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15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2:15-21 제목: 왜 믿음인가? 서론) 지난 바른 교회 아카데미 세미나에서 발제자로 나선 장로교 신학 대학교 박경수 교수의 강의를 듣다가 종교개혁자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철저하게 신앙적인 삶을 고민하며 살았는지에 대하여 소개받고 그 치열함에서 자꾸만 희석되어 가고 있는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습니다. 종교개혁자의 시초라고 보는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 (God in the Word) 그러자 당시 루터와 쌍벽을 이루며 스위스 지역에서 또 다른 종교개혁을 이룬 츠빙글리는 한 발 더 나아간 표현으로 하나님을 표현했습니다. “말씀 위에 계신 하나님”(God over the Word) 루터도 츠빙글리도 중세 가톨릭교회의 비성서적인 방향성에 반기를 들고 성경에 기록된 진실 된 가르침만을 따르겠다는 각오로 목을 건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간에 신학적인 차이가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 치열한 경쟁의 각을 세우며 평행선을 달렸지만 그들이 추구하려던 분명한 공통분모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내건 모토 중에 하나인 ‘Sola Scriptura’ 즉 ‘오직 성서만으로’ 라는 신학적 고집이었습니다. 루터는 말씀과 하나님을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서 성서의 권위를 그만큼 높였다면,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도구가 말씀이라고 주장함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말씀보다 위에 두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해석해 본다면 말씀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로마 가톨릭의 변질을 바로 세우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개신교회의 후배들은 이 두 사람의 신학적인 고집을 가슴에 담아야 하는 대목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 세인교회가 그리고 지체들이 얼마나 루터와 츠빙글리가 목숨을 걸고 싸워왔던 성서가 말하고자 한 예수의 말씀에 천착하였는가를 되 집어 보기로 했습니다. 본론) 바울은 복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표면적으로 주장했지만 유대의 율법주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외식하던 베드로와 바나바에 대하여 조금의 주저함 없이 그들을 질타했음을 살폈습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격 자체가 나름 위축될 수 있는 대중적으로 뒤에 처져 있었던 바울이었지만 이렇게 담대하게 두 사람의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행태에 대하여 단호하게 비난할 수 있었던 그 근거가 본문 20절이었음을 지난 주일에 교우들과 나누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본인의 삶만이 영적 본질임을 직시한 바울이었기에 가능했던 담대함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렇게 강하게 역설했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란 믿음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설교의 연구 과제입니다. 바울은 본문을 시작하는 15절에서 이렇게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이전 정체성을 토로합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여기에 기록된 ‘우리’라는 대명사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이든, 수리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이든, 아니면 갈라디아에 있는 유대인이든 구분하지 않는 유대인입니다. 다시 말해 지역적 공간을 뛰어넘는 일체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대명사입니다. 물론 이 부류에 바울도 포함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유대인들만이 갖고 있는 자존감이요, 정체성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잘못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태생적 죄인이라는 아주 그릇된 생각이었습니다.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루살렘에서 240여km나 떨어진 당시로 볼 때 결코 가깝지 않은 다메섹이라고 하는 이방지역으로 직접 이동하기를 자원하면서까지 그곳에 살고 있었던 이방적인 예수주의자들을 핍박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의 이런 정체성에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본문 16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유대인들의 유대인 됨에 대한 자부심이 어디에 기인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부여하신 율법을 받은 유일한 민족이라는 선민 개념입니다. 해서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유대인 존재의 근거이자 젖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바울은 여지없이 16절에서 갈아엎고 있으니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고 정의합니다. 한 술 더 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의롭게 되는 것’(稱義하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오’는 상당히 많은 다른 동의어로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대표적인 동의어가 ‘구원을 받다.’입니다. ‘칭의하다.’(justify) 즉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은 법정에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던 자가 죄가 없어졌다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법적으로 아주 정당하게 죄에서 놓임을 받았다는 확증의 순간이 바로 의롭게 된 순간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설명할 때 곧잘 동반하여 설명하는 성경 요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의롭게 되었다고 칭함을 받았다.’는 것은 곧바로 영생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며,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영적 혁명의 선언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아마도 이 구절만큼 ‘의롭게 되다’는 뜻을 가장 적절하게 부연해 주는 구절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과 관련하여 의롭게 되었다는 의미를 해석할 때 눈여겨보아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의 판단이 아니라 제 2인칭 상대방이나 삼자의 동의를 전제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불러지고 또 확증시켜주어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요한복음 5: 24절에 의하면 그렇게 불러주고 확증해 주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의롭게 만들어주시는 주체입니다. 이 전제는 기독교가 갖고 있는 절대 불변의 명제이자 원칙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칭의 혹은 의롭게 되었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일까요? 역시 요한복음 5:24절은 아주 분명하게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입니다. 이 말을 풀면 의롭게 되는 칭의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자이고, 하나님을 믿는 자라는 분명한 답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 즈음해서 또 하나 풀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는다는 것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해석 역시 바울의 도움을 받아 보겠습니다. 이 대목을 명쾌하게 풀어주는 바울의 해석은 그 유명한 로마서 10:17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5:24절에 기록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라는 선포의 선명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 때문이라는 결론입니다. 믿음이 죄인을 의인으로 신분 변화를 시키는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하는 단초이며,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는 실마리임을 주님도, 바울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십시다. 17-19절을 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신학자다운 바울의 면모를 알게 해 주는 통쾌한 구절입니다. 바울은 외식하였던 바나바와 베드로를 공격하게 된 타당한 이유를 갈라디아교회 지체들에게 서슴없이 선포합니다. 바나바와 베드로의 외식은 단순히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유대 율법적인 생리를 그대로 갖고 있었던 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정도의 단순한 사건이 아님을 통타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외식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의 은혜를 정면으로 도전함과 동시에 옛 율법으로 회귀하여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구원의 도에 이를 수 없다는 율법주의의 퇴보이자 거짓 복음으로의 후퇴임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입니다. 이 구절이 왜 갈라디아서에 위치해 있습니까? 바나바와 베드로가 유야무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스리슬쩍 율법으로 회귀하려던 사탄적인 행동이나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거짓 교사들이 다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는 거짓 복음에 넘어간 너희들이나 도찐개찐이고, 초록이 동색임을 동시에 고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분노와 격정은 본문 20-21절에서 클라이맥스를 보입니다. 다시 한 번 은혜를 복기하는 차원에서 두 구절을 동시에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저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절인 21절에서 바울이 얼마나 단호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갈라디아 교회의 배교자들에게 경고합니까? 주님이 폐한 율법을 다시 등장시킴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비수를 날리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작가 김훈이 쓴 ‘남한산성’을 인내하며 읽다가 독자인 내가 도저히 이 대목에서는 분노의 감정이 없이 읽을 수가 없어서 제가 갖고 있는 책 옆 여백에 이렇게 쓴 글이 있습니다. “차라리 죽지” “새벽에 임금은 도성에 도착했다. 동대문 밖을 지날 때 사람의 시체를 뜯어 먹고 마쳐버린 개들이 임금의 대열을 가로막고 짖어 댔다.”(김훈, “남한산성”, p,357) 무능했던 인조가 항복을 하고 삼전도에서 3번 칸에서 절을 하며 술을 올려야 했던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당한 뒤에 다시 남한산성에서 빠져 나와 한양 도성으로 들어올 때 몽고의 침입으로 완전히 무너진 조선의 비참했던 정황을 천재적인 글쓰기의 달인인 김훈 특유의 색채로 그린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약 400년 전에 있었던 이 치욕을 내가 당하는 것과 같은 비애를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부관참시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너무 끔찍한 단어입니다. “예전에,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을 다시 극형에 처하는 형벌로, 관을 쪼개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걸던 일”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죽음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으로의 회귀를 무엇이라고 날선 모습으로 본문에서 표현합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립니다. 21절에 번역된 ‘헛되이’는 헬라어 ‘도레안’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실질적인 의미는 ‘무가치하게’ 혹은 ‘이유 없이’라는 부사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돌아가신 사건은 인류 역사상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내린 최고의 이유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였습니까? ※ 거역할 수 없었던 은혜의 공급하심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설교 제목의 답을 제시할 수 있게 됩니다. 왜 믿음입니까? 오직 믿음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들에게 내리신 은혜를 공급받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 내용을 강조하다보면 또 이런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믿음 제일주의를 강조하다보니 행함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았고, 결국 한국교회는 주일만의 그리스도인으로 넘쳐나게 만든 반면, 월요일의 그리스도인은 만들지 못했다는 혹독한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믿음 지상주의에 빠져 버린 한국교회는 오늘날, 이렇게 약화된 교회가 되어 버린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구원 그 이후’를 가르치지 못한 후폭풍으로 인해 이렇게 속빈 강정, 늙어버린 거대한 공룡이 되어 버렸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담임목사가 아주 보수적인 목사로 설교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주님이 우리들을 의롭다고 인치시고 사망에서 생명의 자리로, 심판이 아닌 영생의 자리로 이끌어주신 이 엄청난 은혜는 내 삶의 행위가 아닌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듯한 설득력으로 구원의 합당한 삶을 주님이 기쁘게 보셨기에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셨다는 극히 합리적인 이론을 전제하여 구원의 결과를 포장해서 말씀드리면 전하는 목사인 나도 폼 날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거짓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에 이제 그 은혜 받은 자로서 마땅히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그 이후의 영역입니다. 왜 믿음입니까? 믿음이 전혀 의롭지 않은 내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유일한 은혜의 통로이기에 그래서 믿음이 중요합니다. 젊은 작가인 최은영은 본인의 옴니버스 소설인 ‘내게 무해한 사람’ 안에 실려 있는 ‘아치디에서’라는 단편에서 한국에서 도무지 살아낼 희망이 없이 영국을 피난처 삼아 도피하며 살던 하민이라는 여성을 모델로 내세웁니다. 가정에서는 맏딸이기에 언제나 모범적으로 살아야 했고, 직장에서는 간호사이기에 무조건 백의의 천사로 가장하며 살아야 했고, 동생들에게는 모름지기 힘이 되어야 하는 심각한 압박의 무게로 인해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여동생에게 감정적인 폭발을 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좌절을 토해내는 회상의 장면이 등장합니다. 언제나 착할 줄 알았고 당연히 받아주는 언니인 줄 알았던 동생이 언니의 격정적인 공격을 받고 쓸쓸하게 문자를 전송합니다. “착하게 살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p,282) 이 글을 메모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 원고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뭔가 독자였던 저에게 울림이 컸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서 하나로 구원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최은영이 의미한 글을 이렇게 패러디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교회가 절제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시대이기에 아주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말해보고 싶습니다. “착하게 살지 말고 은혜 안에서 살아”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나에게 주신 가장 극적이며 이유 있는 은혜는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해 주신 사건입니다. 이 은혜를 잊고 살 때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만드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구원 그 이후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하는 일은 믿음은 은혜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교우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 있을 때 아들들에게 당부한 교훈들이 편지로 남아 오늘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1802년 2월 7일에 다산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너희들의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둘째의 글씨체가 조금 좋아졌고, 문리도 향상되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는 덕인지 아니면 열심히 공부하는 덕인지 모르겠구나. 부디 자포자기(自暴自棄)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부지런히 책을 읽은 데 정진해라. 초서(抄書)나 저서(著書)하는 일에 혹시라도 소홀하지 말도록 해라. 폐족이면서 글도 못하고 예절도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보통 집안사람들보다 100배 열심히 노력해야만 겨우 사람 축에 낄 수 있지 않겠느냐”(박석무, “다산 정약용을 유배지에 만나다”,p,383)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는 대 사회적으로 마치 폐족처럼 여겨지는 아픈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생존하기 위한 여러 방법론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존의 기술마저도 우후죽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세인교회 지체들에게 권면합니다. 다산의 말처럼 위기일수록 더 공부해야 하고, 더 백배나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 공부와 노력은 방법론이 아니라 원색의 복음을 되찾는 것입니다. 믿음의 원리를 붙잡읍시다. 믿음으로 돌아가십시다. 은혜의 자리로 다시 복귀하십시다. 방법과 스킬을 찾지 말고 믿음과 은혜라는 원리로 돌아가십시다. 왜 믿음입니까? 믿음만이 주군의 은혜를 다시 회복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