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10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2:1-5 제목: 역전하십시다. 서론) 지난 주간에 제가 교회 홈페이지와 제 개인 SNS 에 올린 글을 우리 교우들과 함께 나무면서 오늘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종호의 연세대 신학과 입학에 즈음하여 직전 교회에 막 부임을 했을 때, 30대 중반의 한 교우가 저에게 찾아와 신학교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가 신학교를 가겠다고 저에게 추천서를 의뢰하면서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회에서 이것도 해 보고, 저 것도 해보았는데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다 실패했습니다. 이건 분명히 하나님께서 제 길을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해서 억울하지만 더 매 맞기 싫어서 신학교를 가기로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단호하게 추천서를 써 줄 수 없노라고 거부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⓵ 세상에서 다 해보았는데 다 실패했기에 이제는 신학교를 가겠다는 발언에 대한 분노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 친구가 목회자가 되는 것을 얼마나 우습게보았으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에 대한 괘씸함 때문이었습니다. ⓶ 그는 지적인 능력에 있어서 바른 신학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다는 판단이 저에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소명만 있지 실력이 안 되는 자들이 신학을 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저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학교에 들어가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허나 제 마음 속에는 신학교에 가려는 사람들은 적어도 세 가지의 자격을 구비했으면 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⓵ 정상적인 가정에서 부모들이 올바른 신앙적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것을 보고 자라며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상태에 있는 자녀가 신학을 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⓶ 가능하면 고등학교 시절, 성적이 상위권에 있었던 학생이었으면 하는 점입니다. ⓷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는 로드십을 인정하는 학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이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만드시는 분임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호는 지난 대학 수학능력 시험에서 정말로 아쉽게 국어 평가에서 두 문제를 틀린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진로에 대한 많은 길이 열려 있었을 것이고, 본인이 마음을 먹으면 나름 엘리트주의, 성공지상주의 천국인 대한민국 사회에 부합하는 길로 충분히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아이보다 부모가 더 그런 세속적 영예가 보장되어 있는 길로 아들을 압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종호도. 장진영, 김문숙집사도 서로 인격적인 대화와 기도 중에 종호를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지원하도록 로 했고, 그 결과 합격 통지를 받았습니다. 일련의 일을 경험하면서 저는 그 가정을 위해 중보하고 응원하는 담임목사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임했습니다. 조금 더 과장법을 동원하여 표현한다면 이 일은 제천에서 사역을 시작한 16년이라는 세월의 굴곡 안에서 저를 가장 기쁘게 해 준 복음과도 같은 쾌거로 다가왔습니다. 지금은 교회전성시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달갑게 보는 시대는 더 더욱 아닙니다. 설상가상으로 앞으로 한국교회의 미래의 색깔이 BLUE COLOR입니다. 이런 상황에 신학이라는 학문을 택한다는 것은 세간의 시선으로 접근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길을 선택한 종호에게는 목사로서 표할 수 있는 최고의 격려를, 부모집사님들에게는 더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뜨거운 격려와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아들에게 신학의 지평을 열며 걸어가도록 부모가 함께 힘을 합칠 수 있었던 가장자리에는 종호도, 사랑하는 집사님 부모도 섬기고 있는 담임목사의 사역의 정신과 신학의 패러다임을 인정해 주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더욱 같은 길을 가기 위해 첫 걸음을 내디딘 종호와 장 집사님과 김 집사님을 강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학자로 서 가는 길은 정말로 녹록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수고와 노력 그리고 각고의 헌신과 최고의 공부가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호의 심성을 압니다. 그래서 너무 귀하고 또 귀합니다. 해서 제가 사역을 하는 동안은 물론 은퇴 이후에도 종호에게 신학을 먼저 한 선배로, 학교 동문 선배로, 그리고 종호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담당했던 처녀 목사로서 위기에 빠진 한국교회를 지성과 영성으로 다시 살리는 바울과 같은 동량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종호가 아베 피에르와 유진 피터슨과 같은 영성을 갖춘 신학자로, 존 스토트와 팀 켈러와 같은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목회적 신학자로, 톰 라이트, 마크 놀 그리고 마이클 호튼과도 같은 최고의 신학자가 되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종호의 연세대학교 신학과 입학 소식은 제천세인교회의 최고의 쾌거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일 속상한 것이 있다면 교회가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왜 교회가, 성도가, 목사가 무시를 당할까? 답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교회와 성도와 목사가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식이 탈락된 교회를 세상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상식이 배제된 성도를 세상은 나무랍니다. 상식적이지 않은 목사를 세상은 먹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상식적이지 않은 교회, 목사, 성도는 당해도 쌉니다. 이런 아픔의 시대에 종호의 연세대학교 신학과의 입학 소식은 단지 종호 한 사람의 쾌거가 아니라 저에게는 가장 상식적인 루트로 회귀하는 일로 여겨졌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점수를 받고 신학과를 간 것은 조금 손해 보는 일이 아닐까! 더 세속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방법이 있는 왜 굳이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지!” 등등이 세상 사람들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세상 사람들의 관점을 상식이라고 이해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교회를 소개하는 명제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손 내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에게 살려달라고 손 내미는 교회” 이게 상식입니다. “목사님, 슬로건 목회입니다. 꿈 깨세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렇습니까?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런데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의 상식이고, 제가 믿는 상식은 이런 상식입니다. 예레미야 33:2절의 상식 말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이 이루시는 과정을 역전의 믿음이라고 정의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힘이 정의가 되는 교회, 문 닫아야 합니다. 사람의 숫자가 정의가 되는 교회, 문 닫아야 합니다. 교회의 예산이 정의가 되는 교회, 하루 빨리 교회 문을 닫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것입니다. 교회의 기득권이 세력을 휘두르는 교회, 그건 이미 교회가 아니라 강도의 소굴입니다. 교회의 물리력이 세력을 휘두르는 교회, 그건 이미 교회가 아니라 괴물 집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런 괴물과도 같은 교회와 세상에서 역전승하게 만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오늘을 설교의 주제를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선포합니다. ※ 복음의 능력이 압도하는 교회입니다. 저는 이 교훈을 본문 해석을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온 본인의 경험담을 갈라디아 교회의 배교자들과 복음을 훼손시키는 자들에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2장 전체에 대한 이해뿐만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전체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14년이라는 시간은 과연 언제일까? 교우들에게 14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의 주석을 실시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다루어야 하는 것은 바울의 회심 연도입니다. 고린도후서 11:32-33절을 읽어드립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두 번째 행한 편지에서 밝힌 이 성서적 내증은 바울의 회심 연도를 가늠하게 해 주는 좋은 자료입니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 9:23-25절과 연관되는 구절입니다. 사도행전 9:23-25절을 봅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내리니라” 나바티아 왕국의 왕이었던 아레다 4세가 재위한 시기가 BC 9- AD 39년으로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을 전제할 때 바울의 회심은 그가 회심한 이후에 다메섹으로 갔기에 적어도 주후 39년 훨씬 이전 사건으로 추론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런 연대기를 설정한 학자들은 바울의 회심 시기를 약 주후 33년 즈음으로 보는데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바울이 회심 이후 약 3년을 아라비아로 내려가 자신을 추슬렀습니다. 그리고 난 이후 바울이 첫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복음을 증언했다면 그 시기는 어림잡아 주후 36년 즈음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숙의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해석입니다. 바울은 적어도 세 번에 걸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성경은 내증으로 보고합니다. ⓵ 제 1차 방문은 지난 주일에 교우들에게 설명한 회심 이후 아라비아에서 3년을 칩거한 뒤의 방문입니다. 이 방문은 참으로 녹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예수 핍박자였던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증언하는 것이 미덥지 않았던 예루살렘 교회의 거부감 때문이었습니다. 해서 바울을 독려하던 바나바는 그를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경유하게한 뒤에 다소로 보냈다고 지난주에 우리는 살폈습니다. 앞에서 저는 예루살렘을 바울이 회심한 이후 방문한 시기를 주후 36년 즈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교회사의 두 번째 위기라고 말하는 예루살렘 제 1차 종교 공의회의 시기입니다. 학자들은 할례에 대한 끝장 토론의 회의였고, 이방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 교회와 유대인들을 위한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의 담판 승부를 벌였던 이 회의 연도를 주후 49-50년 즈음을 설정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14년 뒤에 올라간 제 2차 예루살렘 방문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⓶ 제2차 방문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AD 49-50년에 진행된 예루살렘 제 1차 공의회 때 찾아간 방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방문은 우리들이 잘 아는 할례 논쟁을 불식하기 위한 최종 담판을 위한 방문이었습니다. 적어도 바울과 바나바가 두 번째 방문한 예루살렘 총회의 방문은 다음을 전제합니다. 바나바가 13년이라는 세월동안 다소에서 칩거하며 자신의 모남을 다듬고 동시에 자신의 혈기를 다시 한 번 예수의 은혜로 누그러뜨리며 자신을 쳐서 복종하던 훈련의 시기를 마치고 수리아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함께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그렇게 사역을 1년여 감당하고 났는데 유감스럽게 안디옥 교회는 매우 심대한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기인되어 있었던 율법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에 침투하여 퍼뜨린 할례 논쟁으로 인한 위기였습니다. 대다수가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져 있는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대하여 암묵적으로 방관하던 예루살렘 교회의 소위를 도저히 그대로 묵과할 수 없었던 안디옥교회 공동체는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디도를 중심으로 한 할례 논쟁에 대한 끝장 토론을 할 대표단을 파견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을 존 스토트를 비롯한 학자들은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참고로 다른 학자들은 이 방문 이전에 구제금을 전달하여 한 번 예루살렘에 바울과 바나바가 방문했다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음을 밝힙니다. 그러나 존 스토트를 비롯한 대개의 학자들은 구제헌금 전달과 할례 논쟁 담판을 같은 동선에서 해석하고 있는데 저도 여기에 동의한 것입니다.) ⓷ 세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사도행전 21장에 기록된 순교 여행으로의 방문입니다. 로마로 가기 위해 위한 경유지로 방문했던 예루살렘 방문은 바울이 자기의 사명을 마치기 위한 장렬한 드라마와 같은 방문이었습니다. 대체로 네로의 박해 시기인 주후 64-65년경에 바울이 순교를 당했다고 학계에서는 보고하는 데 바울이 로마로 가기 전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 관저에서 약 3년 간 구금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바울의 세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주후 60년 경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너무 세밀하게 해석을 해서 교우들에게 어려움을 준 것 같은 미안함이 있지만 그래도 질을 높이기 위해 드린 목사의 고육지책이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이상,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주석을 전제로 오늘 우리들이 주목하여 살필 내용은 두 번째 방문입니다. 바울이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 이후 14년 만에 또 다시 방문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은 1차 방문 때처럼 외로운 방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나바와 디도라는 동역자가 함께 이 동선에 참여했음으로 1절에서 알립니다. 동시에 바울은 이 두 번째의 방문 목적으로 본문 2절에서 적시합니다.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저는 이 구절을 만나면서 적지 않은 전율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방문한 동기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계시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또 하나 사사로운 방문이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것을 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수신자들에게 강조했을까요? 방문의 권위를 분명히 피력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다시 가장 나이브하게 표현하겠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다시 두 번째로 올라간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소회 때문도 아니요 가벼운 여행도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성령의 역동하심, 그리고 주님이 계시로 그렇게 이끄셨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로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방 가운데에서 전하는 복음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달음질이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을 믿고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저는 전율함의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을 위하여 제시한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명제입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하여 오셨고, 나를 위해 고난 받으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고, 나를 위해 승천하셨고, 나를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명제였습니다. 이렇게 나를 위해 구속의 캐리그마를 쓰신 주님을 믿으면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대단히 놀라운 것이 무엇입니까? 이 엄청난 능력의 복음을 예루살렘에 올라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예루살렘 교회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제시하고 전하기 위하여 올라간 것이라고 피력한 것입니다. 왜 이 복음이 그들에게 제시되어야 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캐리그마에 관한 복음에 대하여 미온적이었습니다. 부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는 복음 이외에 할례를 비롯한 율법적인 조항을 덧 붙여 복음의 내용을 희석화(稀釋化)시켰습니다. 복음 가지고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율법 준수가 구원의 조건임을 그래서 그들은 종용하였고 그것을 자기들만의 옥죄는 올무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할례에 치명적으로 약한 이방인 형제들에게까지 요구함으로 복음을 거짓 복음으로 둔갑시켜 치명상을 입히기에 이른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변질에 대하여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목을 건 행보와도 같은 여행길을 떠난 것입니다. 이런 담대함을 예루살렘 교회공동체의 수장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당시 헬라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이었던 디도 형제를 그 여행길에 동행하게 한 것입니다. 왜?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적인 형제인데 우리 공동체는 이 형제를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역시 할례를 가지고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복음을 변질시키지 작태를 중단하라는 무언의 시위인 셈이었습니다. 본문 3-5절을 봅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이상이 본문 해석입니다. 절대로 녹록하지 않은 본문 설교를 준비하다가 뜨거운 성령의 감동이 저에게 임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역전승하십시다.’ 라고 정했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 봅시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외에 어떤 그리스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만으로 우리는 족합니다. 예수만이 나의 전부되십니다. 나를 위해 골고다에서 선혈이 낭자한 피를 흘리신 예수께서 나의 주군이십니다. 나는 예수의 사람이고 여러분도 예수의 사람이 되십시오.” 누가 전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가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떠했습니까? 정말로 그랬습니까? 예루살렘 신앙 공동체는 할례를 비롯한 율법 준수라는 비 복음적인 팩트를 가지고 장난쳤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유대 율법적인 기득권이요, 물리적인 힘이 중요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이방 교회 공동체를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교회 아닌 단체로 전락되었다는 말입니다. 주군께서는 이 기막힐 노릇을 그대로 좌시하실 수 없었습니다. 해서 이방 교회 공동체의 주체인 수리아 안디옥의 일군이었던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를 도구로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의 진원지였던 종교적인 기회주의자들과 유대 율법적인 모리배들에게 복음의 철퇴를 내리도록 바울의 일행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복음의 능력으로 상황을 역전시킨 바울의 고백이 저를 전율하게 합니다.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신약의 교회가 도덕적 다수가 아닌 거룩한 소수에 의존했다. 그러나 현대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거룩한 열정이 아니라 유행에 민감한 감각이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p,33.) 남 침례교회의 순회 설교자이며 21세기의 ‘레오나드 레이븐힐’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는 폴 워셔도 자기의 책 ‘복음’ 에서 이렇게 불같은 선언을 선포합니다. “복음은 필요한 것의 핵심이나 일부분이 아니라 전부다. 복음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선포뿐이다.”(p,83) 나는 정말로 우리 세인교회가 복음의 능력에 대하여 둔감하고 세상의 감각에만 민감할까봐 두렵고 두렵습니다. 복음 외에 다른 것에 붙들릴까봐 두렵습니다. 가끔 이런 생뚱맞은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을 한 달만 닫으면 성도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이상한 생각 말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세인 교회의 문을 만에 하나 한 달 닫으면 어떻게 될까? 영적 갈급함과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려 몹시 견디기 어려워할 것인가? 아니면 이게 웬 떡인가 하고 희희낙락할까? 전자라면 우리 교회는 잘 달려온 것이겠지만, 후자라면 차라리 교회 문을 일찍 닫는 것이 하나님께 죄스럽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감흥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세인교회는 복음의 능력이 압도하고 있는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는 복음 때문에 전율하고 있는 교회입니까? 옥한흠 목사께서 쓰신 ‘로마서1’ 강해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은 교회 밖에 보다 교회 안에 더 많다.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깨어져야 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 그 굳고 교만한 마음이 녹아져야 할 사람들,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자기 자신이 죽고 다시 태어날 은혜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 안에 있습니다. 로마 교회 안에 있었고, 또한 한국교회 안에 있습니다.” (옥한흠,“로마서1”, pp,38-39) 아멘하고 또 아멘 했던 분명한 기억이 저에게 있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 안에서 복음이 상실되어 세상들에게 능력을 빼앗기는 비참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반대로 나는 지금 세상에 빼앗겨 버린 능력을 복음의 능력을 세인교회가 재생시킴으로 도리어 역전승의 쾌거를 이르는 교회가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저는 이 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임했던 예루살렘 교회, 그러나 그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옛 것인 율법으로 회귀하여 싸늘하게 송장처럼 죽어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를 다시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이방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 교회를 섬기는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를 사용하셔서 죽어 있는 그들에게 다시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이방 교회에게 역전승하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 세인 교회에 주목하고 계십니다. 탄생한지 10살 밖에 안 된 우리 교회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 역전승의 쾌거를 이루시기를 기대하십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역전승을 경험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복음이 압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물러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능력이 압도하는 교회가 되어 여호와의 영광을 제천시가 인정하는 물결이 넘치도록 만드는 우리 세인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고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이 땅의 동과서 남과북 가득한 죄악 용서하소서 모든 우상들은 무너지고 주님만 높이는 나라 되게 하소서 이 땅의 지친 모든 영혼 주 예수 사랑 알게 하소서 저들의 아픔과 눈물 씻는 주님의 보혈 이 땅 치유하소서 성령의 새 바람 이 땅에 불어오소서 주의 영 그 생기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이 땅에 하나님 영광 거하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열방에 하나님 영광 비추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의 끝까지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며 주님만 섬기는 나라 되게 하소서 이 땅의 주님 교회 위에 하늘의 생기 부어 주소서 열방을 치유하는 주 백성 주님의 군대 일으켜 주소서 성령의 새 바람 이 땅에 불어오소서 주의 영 그 생기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이 땅에 하나님 영광 거하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열방에 하나님 영광 비추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