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느닷없이
토요일 새벽에, 휴가처에서 돌아왔습니다. 제천의 새벽 날씨가 언제 그 동안 내가 폭염을 주었느냐고 항변하듯이 선선하고 쾌적했습니다. 아내가 이제는 추울 정도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결코 누그러뜨릴 것 같지 않았던 무더위도 계절의 여운에는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것 같아 다시금 자연의 섭리에 고개를 숙입니다. 남녘의 한 지역에서는 콜레라가 발생을 하고, 학교가 개학을 한 뒤, 학생들이 學食(학식)을 먹다가 집단 식중독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고, 서민들은 때 아닌 폭염으로 인해 어쩔 수 없어 벌벌 떨며 틀었던 에어컨 때문에 전기료 누진 폭탄을 맞고, 너무 심한 가뭄으로 인해 가을 들녘을 걱정해야 하는 농민들의 마음은 타들어가 가는 그런 미친 여름을 보내서인지 갑자기 찾아온 서늘함이 왜 이리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간, 휴가처에서 후배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를 섬기는 여 집사님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주인 집사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계속 의미 있게 떠오릅니다. “목사님, 이틀 전부터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끓일 때 찌개 냄새가 맛있어졌습니다. 그래서 가을이 성큼 왔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깨달았는데 정말로 바람의 기운이 달라졌습니다.” 집사님의 말을 듣다가 이런 것이 직업적인 예민함에서 나오는 촉각이겠구나 싶어 가슴에 담았습니다. 저 같은 문외한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느낄 수 없는 계절의 오고감을 느끼는 감각을 저는 그 날, 교제하던 집사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영국의 극작가인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기록된 ‘내 이럴 줄 알았지, 무덤 근처에서 머물면 머물수록 내 주변에 곧 이런 날이 오게 될 것을.’이라는 명문처럼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론적인 내용인 죽음이 온다는 것 정도를 추측하는 일이야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앞일을 예측하는 것은 창조주의 권한이지 인간에게 주어진 내용이 아니기에 그냥 인간은 겸손히 삶을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더 겸손함 마음을 추스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감정의 선물은 민감함과 둔감함 두 개가 동시에 주어졌다고 담임목사는 믿습니다. 해서 욕심에 대하여는 둔감하게 사는 것이 필요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살아야 함이 더 중요하다고 경책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이어야 함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또 하나, 성도로서 민감해야 할 영역이 있다면 시대에 대한 분별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군이신 예수께서 그래서 이렇게 경종하신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태복음 16:2-3) 개인적으로 저는 주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재림에 대한 징조나 사인에 민감하라는 차원의 말씀으로만 고착화시키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일체의 삶의 내용에 정직하고 예민하라는 가르침으로 받습니다. 그토록 지칠 줄 모르던 폭염이 물러가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온 것이 내일부터 그렇게 하겠다고 가을이 예보한 것이 아닌 것처럼, 그냥 그렇게 가을은 느닷없이 우리 곁에 가까이 온 것처럼, 아마도 내 삶의 아름답고 또 슬프고 기쁜 이야기들도 그렇게 순간 왔다가 가는 것이기에 모바일 폰에, 다양한 문명의 利器(이기)처럼 보인느 것에 깊이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들이에 자칫하면 놓칠 수 있는 영적 감각들을 회복하는 분별력들이 세인지체들에게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가을이 성큼 와 센치해져서 그런지 오늘은 이문세씨의 ‘가을이 오면’이라는 노래를 한 번 들어보렵니다. 참 좋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