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 아들이 섬기는 교회 담임목사가 정기 휴가를 가는 바람에 학기 중에 있는 교육 전도사 아들이 졸지에 수요 공 예배 설교를 비롯해서 몇 번의 새벽 설교까지 떠안게 되었다고 투덜대는 투덜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학기 중에 공 예배를 인도한다는 것이 보통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저 역시 동의하기에 아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목요일 오전, 얼굴 책에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설교 참 어렵네.’라는 제하로 아들이 본인 심정을 표현한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들이 어떤 설교를 했는지, 어떻게 말씀을 증거 했는지 현장에 없었기에 뭐라 단정해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설교를 먼저 해 온 목회 선배로 혹은 아버지로서 아들이 왜 이런 소회를 달았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들이 멘트 한 ‘설교가 참 어렵네.’라는 현장에서의 보고는 아마도 신학교 현장에서 배우지 못한 삶의 체험과도 같은 산교육의 엑기스임에 틀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신학생 시절, 지금은 작고하신 이상훈 학장님께서 강의 중에 하셨던 두 가지의 가르침이 잔잔하게 남아 있습니다. “⓵ 제군들이여! 신학교 때는 가능한 설교를 하지 않도록 하라 ⓶ 어쩔 수 없이 설교를 하게 된다면 가능하면 신학생 시절에는 주석을 참고하지 말고 실패하며 설교하라” 당시 교수님이 이 지침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 깊이를 미처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이 있었지만, 목양의 현장에서 사역의 연수가 늘어나면서 어른의 가르침이 얼마나 큰 공명이 있는 교훈인지를 뒤늦게 깨달으며 무릎을 치곤합니다. 전자는 필립 브룩스의 말 대로 설교를 ‘설교란 설교자의 인격을 매개로 하는 캐리그마’ 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교수님은 아직도 미성숙한 신학교 시절의 설익은 인격으로는 가급적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 실수를 줄이는 것임을 교훈하신 것이었고, 후자는 어려서부터 주석에 의지한 설교를 하게 되면 본문 텍스트와 치열하게 씨름하여 얻어내는 보석과도 같은 주님의 조명하심을 인격적으로 받을 수 있는 공부를 하지 않고 쉽게 설교하는 기술을 배우게 되어 결국은 얄팍하고 천박한 설교자가 될 수 있다는 경고성 가르침임을 큰 울림으로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 어찌 설교가 쉬울 수 있겠습니까? 설교가 쉽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그래서 그런지 아들이 공 예배 설교를 행한 뒤 밝힌 ‘설교하기’ 의 고통을 표현한 것을 보면서 설교를 쉽게 여기지 않는 자세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얼굴 책에 올린 글을 본 아들의 동기들이 여러 말로 위로한 댓글을 본 아들이 맨 마지막에 올린 댓글이 아들을 응원하는 에비에게 훈훈함으로 다가옵니다. “이요한 힘내자 ㅜㅜ, 앞으로 우리에게 더 많이 주어질 강단을 위해서 더 공부하자.” 내친 김에 딴청 하나 할까 합니다. 오늘 아들의 글을 읽는데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의 어느 날, 빛바랜 레인코트 깃을 올리고 아주 천천히 골고다 언덕을 몇 번이나 쉬며 오르시며 낙엽을 줍던 고 이상훈 학장님의 그 우수에 깃든 고독함의 권위(?)가 너무나 그립고 또 그립습니다. 더불어 채플 시간에 설교자의 설교자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이 박사님의 축도문에 전율하며 열광하던 서울신학대학 신학생 시절이 왜 이리도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나이를 먹고 있다는 증거이겠지요. ㅎㅎ 점점 더 깊어지는 가을의 내음새가 완연한 참 좋은 계절, 모두가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