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탈락되지 마십시다2024-02-26 16:05
작성자 Level 10

2018년 2월 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13번째 강해)

 

본문갈라디아서 2:11-14

제목탈락되지 마십시다.

 

서론)

 

지난 주간에 아내가 셀 사역을 다녀와서 참 은혜로운 간증을 들었다고 한 번 즈음 전 교우들이 공유했으면 한다고까지 하며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설교를 펼치려고 합니다.

아내가 사역하고 있는 지역 셀에 지금 학생회 교사로 사역하는 김길순 집사가 있습니다.

지난 주 셀 사역의 얼음 깨기가 이러했습니다.

나의 신앙이 흔들릴 때그리고 이겨낸 방법은?

이 나눔 속에 김길순 집사가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고 전언해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사기를 강해할 때많이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⓵ 성경에 나오는 사사라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별 볼 일이 없이 형편없는 자들이었다는 점에서의 실망 때문이었습니다도대체 하나님이 택한 사사들이 어떻게 나보다도 못한 성품과 삶을 살았지뭐 별 거 아니네싶어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⓶ 사사기 성경 강해의 난해함이라는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잘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씀을 들으면서 느꼈던 자괴감으로 힘들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해서 내린 결과내가 이 사사기 강해가 끝나면 교회를 나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한 것이었습니다.

단 그래도 사사기 강해가 끝날 때까지 버티고 참아보겠다고 마음에 다짐을 하면서 사사기 강해를 끝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강해를 인내하면서 듣다가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쏟아지는 은혜를 경험했고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일하심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하였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김길순 집사의 소회의 결론은 그래서 이렇습니다.

큰 일 날 뻔했다.”

저는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받는 최고의 복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라는 복이고반대로 최악의 심판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상념입니다.

지난 주간 새벽 성경 통독 시간에 읽었던 룻기에 기록된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룻기 1:14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아무렇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구절이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기점으로 오르바는 이름이 사라집니다.

허나 룻은 이후 계속해서 성경 역사의 정 무대 위에서 사라지지 않는 인물로 확정됩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녀는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는 구속사의 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주인공으로 남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마 1:5절을 봅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룻기 1:14절에 기록된 붙좇았더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다바크는 아주 밀접하게 착 달라붙어 있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NLT에는 ‘Clung tightly to’ 즉 바짝 붙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베들레헴 행에서 탈락되지 않기 위해 긴장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신앙의 자리에서 탈락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승리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영적으로 긴장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바로 이 은혜와 승리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본문 13절을 읽겠습니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우리는 지난 주일베드로라는 정말로 그러면 안 되는 인물이었던 베드로가 복음이 복음 되는 자리에서 이탈되었던 쓰라린 과거가 있었음을 살폈습니다.

오늘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수장이었던 베드로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카운터파트너가 되는 동등한 입장에 있었던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던 바나바를 살피려고 합니다.

베드로의 외식에 넘어간 자는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유대적인 성향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했습니다.

헌데 누가는 한 명을 더 첨가해 놓고 있습니다.

바나바입니다.

13절에 기록된 남은 유대인이라는 명칭은 특정한 한 개인을 지칭한 것이 아니기에 그리 중요한 이슈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나바가 외식에 넘어갔다는 지적은 적어도 수리아 안디옥 교회 공동체의 입장으로 볼 때는 치욕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바나바는 누구입니까?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수장이었습니다.

그는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자 예루살렘 신앙 공동체의 수뇌부가 이방 교회에 일어난 기이한 일들(교회를 세웠다는 것)을 조사하고 그곳에서 교회를 지도하라는 위임을 받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에 그렇게 파송되어 초대 담임목회자의 신분으로 사역했던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볼 때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어느 그뿐입니까?

바나바는 안디옥교회 목회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13년간 고향 다소에서 칩거하고 있는 사울을 데리고 오기 위해 아마누스 산맥을 넘는 위험을 무릅쓰고 넘어가 결국은 그를 데리고 와 사울을 동역자로 세웠던 정말로 괜찮은 하나님의 일군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역을 잘 감당하여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을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사역을 감당했던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결정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렇게 사역하던 수리아 안디옥교회 공동체의 신임을 받고 세계 선교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는 제 1차 전도여행의 선교사로 바울과 함께 파송된 1차 선교여행의 팀장이 바나바였습니다.

이렇게 귀한 위임을 받고 제 1차 전도여행의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이들은 이방 선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동선은 이러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에서 파송되어 실루기아살라미바보버가비시디아 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라더베로 갔다가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으로 리턴 하여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하는 숨 가쁜 사역이었습니다.

이런 동선으로 그려진 제 1차 전도여행 중에 특별히 오늘은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 14장의 배경이 되고 있는 루스드라 사역을 교우들에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루스드라 사역은 곧바고 본문 해석에 대단히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고니온에서 사역을 한 도중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해 쫓겨나서 서남쪽으로 45킬로미터 떨어진 루스드라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피신해 온 두 사람은 루스드라로 사역지를 옮긴 뒤에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루스드라에서 길거리 전도사역을 하는 동안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기 된 사람을 발견하고 그가 말씀을 잘 듣는 것을 본 바울은 담대하게 바로 일어서라고 선포하자 그가 일어나 걷는 기적을 현장에서 보게 됩니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일어나보지 못했던 그가 일어나자 루스드라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무지한 루스드라 사람들은 신이 하늘에서 강림했다고 보고 바울을 허메(헤르메스그리고 바나바를 쓰스(제우스)라고 지칭하며 그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 일을 안 바나바와 바울은 강력하게 그 일을 저지하며 우리들은 너희들과 똑같은 사람임을 선포하고 바로 그 헛된 일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하기에 이릅니다.

제우스를 신을 섬기고 헤르메스 신을 섬기는 일들이 무익한 일이며 쓸데없는 일임을 선포하자 급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루스드라는 헬라 문화 지역에서 섬기던 최고의 신인 제우스와 그의 전령인 헤르메스를 섬기고 있었기에 그와 관련된 일로 먹고 사는 자들이 지천에 깔린 도시였습니다.

헌데 바울이 그들을 섬기는 일은 헛된 일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선언은 곧 혁명과도 같은 위험한 발언이었고바울의 말을 듣는 것은 곧바로 루스드라 경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 헬라의 신을 섬기며 우상 산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생계가 끊어지는 절박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직전 선교지역이었던 이고니온에서 내려온 바울의 적대자들은 루스드라의 유대인들과 지역민들을 충동질하여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는 자들로 돌변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이를 설명해주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곱씹어 보십시다.

사도행전 14:19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그렇습니다.

바울을 신으로 섬기려던 자들이 자기들의 이익에 해가 되자 곧바로 그들은 바울을 죽이는 자들로 변질 된 것입니다.

그들이 던진 돌을 맞은 바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에 의하면 거의 죽게 되었음을 보고합니다.

읽어드린 사도행전 14:19절에 죽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세네스코는 능동태 완료 시제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루스드라 사람들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바울이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누가가 증언했다는 말입니다.

당시 루스드라 성내의 내규 중에는 성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돌을 던지지 말라는 법이 있었습니다.

해서 성 사람들은 이 법에 저촉을 받지 않기 위해 성 밖으로 죽어가고 있는 바울의 육체를 질질 끌고 시외로 나온 것입니다.

사도행전 14:20절을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제자들은 거의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의 시체를 거두기 위해서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바울의 시체 앞에 모였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1차 전도여행에 함께 동참했거나 아니면 루스드라의 회심한 자들이거나 둘 중의 하나인 제자들이 바울의 훼손된 육체 앞에 둘러섰습니다.

왜요?

장사를 지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둘러섰다.’고 번역된 헬라어 퀴를루오’ 는 장사를 지내기 위해 모여든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울의 시신처리를 위해 모여든 제자들 앞에서 바울이 보란 둣이 일어섰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일이 많은 바울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말입니다.

바울이 살아난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이동하였음을 누가는 보고합니다.

바로 이 장면은 감추어져 있지만 쓰라린 아픔을 담고 있는 장면입니다.

무엇일까요?

바나바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루스드라에서 사역을 하던 선교사의 팀장이 누구입니까?

바나바입니다.

사도행전 13:2-3절에 기록된 안디옥 교회 파송 선교사의 팀장은 누구입니까?

바나바였습니다.

그래서 서열은 반드시 바나바와 바울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름이 앞에 기록된 자를 서열 우선으로 보는 것이 관례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선교 팀장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정도로 핍박을 받을 때 바나바는 돌멩이 하나를 맞지 않고 온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의 어느 한 구절도 바나바가 바울처럼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증언해 주는 구절은 없습니다.

다만 죽다가 살아난 바울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바나바는 바울이 일어난 뒤에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더베로 옮겼던 것만 보고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목숨을 걸고 루스드라 지방의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는 바로 그 시간 전혀 영적인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방관하고 있었던 구경꾼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기화로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똑똑했던 제자 누가는 이렇게 역사를 서술합니다.

제 1차 전도여행 이후의 사건인 제 1차 예루살렘 공의회에 파송된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상태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15:2절을 주목하여 주십시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루스드라의 참패를 경험한 바나바는 드디어 역사의 서술에서 탈락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로 서술이 기록이 바뀌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위대했던 이름의 주인공 바나바는 사도행전 16장 이후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영적 순위 경쟁에서 밀려납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궤도에서 일인자가 아닌 2인자로 탈락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전 이해를 전제로 본문에 접근해야 합니다.

이렇게 영적 순위 경쟁에서 처절하게 탈락당하고 배제된 바나바는 오늘 본문에서 또 한 번 영적으로 밀려난 상태의 치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13다시 한 번 음미하겠습니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이 한 구절을 본문의 한 구절로 대하는 자들은 그 심각성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4장의 사건과 매치하여 살펴보는 독자들은 바나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우리들이 나누어야 하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 신앙의 경주에서 탈락되지 않으려면 영적으로 긴장해야 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궤도와 그림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그림과 궤적으로 누가의 기술이 바뀐 것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실수가 아니라 누가의 대단히 의도적인 신학적 교훈이 담겨 있는 묘사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독려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1-2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영적 긴장감이 있어야 합니다.

김길순 집사께서 힘들어했던 사사기 한 대목을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들추어 보기를 원합니다.

사사기 17:7-13절입니다.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그 청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사사기 17장이라 함은 사사기내에서 마지막 사사로 기술된 삼손의 비극적인 삶이 마무리 된 상태를 전제합니다.

이후 사사의 맥도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만신창이였는지를 가늠해 줍니다.

유다 베들레헴 출신의 한 청년 제사장이 고향에서 더 이상 살 수 있는 길이 없어서 타 지역인 에브라임으로 떠돌이가 되어 도착했습니다.

이 레위 출신의 청년이 그렇게 한 이유는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왜요?

삼손 이후 사사시대에 제사가 드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이스라엘에 제사는 별의미가 없었습니다.

기업이 없었던 레위 청년은 그래서 베들레헴을 떠나 에브라임으로 직장을 찾아 떠나온 것입니다.

헌데 마침 그 지역에 미가라는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머니의 재산을 도적질하여 별로 사이가 안 좋아 금이 갔는데 미가의 어머니가 도적질해간 재산을 아들에게 돌려받은 뒤에아들과 화해한다는 구실로 아들을 위해 사설 단을 만들어줍니다.

미가는 동네에서 배회하는 낯선 청년을 만났는데 알아보니 제사장 지파 출신임을 알고 그를 사설 제사장으로 계약을 맺어 고용합니다.

일자리를 얻은 레위 청년은 숙식을 물론 월급까지 받아 생활고를 해결하는 기회가 되었고미가는 자기가 고용한 사설 제사장이 하나님께 복을 빌어주면 또 다른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고용 효과를 기대하며 서로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의 너무나 참담한 결과를 기록한 사사기 17:13절은 오늘 독자인 저에게 쓰디쓴 치욕을 안겨주는 듯한 영적 기상도를 알려줍니다.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너무나 그럴듯하게 보이는 미가와 제사장의 이야기가 왜 삼손 기사 이후에 실렸습니까?

답을 말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바로 이 시대는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던 시대임을 고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적인 긴장감이라고는 0.1도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대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제사장들이 할 일을 잃어버린 제사가 무너진 시대,

그래서 먹고 살 길을 찾기 위해 제사를 포기한 시대,

하나님의 공동체를 하나님이 요구하는 바른 삶으로 인도해야 할 제사장이 본인의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그냥 물질의 개가 되어 개인 사설 가정의 복 전달 전도사로 전락된 최악의 시대,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이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인지 조차 모르는 미가의 무감각이 별로 죄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판을 치는 비극적 ,영적 암흑의 시대이 시대가 바로 사사 시대의 후반기 막장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에서 담임목사가 왜 사사시대를 예로 들었습니까?

저는 오늘 이렇게 진단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2019년은 사사시대 플러스의 시대라고.

사사시대보다 더 영적인 긴장감이 와해된 시대라고.

사사시대를 방불 하는 영적 무너짐의 시대라고.

강단에서 죄를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기호를 건드린다고 냉소하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십자가를 전하면 시대착오적인 단어는 쓰는 게 아니라고 훈수 드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복음을 말하면 박물관이나 백과사전을 찾아보는 게 더 좋을 거라고 비아냥대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주님의 피 흘리심을 묵상하라면주님의 치유하심이라는 것을 먼저 말하라고 압박하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봉사와 헌신을 말하면 지금 이 정도로의 헌신과 봉사만으로도 난 신앙의 A라고 항변하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예배가 무너지지 않도록 긴장하라고 하면 한국교회만큼 예배가 많은 나라가 어디 있냐고 반색하며 예배를 무시하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완전히 주님의 삶으로 돌아서라는 회개의 토로가 이어지면 복을 선포하라고 복을’ 이라고 대놓고 대드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영적으로 한번 무너졌던 바나바그는 또 다시 무너지고 은혜의 자리를 이탈하여 하나님의 자리에서 탈락되는 것은 더 쉬웠습니다.

기억하십니다.

영적으로 긴장하지 않으면 두 번 무너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지난 아시안 축구 대회 8강 토너먼트에서 카타르에게 일격을 당하고 탈락했습니다.

당시 그 탈락으로 인해 엄청난 비난의 화살이 대표팀에 쏟아졌습니다.

설마 피파랭킹 93위의 나라인 카타르에게 패배할까의 자만심이 8강 토너먼트에서 짐을 싸야 하는 신세가 되게 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운동선수들에게 자만심은 암세포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찌 운동선수들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신앙인들은 오히려 더 긴장해야 합니다.

영적 긴장감이 무너지는 순간저와 여러분은 바나바처럼 처절한 역전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가야바의 뜰에서 처절한 패배를 이미 맛보았던 베드로는 순교를 앞두고 이렇게 동역자들에게 역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7절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기도하겠습니다.

 

모든 민족에게 주 성령 부어주소서

모든 민족에게 주 성령 부어주소서

하나님의 백성 주의 말씀 주시고

꿈과 환상주사 주의 비밀 알리소서

우리 믿사오니 하늘이 주의 날 선포케 하소서

 

모든 열방에게 주 성령 부어주소서

열방 중에 오사 주를 경외하게 하시고

크신 능력으로 땅과 하늘 흔드소서

주를 기다리니 만물이 주의 날을 보게 하소서

 

후렴)

 

그날엔 주의 영이 임하여

큰 부흥 이 땅위에 일어나리라

모든 영혼 깨어 일어날 때

주 예수를 부르는 자는 구원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