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이라는 괴물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롬 16:2) 바울이 로마서라는 대 저작을 쓴 후, 이 글을 로마에 있는 교우들에게 전하는 특명을 건장한 남자도 아니요, 공부를 많이 도시틱(?)한 사람도 아닌 겐그레아라는 어촌 출신인 뵈뵈라는 연약한 여성에게 맡겼습니다. 당시 여성의 인권은 말이 아닌 상태였기에 이런 바울의 행보는 말 그대로 파격이었습니다. 파격적인 일을 단행했지만 바울은 뵈뵈가 적지 않게 염려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해서 로마서라는 대작의 결어 부분에 인사말을 쓰는 부분을 이용하여 뵈뵈 자매를 합당한 예절로 로마교회의 지체들이 영접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합당한 예절’이라는 헬라어 ‘악시오스’는 우리나라 말로 ‘합당한’ 보다도 더 적합한 단어가 있습니다. ‘가치를 인정해 주는 행위’입니다.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녀의 가치를 존중해 주면서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줄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는 것은 그 사람이 상대방의 가치를 존중해 주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남의 인격을 존중하고 가치 있게 인정해 줄 때 상대방의 인격이 높아지는 것도 있겠지만 실질적으로는 본인의 인격이 더 높아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무도 주목해 주지 않는 겐그레아 출신의 한 연약한 여성을 극진함과 최대한 예의를 동원하여 영접해 줄 것을 로마 교회의 지체들에게 권한 것은 뵈뵈를 염려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로마교회 형제들의 영적 수준이 다른 이들에게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이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기도해 주셔서 장소 문제로 인한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여름성경학교가 잘 마쳐졌습니다. 이번에 뒤에서 성경학교를 지지하고 중보하면서 사람이 선입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각인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서울의 가장 부자 동네 한 복판에 있는 교회의 아이들이라서 우리 아이들에게 막 하면 어떻게 하지! 부자 동네 아이들이라서 안하무인이면 어떻게 대처를 하지! 버릇이 없으면 어떻게 지도를 하지! 등등 나름 염려되는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담임목사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상 밖의 아이들의 바름과 예의 있음, 가정교육을 아주 잘 받았다는 느낌이 진하게 들 정도의 경어 사용, 무례는 고사하고 상당히 조심스러운 행동거지 등등을 보면서 도리어 우리 아이들이 터주 대감 마냥 무례하게 대하는 것은 아닌가를 역으로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명동 교회 아이들의 영적인 상태마저도 나름 훈련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의 상대적 빈곤함에 내가 얼마나 교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를 통타당하는 성경학교의 일면을 옆에서 2박 3일 동안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강남은 문제가 많을 거야. 상당히 교만할 거야. 돈 밖에는 모르는 영적 지진아들 일 거야. 별로 나아보이지 않는 우월감에 사로잡힌 아이들일 거야. 그러니 우리 아이들이 한 수 가르쳐 주어야 하는 대상들일 거야.” 이번 여름 성경학교는 선입관을 갖고 있었던 내 교만에 한 방을 날린 세속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신의 한 수 같은 배움의 장이었습니다. 강남에 있는 명동 교회,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가치는 우리 아이들은 물론 교회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알려준 좋은 파트너였습니다. 설익은 섣부름으로 건방지거나 교만하지 말아야 함을 깨우쳐 준 좋은 선생님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