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9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1:18-24 제목: 강할 때는 강해야 합니다. 서론) 짧다면 짧고 길다 하면 길다 할 수 있는 목양 30년의 세월 속에서 교회가 해야 할 사역을 정리한 것이 있다면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교회는 약한 자에게 한없이 약해야 하며, 강한 자에게는 물러섬이 없이 강해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유감스럽게 그 반대의 경우가 너무 많다는 점에서 가슴앓이를 합니다. 교회가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해지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해진다면 어찌 그 것을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원로 크리스천 사학자인 이만열 교수께서 재야학자로 살면서 너무나 세속화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향하여 뼈 있는 일침을 그의 글에서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제가 번창하여 너와 네 자손이 잘 먹고 잘 살게 될 때, 또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 더욱 더 ‘종 되었었음’의 역사의식을 가르치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자유란 잘 먹고 잘살며 또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 빼앗길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p,224. 포이에마 간) 정말로 기가 막힌 성찰이었습니다. 신명기 5:12-14절을 읽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제가 이 구절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만열 교수의 갈파와 관련하여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단순히 6일을 일하고 7일째 되는 날, 쉬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애굽에서 바로에 의해 종살이를 할 때 자유를 누리지 못하던 때를 기억하라는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은 물론, 또 하나 그렇게 노예로 살면서 고통당하던 너희들처럼 똑같은 희생자가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 제 4계명의 제정 이유입니다. 해서 신명기 5:14절에 이렇게 못을 박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무엇이 보이십니까? 남종도, 여종도 너같이 쉬게 하라는 말이 보이십니까? 약한 자에게 군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약한 자에게 강한 자로 압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며, 또 주님의 의도입니다. 며칠 전, 제가 구독하는 일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었습니다. 대전의 모 아파트에서 택배 기사들에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대금으로 월 10,000원을 지불하는 현관 출입문 통과키를 제작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목사로 사는 저는 이런 기사를 읽을 때마다 참담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주님, 제발 빨리 오시기를 비랍니다.” 교회는 강해야 합니다. 언제? 아픔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강해야 합니다. 교회는 약해야 합니다. 언제? 사회적인 약자들을 보듬기 위해 약해야 합니다. 이런 사회학적인 구도 속에서 교회는 적절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을 연구하면서 영적인 구도 안에서도 절대로 약해져서는 안 되는 또 다른 대목이 있음을 바울의 보고를 통해 살피려고 합니다.
본론) 저는 바울은 13개의 본인 쓴 편지 중에 본서인 갈라디아서에서만 유독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강복(降福)과 칭찬의 인사말을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을 시작하며 강하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질타하는 형식을 도입했다고 이전 강해에서 전술했습니다.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배교와 변심이 첫 번째이고, 그 다음은 갈라디아 교회를 거짓 복음으로 유린하여 교회를 무너뜨린 유대 율법 교사들을 향한 강력한 선전포고 성격의 편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1:1-17절까지의 이전 강해에서 할례를 주장하는 거짓율법 교사들이 전한 거짓복음에 놀아난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 대한 성토와 어리석음에 대하여 비난하는 바울의 비통함을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17절까지는 거짓 복음에 대한 항변과 복음으로 국한하여 해석하였다면, 오늘 본문 18-24절은 또 하나 바울을 몹시 분노하게 만들었던 사도권에 대한 강력한 변호 메시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본문 18-19절을 읽겠습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여기에 기록된 ‘그 후’는 언제일까? 학자들은 두 가지의 경우로 접근합니다. ⓵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는 그 후입니다. ⓶ 17절에 근거하여 회심 이후 아라비아로 가서 머물렀던 3년이 지난 뒤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온 때를 시점으로 보는 그 후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경우 중 존 스토트 목사는 전자를 주장하지만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그 어느 것도 확실하게 답을 제시할 수 없다는 의견입니다. 답이 확실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바울의 다메섹 회심 직후이든 아니면 3년이 지난 이후이든 그것은 오늘 설교의 강조점에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18절 이후에 기록된 예루살렘 방문 내용입니다. 바울은 18-19절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왜 올라갔습니까? 바울은 베드로를 만나기 위함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약 두 주일을 그와 함께 보냈음도 밝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이외의 그 어떤 사도와도 접촉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합니다. 20절에서는 베드로는 만났고 다른 사도들과는 접촉하지 않았음을 강도 높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21-24절 본문을 마저 읽겠습니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 구절에 대하여는 교우들에게 광의(廣意) 즉 넓은 뜻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려고 합니다. 본문 21절에서 베드로와의 만남을 마친 바울은 이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을 방문했다고 보고합니다. 주석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9:30절을 읽습니다.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무슨 말입니까? 회심 이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와서 예수를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변절한 바울을 살해하기로 결의하고 그는 추적합니다. 이것을 알았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형제들이 바울을 가이사랴로 피신시킨 뒤에 지난 강해에서 말씀 드린 대로 다소에 있는 고향으로 피신하게 합니다. 이로 인해 바울은 낙향하여 13년이라는 세월을 칩거하는 정중동의 시간을 갖게 되엇음을 지난 강해에서 밝혔습니다. 이 과정에 있었던 행보에 대하여 바울이 스스로 아주 짤막하게 보고한 것이 본문 21절이요, 사도행전 9:30절입니다. 길리기아는 다소가 속해 있는 소아시아 동남부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고, 다소로 내려가는 길에 바울은 이후 13년이 지난 뒤에 다시 바나바와 함께 사역할 운명의 장소인 수리아 안디옥을 잠시 들려 그곳에서 예수를 증거 한 뒤에 다소로 내려간 동선을 보고하고 있는 것이 본문 22-24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적시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의 목적과 의도를 부연 설명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오늘 설교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왜 다소에 내려가 13년이라는 세월을 칩거하기에 앞서 방문한 예루살렘 행을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에게 소상히 설명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본인의 사도권에 대한 강력한 변호를 선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은 거짓 율법 교사들이 부화뇌동하고 있는 바울의 사도권 시비에 말려들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시비에 대하여 강력하게 변호할 내용으로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사건을 예로 듭니다. 자신은 사도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기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해 달라거나 지지를 유도하지 않았음을 예루살렘 교회 방문 건으로 거짓 교사들과 갈라디아 교히의 어리석은 신자들에게 피력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만난 베드로와 15일을 함께 유했다고 했습니다. 이 만남의 이유를 본문 18절에서 이렇게 바울은 천명합니다. ‘방문하려고’ - 헬라어 단어 ‘히스테리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에 주목하십시다. 존 스토트 목사는 이 단어를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하여 목적의 방문’(존 스토트, 갈라디아서 강해, p,41, IVP 간)이라고 주석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글도 존 스토트는 소개합니다. “바울이 이 사도에게 간 것은 명령을 받아서 간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간 것이다.” (위의 책)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야고보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보고입니다. 무엇을 에두른 표현입니까?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물리적인 압박을 받아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았고 자신의 방문은 전적으로 사적인 방문이었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사도권 때문에 중요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수뇌부 즉 사도들에게 통제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과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다는 선언을 지금 갈라디아 교회 지체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내 사도권에 대하여 시비를 걸지 말라는 단호한 선전포고를 한 것입니다. 이런 단호함을 전제할 때 갈라디아서 1:1절의 진중한 선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는 첫 장 첫 구절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물 타기하며 시비를 걸고 있는 거짓교사들과 거기에 넘어간 유약한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 대한 직격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대단히 중요한 교훈과 도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 교회의 교회됨을 무너뜨리는 반 교회적인 것과는 강하게 싸워야 합니다. 20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시비를 걸며 갈라디아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는 거짓교사들과 그 현란한 말장난과 반교회적인 행태에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의 명함판신자들에게 얼마나 격앙했으면 이런 강력한 표현을 썼을까? 에 대한 감정적인 소회에 대하여 정서적으로 동의합니다. 바울은 상당히 분노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요한복음 2:1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조금은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예수님의 성품과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직접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은 당신의 성품을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온유하심‘입니다. 마태복음 26:51-52절을 소개합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던 일을 마태가 회고한 내용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몸종이었던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귀가 떨어져 나간 그의 귀를 다시 붙여주시면서 말씀하신 이 내용은 대단히 큰 감동을 준 말씀입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 소개한 두 구절을 연계해 봅니다.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 온유하신 분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을 전제로 요한복음 2장을 접근하면 대단히 곤혹스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는 칼을 칼집에 도로 집어넣으라고 하셨던 주님께서 무기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채찍’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흐라겔리온’의 의미는 로마인들이 죄수들에게 태형을 시행할 때 사용하던 도구를 의미하는 ‘매’에 해당하는 기구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환전상들이 돈을 바꾸는 수단으로 사용했던 상을 뒤집어 엎으셨다고 요한은 보고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뒤집어엎다.’의 번역인 단어 ‘아나트레펜’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있습니다. ‘아나키즘’(anarchism)입니다. 이 단어가 무슨 뜻입니까? 포털 사이트에 등재되어 있는 사전적인 의미가 이렇습니다. “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이나 운동” 그래서 많은 혹자들은 이 사상을 반정부주의라고 번역하고 이런 반정부주의자들을 ‘anarchist’ 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뒤집어엎다’(아나트레펜) 는 단어 속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만드시는 현장에서는 무력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율배반입니까? 주님께서 속과 겉이 다르시기 때문입니까? 저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제 해석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공생애의 막바지에 만난 유대 성전 종교의 타락과 세속화는 주님에게 있어서 그냥 말로 온유하게 타일러 바로 잡으려는 사건의 실체가 아니라 적어도 전복해야하는 타도의 대상이라는 것을 주님도 인정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때론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가 매우 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뒤로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목회를 하면서 경험한 저의 실천적인 내용물을 토대로 말씀드린다면 두 가지의 경우입니다. 1) 교회의 세속화에 대하여 강하게 맞서야 합니다.
이 경우는 당연히 목회자와 신자들의 세속화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을 위해 목사들은 세속적인 방법을 동원하였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불편한 장소로 만들지 않겠다는 세속적 편리주의였습니다. 유월절 절기 때 성전에서 드려야 하는 제물들을 이스라엘 각처에서 유대인들이 직접 가지고 올라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해서 이 불편함을 알았던 소위 말하는 헤롯 성전에 기생하는 종교인들은 그 지역의 장사치들과 야합하여 프리미엄을 주고받으며 성전에서 제물들을 사고 팔 수 있는 편리한 제도를 만들어냈습니다. 말 그대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하는 삶은 내팽개쳐 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만민이 기도해야 할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변질시키고 전락시킨 것입니다. 성도들이 일주일 동안 삶에 찌들려 있다가 교회에 위로를 받기 위해 왔다는 명제 앞에 많은 목회자들이 굴복하여 불편한 설교, 성경공부와는 담을 쌓았습니다. 저 또한 이 공범의 죄에서 자유롭지 않아 하나님께 송구할 따름입니다. 가능하면 듣기 좋은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목을 걸고 강단을 유린했습니다. 그래서 그 편안한 설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그것이 은혜라고 치부했습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이 땅에 존재하는 참 많은 교회의 강단은 마치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로 산소를 주입해야만 호흡하는 식물인간과 같은 신자들을 양산해 냈습니다. 그들의 요구에 걸 맞는 치료를 하며 기분에 맞추어 주는 나약한 강단으로 전락했습니다. 만에 하나 이런 아픔을 느끼고 예수 그리스도의 원색적인 복음을 강하게 설교하면 팔짱끼고 설교를 거부하는 세속적 신자들이 무궁무진하게 양산된 것이 오늘 조국교회의 가슴 아픈 자화상입니다. 어제 국민일보 미션 판에 교회 안에 들어온 IT에 대한기사가 특집으로 실렸습니다. 헌금을 온라인으로 결재하고, 출석을 체크카드로 확인하고 심지어 부득이하게 예배를 참석하지 못하면 예배 앱을 통해 휴대폰으로 예배를 드리는 시대에 대한 찬반양론의 시각을 보도했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후진적인 사고와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예배는 철저하게 아날로그를 고수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디지털 사고를 도입하는 것이 편리주의에 대한 편승이라면 단호하게 맞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말씀드린 대로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추은 겨울, 예배당의 마룻바닥에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흘리던 어머니의 뜨거운 눈물을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속화라는 괴물은 교회를 붕괴하는 신 바알이요 아세라입니다. 이것과는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2) 교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태생적 가나안 신자들과는 강하게 맞서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보듬고 달려가야 할 대상자들은 2018년 가나안 성도들임을 적시한 적이 있습니다. 가나안 신자들이란 가나안이라는 단어를 거꾸로 표시하면 교회에 ‘안 나가’이기에 소위 가나안 성도들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교회에서 목회자, 신자 혹은 조직의 구도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당한 더 이상은 버틸 힘이 없어 교회 공동체를 떠난 순수한 신자를 의미합니다. 이런 가나안 신자들이 한국교회 전 성도 중에 약 20%에 육박한다는 보고가 있는 것을 보면 상당히 심각한 것이 사실이고, 이런 일은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로서 대단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서 우리 교회도 이타적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 대외적인 일들에 눈을 돌리려고 시도하고 있고, 나름 그런 실천신학적인 사역에 민감하게 반응하려고 합니다. 그들을 보듬고 돌보고 회복하도록 만드는 사역에 결코 둔감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고통에 편중하여 아주 질 나쁜 형태들이 등장하고 있음은 매우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입니까? 태생적으로 교회 공동체와 목회자 그리고 성도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으로 도배한 자들이 가나안 신자로 둔갑해 있는 경우입니다. 요 근래, 국민일보 신문에서 한국교회의 분쟁에 대한 실례들을 보고하는 특집 기사들이 실려 있습니다. 내용인 즉은 지금 한국교회 내에 분쟁에 휩싸여 있는 유명 교회들에 대하여 고소, 고발 사건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교회를 와해시키려는 불온한 자들에 대하여 옥석을 가리고 법적인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고 기존 교회의 편 쪽으로 손을 들어주려는 기사를 읽다가 저는 일간 신문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양의 현장에서 몸소 체험한 일들 중에 일부가 그 신문 기사에 나온 것을 보고 정서적으로 동의했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자들이 교회를 와해시키고 있다는 극단의 경우입니다. 목회현장에서 정말로 인내의 인내를 각오하면서 참고 또 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만들어지지 않는 불온한 세력들이 존재하는 것을 수없이 목도하였습니다. 정말로 그들은 주님이 오셔서 권고해도 꿈쩍하지 않을 가시들입니다. 이들이 교묘하게 가나안 신자 무리에 숨어들어 있습니다. 적어도 이들에 대한 반응은 강하고 또 강해야 합니다. 태생적으로 교회공동체 대하여 부정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는 강하게 맞서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도전하며 갈라디아 교회를 무너뜨리는 반 복음적인 거짓 율법 교사들에게 자기의 사도적인 정체성을 분명히 함으로 그들의 보이지 않는 영적 폭력에 맞섰습니다. 저 역시 목회의 여정 중에 교회를 무너뜨리는 두 가지의 반 복음적인 폭거와 단호히 맞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 세인 교회도 싸울 것입니다. 교회의 세속화는 현대판 바벨탑입니다. 태생적인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가나안 신자들은 교회 안의 불신자들이며, 교회 밖에 가라지들입니다. 교회는 이것들에게 강해야 합니다. 뒤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경남에 있는 한 대형교회 목회자가 목사 세습에 반대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전도나 하라고 공격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제사장인 목사가 제사장인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것이 뭐 어떠냐는 논리로 세습을 반대하는 양식 있는 대다수의 상식적인 목사들에게 비수를 꽂았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인 권위를 논거하며 맞서 싸웠던 이유는 이런 천박함과 무식함의 발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말에 농락당한 신자들을 향하여 자신의 사도직을 강력하게 변호하며 항거한 것은 예수께서 피 값을 지불하시고 값비싸게 사신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체의 힘과는 강하게 싸워야 합니다.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와 공동체의 지체들이 교회를 유린하는 사탄의 견고한 진을 구축하고 있는 강한 세력들을 향하여 성령이 진두지휘하시는 능력으로 그들보다 비교할 수 있는 몇 배나 강한 성령의 검으로 그들을 초토화시키는 도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고린도후서 10:4절을 새 번역 성경으로 읽고 기도합니다.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찬양하겠습니다. 이 땅위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죄 사하셨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우리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 모든 입이 주를 시인해 영광중에 오실 주를 보리라 선포해 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 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 우린 고대하네 주님 오실 그날 다시 사실 왕의 영광 이 땅을 비추네 사단의 권세는 주 앞에 무너져 생명과 진리의 주 권세 가장 높도다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 모든 입이 주를 시인해 영광중에 오실 주를 보리라 선포해 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 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