ‘스프랑크니조마이’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허나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살펴보면 더 도전적인 원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
어느 정도로 감정이입을 해야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이 느껴질까요? 주님은 당신의 사역지에서 유리하는 양들을 보면서, 마치 목자를 잃어버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바로 그 양들인 당신의 사람들을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으로 바라보셨다는 마태의 보고를 종은 근래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우연히 SNS 상에서 근래 한국교회 대형교회 중에 나름 건강성을 유지하며 아슬아슬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그마나 숨 쉬는 통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분당 모 교회의 담임목사 설교를 보게 되었습니다. 설교 중에 본인이 부교역자 시절, 섬기던 사랑의 교회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던져 주었는데 종의 가슴을 움직였습니다. 소천하신 고 옥한흠 목사께서는 화요일마다 교역자 기도회를 인도하시면서 한 주간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 분은 단 한 번도 교역자들에게 어느 부서는 왜 이리 부흥이 되지 않아! 라고 야단치시지 않았음을 피력하면서 군대 말로 그러나 한 가지 경우에는 곡(哭)소리가 나게 혼찌검을 당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건 본인이 맡고 있는 부서에 성도들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무지할 때임을 상기했습니다. 아무개 성도가 어떤 아픔으로 괴로워하는데, 아무개 성도가 암이 걸려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는데, 아무개 성도가 지금 어떤 일로 우환을 겪고 있는데 그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는 교역자는 거의 실신직전까지 야단을 맞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한 주간, 전갑규 권사께서 새벽을 지켰습니다. 아들을 위한 새벽 지킴임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한 주간, 옆에서 권사님을 지켜보면서 권사님의 기도는 말로 인한 기도가 아니라 차라리 영혼이 탈진되는 것 같은 절규요, 몸부림이요, 통곡이요, ‘스프랑크니조마이’였습니다. 내장이 끊어지는 그 아픔이라는 말이 한 주간 권사님을 캐어하면서 종에게 밀어닥쳤습니다.
“목사님, 목으로 밥이 넘어가지를 않아요. 남편과 아들은 전혀 달라요. 내가 죽을 것 같아요. 아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겠어요.”
이 땅에 살면서 자식이 당하는 절망 앞에서 아마도 동일하게 토로하는 모든 어머니의 탄식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종 역시, 성도의 아픔을 현장에서 목도하면서 어머니의 심정만큼은 아니지만 담임목사만이 가질 수 있는 절규로 권사님과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스프랑크니조마이’의 중보였습니다. 저는 지역의 한 교회를 섬기고 있는 담임목사입니다. 그러기에 고 옥한흠 목사님의 가르침과 다를 리 없습니다. 성도가 당하는 내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저 또한 함께하고 있습니다. 근래는 마치 시간이 한 지점, 한 순간에 멎어 있는 느낌을 갖곤 합니다. 종에게 지금 보이는 것은 서정수 집사의 기적적인 치료이고, 최정희 집사가 행하는 신바람 나는 간증입니다.
저는 왜 이런 어려움들이 성도들에게 임하는 지에 대하여 속 시원하게 알려줄 지적인 능력이 없는 나약한 목사입니다. 섣불리 상황에 따라 유리하게 뜯어 맞추어 그럴듯하게 해석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어려움의 근원이 누구에게로 말미암았는가? 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종이 믿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가 분명히 선하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 결론의 의미는 제 몫이 아니고 주님의 몫이기에 제가 가타부타할 것은 아니지만 다만 저는 과정의 아픔은 함께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가지셨던 ‘스프랑크니조마이’의 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결론을 종은 기대하며 이렇게 날마다 기도합니다.
주여, 서정수, 최정희 집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