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14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2:15-21 제목: 인 크라이스트(IN CHRIST) 서론) JTBC에서 방송하던 김제동의 톡투유라는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한 동안 출연하던 사회학자 노명우 박사가 쓴 ‘세상 물정의 사회학’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술자리에서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다. ‘모텔 옆 교회, 교회 옆 모텔은 일종의 토탈 패키지라고. 모텔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모텔에서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며, 죄를 지은 사람의 숫자만큼 속죄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는 모텔의 수만큼 교회가 필요한 거라는 말이다. 이 말은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종교를 조롱하기 위해 지어낸 불경한 농담처럼 들리고, 무신론자에게는 자신이 종교를 멀리하는 이유를 정당화시켜주는 냉소적인 주장이다.”(p,100) 노 박사의 글을 읽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얼굴이 후끈거렸기 때문입니다. 모텔과 교회가 패키지라는 말에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이 저에게 몰려왔습니다. 죄짓고 그 죄를 탕감받기 위해 아주 손쉽게 찾을 수 있는 도구가 교회라는 사회학자의 간접적인 글 토로는 오늘 목사로 사는 저에게 대단한 분노로 다가왔습니다. 죄를 짓는 것에 대한 탕감이 마치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곧바로 취할 수 있는 그런 질 떨어지는 삼류가 바로 교회라는 이 에두름의 지적이 몹시 저를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면서 사회학자인 자끄 엘륄이 이렇게 탄식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워진 수많은 교회는 자판기 교회와 별 다름이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예수를 변장시켰는가? 위풍당당한 예수, 사회주의자 예수, 어릿광대 예수, 인간의 법정 위에 군림하는 예수, 법과 질서의 수호자 예수, 혁명가 예수 등등이다”(뒤틀려진 기독교, p,307) 왜 이렇게 교회는 무시당할 수밖에 없을까요? 더 기막힌 것은 그 무시당함이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손 치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에까지 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요? 종교학자는 종교학적으로, 사회학자는 사회학적으로, 과학자들은 과학적으로 교회가 무사당하는 이유를 각자의 전문가적인 식견으로 설명하려 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우리 교우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세속적인 학문의 원인 규명에 대하여 전하려고 하는 마음은 1도도 없습니다. 제가 오늘 우리 세인 지체들과 나누고자 하는 설교를 통한 사자후는 전적으로 성경적인 접근의 메시지입니다. 왜 이렇게 교회가,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무시를 당하는 시대가 되었을까요? 본론) 본문을 통시적으로 해석할 때 얻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 본질 상실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갖고 몇 차례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가장 중요한 본문의 종합적인 교훈을 먼저 던지려고 합니다. 본문 2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개인적으로 제가 너무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와 바나바와의 단두대 매치를 통하여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그들의 외식에 대하여 단호하게 정죄했습니다. 어떤 의미로 격(格)에 있어서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인지도가 교회 공동체에서 그리 높지 않았던 바울이었지만 그는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교회 중직들의 신앙인답지 않았던 부분에 대하여 서슬이 시퍼렇게 단죄했습니다. 바울은 어디에서 이런 담대함이 나왔을까요? 조금 전에 함께 읽었던 전율하게 하는 감동의 메시지 안에 그 답이 들어 있습니다. 두 대목을 복기하겠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대목을 합치며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바울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은 바울 안에 계셨다는 최고의 결론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풀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내가 있어 내 길을 내 의지대로 내가 선택해서 가다가, 은혜로 주님을 만나 내가 가는 그 길을 돌이켜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주님이 지시하시는 그래서 주님이 원하는 길로 가겠다고 결심하고 그 길을 걷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렇게 경천벽지 할 혁명이 나에게 일어난 동기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있던 나를 버리고 내 안에 주군이신 예수께서 좌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맘대로 사는 삶을 포기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지난 주간, 새벽예배 성서 일과는 사무엘상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집요하게 그를 죽이려고 했던 숨 가빴던 다윗의 고난기록을 읽으면서 심정적으로 다윗을 응원했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다윗이 엔게디 동굴에 숨어 있을 때 그를 살해하기 위해 찾아온 사울을 도리어 다윗이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습니다. 헌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기름 부은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상황의 주변을 살펴보면 다윗의 입장은 정말로 처절했던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더 이상은 숨을 곳이 없을 만큼 촘촘히 다윗이 대적들이 득실대던 시기였기에 다윗에게는 암흑과도 같은 시기였다는 말입니다. 시편 27: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이 시가 바로 엔게디 동굴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려준 바로 그 칠흑같이 어두웠던 시기를 회상하며 쓴 시입니다. 어떻게 다윗은 이렇게 태연하게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대답을 바로 앞 절인 시편 27:1절에서 찾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다윗이 자신을 소유격으로 고백한 것이 보이십니까? 다윗의 빛이 누구였습니까? 다윗의 구원이 누구였습니까? 다윗의 생명의 능력이 누구였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너무나도 당연히 그 분 안에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성도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형식입니까? 종교적인 행위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성도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설명한 것은 목사의 우격다짐이 아닙니다. MBC 텔레비전 앵커 출신 목사인 조정민 목사가 쓴 ‘WHY JESUS’를 읽어 보셨습니까? 그는 이렇게 책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일 기독교가 단지 종교에 불과했다면 나는 굳이 불교를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은 기독교를 종교라는 틀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예수를 만난 사람은 예수가 종교가 아님을 압니다. 그러므로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p,15) 어제 새벽예배시간에 사무엘하 6장을 읽었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절 블레셋에게 빼앗긴 법궤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이방의 땅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좌시할 수 없어 여러 가지의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 지경으로 옮겨 제사장 반열에 있었던 아비나답의 집에 20년간을 보관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법궤에 대하여 사무엘도, 사울도 여타 다른 제사장들도 법궤가 있어야 할 성소인 예루살렘으로 옮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괘씸히 여기셨고 결국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마음을 들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이거하도록 하셨음을 어제 새벽예배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 기록된 아비나답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이거 사건은 단순히 법궤를 이거하는 문자적인 설명만을 요구하는 기사가 아님을 나누었습니다. 이 사건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방치했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다윗의 영적 행위를 통해 이제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의 회귀를 선언하는 대단히 혁명적인 신앙의 행위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제 새벽에는 나누지 못했던 한 가지 일을 오늘 주일에 살피겠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혁명적인 신앙의 행위를 간직할 수 있었느냐는 제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사울 왕과 관계를 설명한 바로 그 대목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의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다윗은 자기 스스로 철저하게 주님 안에 있는 자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에 맞는 주제 절을 사도행전 11:26절로 정했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주존심이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단어를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스’라고 표현한다고 했습니다. ‘크리스티아노스’를 영어 문장으로 번역하면 이렇게 쓴다고 했습니다. Those who are in Christ.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이라고 번역합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정체성을 본문에서 바울은 정말로 주옥같은 표현으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20절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묻겠습니다. 무늬로 대답하지 마십시오. 형식으로 대답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주님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입니까? 그렇다면 증거를 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이라면 증거를 대야 합니다. 어떤 것이 증거입니까? “GOD FIRST, OTHER SECOND, THIRD MYSELF”입니다. 제 일 순위가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의 우선순위가 예수이십니까? 이 순위가 분명한 자만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사수하는 자요,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인 것입니다. 이 본질을 상실하지 않고 살았던 바울이었기에 그는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20절을 의미를 부여하며 다시 읽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 목양터 이야기마당에 글을 연재한 대로 지난 목요일 굿모닝 정형외과에 방문해서 왼쪽 목 5,6번 경추가 심하게 눌려 있는 것을 알고 목 경추 신경 박리 시술을 급하게 받게 되었습니다. 시술을 마친 이 원장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세 가지를 생활화하시면 좋아집니다. “첫째, 스트레칭을 생활화하는 것, 둘째, 사우나 자주하기, 셋째, 자리에 2시간 이상 오래 앉아 있지 않기입니다.” 이 원장의 말은 인간의 뼈를 든든하게 하는 매뉴얼과 같은 지침이었습니다. 세 번째를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는 직업을 갖고 있기에 노력을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해보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해보려고 합니까? 전문의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반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원장이 이렇게 저에게 당부를 하고 진료를 마쳤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 저에게 입에 쓰고 있는 마스크를 제거하고 머리에 가다듬은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금년에 처음 병원에 오셨는데 그냥 가지 마시고 축복기도를 해 주시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손을 잡으며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잡은 그 손을 자기의 머리로 올렸습니다. 몸을 막 굴려 육체가 나약해짐으로 조금 전, 훈계 아닌 훈계로 야단(?)을 친 목사에게 이제는 안수기도를 받으려는 이 원장님에게 마음껏 제가 할 수 있는 영적인 권위를 갖고 강복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날, 이 원장에게 이렇게 강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주 안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사랑하는 형제에게 의미 있는 치료를 감당해 주는 선한 승리가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주님 안에 있는 자는 주님의 마음을 품습니다. 어떤 것이 영적인 우선순위인지를 분별하는 자입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초점을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하는 일체의 일과 범사를 주의 뜻으로 알고 행합니다. 명심하십시다. 내 것을 먼저 생각하는 자는 주님 안에 있는 자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자입니다. 주님 안에 사는 자는 주님의 생각을 갖고 있기에 언제나 주님 우선주의로 사는 자입니다. 내 밖에 방치되어 있었던 주님의 법궤를 내 안으로 옮기는 자입니다. 이 은혜로 사는 자는 그래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우연히 ‘한 끼 줍쇼!’ 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잠시 보게 되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프로그램은 불특정한 장소로 출연자들이 가서 저녁을 함께 먹는 포맷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출연자들은 전혀 시나리오에 미리 나와 있는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상황에 따라 상당한 변수를 갖고 대처해야 하는 그런 방송입니다. 마침 저녁식사를 하다가 이 프로그램을 만났는데, 출연자들이 경기도의 어느 한집을 택해 저녁식사를 요청하게 되는 과정이 여과 없이 방송되었습니다. 그날 출연자들이 우연히 택하게 된 그 집에서 호주로 보이는 남자가 나와 강호동이라는 출연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 끼를 같이 할 수 있는지를 묻는 출연진에게 그 집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이 수요일이라 수요 예배를 가야합니다. 더군다나 오늘 예배 순서에 제가 맡은 것이 있어서 그래서 함께 하지 못합니다.” 순간, 저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그렇게 거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출연자들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 남자 분이 그들을 멈춰 세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그리고 약간의 여유를 갖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상의하고 나와 다시 강호동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 교회 장로님께 전화를 해서 방송국에서 이런 우연한 요청이 들어왔음을 말했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허락을 해 주어서 방송을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극적 반전이었습니다. 출연진은 반색하며 이렇게 방송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한 끼 줍쇼 프로그램은 해피엔딩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자의든 타의든 그날 방송분으로 나기지 않아도 될 멘트가 JTBC 종편 방송을 타고 나간 것이 있었습니다. 집주인 남자가 강호동씨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당신이 오늘 수요 예배의 한 순서를 맡았지만 수요 예배는 사람도 많이 나오지 않는 예배이니까 다른 성도로 대치할 테니 염려하지 말고 방송에 협조하라는 장로님의 전언을 그대로 방송해 준 대목이었습니다. 우연히 방영된 이 멘트를 듣다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지금 한국교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 그래서 뭔가를 들킨 것 같은 수치감이 저에게 밀려 왔습니다. 별로 사람도 많이 모이지 않는 중요하지 않은 수요 예배, 그게 방송에 나온 그 교회장로만이 소회인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우리 교회도 매일반입니다.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 순서를 맡았지만 일생일대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하는 전국 방송을 탈 수 있는 기회를 놓칠까봐 아주 순발력이 있게 교회 중직과 상의하여 예배를 포기한 그 남자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저에게 들었습니다. 이게 오늘 한국교회의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의 똑같은 수준이 아닌가! 主尊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GOD FIRST, OTHER SECOND, THIRD MYSELF”입니다. 이것이 주존심입니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의 민낯이 무엇입니까? “I FIRST, OTHER SECOND, THIRD HIMSELF” 로 전락한 것입니다. 오늘 저는 주어진 본문 중에 교리적인 설교를 피하고 20절에 담긴 영적 은혜를 먼저 나누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나는 세인 지체들이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세인지체들이 명목적 그리스도인으로 남는 갑각류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다윗처럼, 바울처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나의 왕 내 노래 내 생명 또 내 기쁨 나의 힘 나의 검 내 평화 나의 주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나의 왕 내 노래 내 생명 또 내 기쁨 나의 힘 나의 검 내 평화 나의 주 유익함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