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6일 신년감사주일 설교 제목: 주존심(主尊心)이 있는 교회 본문: 사도행전 11:25-26 서론) 그림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그림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예술가인 주디스 메이슨이 만든 작품입니다. 전 세계의 가장 악명이 높았던 남아공의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고문으로 사망한 필라 은드완드웨와 헤럴드 세폴라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1985년 2월에 주디스 메이슨이 제작한 작품입니다. 앞에 언급한 두 명의 여성들은 인종차별정책과 맞서 싸우다가 보안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합니다. 특히 필라는 고문을 당하는 동안 벌거벗긴 채로 성고문까지 당합니다. 그러나 필라는 굴하지 않고 여성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파란 비닐봉지로 바지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살해를 당했고 비밀 보안 경찰은 그녀의 시신을 은폐하기 위해 지뢰를 폭파시켜 시신을 와해시키려는 만행까지 저지르기에 이릅니다. 이 사실은 남아공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 백일하에 드러났는데 이 일을 안 주디스 메이슨이 그녀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작품을 만듭니다. 바로 그 작품이 그림에 나타난 ‘블루드레스’입니다. 이 작품은 오늘날 남아공은 물론 전 세계 민주주의의 정신처럼 여겨지는 상징물이 되었고 지금은 남아공 헌법 재판소에 전시되어 있는 의미심장한 작품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초대 헌법재판소 재판관이었던 알비 삭스가 쓴 ‘블레드레스’에서 맨 처음 만났습니다. 책을 읽다가 소름이 돋는 묘한 감동이 임했던 것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필라는 백인들에 의해 가장 비인간적으로 자행된 폭력에 굴하지 않는 것은 물론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기본권인 여성성과 인권이 기득권 권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을 때도 청 비닐로 바지를 만들어 입었다는 것은 나는 폭력을 가하는 너희들처럼 짐승이나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자존심의 사수였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적인 의미는 이런 뜻을 갖고 있습니다.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 또는 스스로의 가치나 품위를 높이려는 마음.” 인도네시아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지인 선교사가 우리 교회 금년 표어가 담긴 앞에 붙여져 있는 ‘주존심이 있는 교회’라는 플래카드의 시안을 페이스북에서 보고 저에게 이런 댓글을 달아주었습니다. “목사님, ‘주존감’이라는 단어는 당연히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단어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주존심의 아름다운 의미를 넉넉히 보여주는 한 해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주존감’을 이렇게 해석하기로 했습니다. ‘주님의 주님 되게 하심’ (Lordship)이라는 명제 앞에서 굽히지 않고 주님의 품위나 가치를 지켜나가려는 마음이다. 그렇습니다. 2019년, 우리 세인교회는 주님의 주님 되게 하심이라는 대 명제에서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주존감이 있는 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려면 저와 여러분이 적어도 2019년을 이렇게 살아내야 함을 신년감사주일을 통해 파악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기를 원합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저와 여러분들은 이미 이방인들을 예수의 복음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이 세우신 이방인의 전진 기지가 수리아 안디옥 지방에 세워진 교회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교회가 세워졌습니까?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하심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라는 이 도전적인 질문을 받을 때 대단히 흥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철저한 이방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방인의 구원을 운운하는 유대인들의 논쟁 유발과 도전적인 공격을 성경에서 볼 때마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했지요. 저 역시 이런 정서를 갖고 있기에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이방인들의 구원에 손을 들어준 바울이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대표적인 구절 하나만 소개합니다. 로마서 9:24-26절입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런 계획을 갖고 계셨던 주님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바울과 바나바를 더불어 그리고 이 사역을 위한 전진기지로 수리아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이 세운 안디옥 교회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수리아 지방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어떻게 지중해로부터 약 19km에 위치한 전형적인 이방의 땅인 수리아 안디옥에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원지인 예루살렘에서 수리아 안디옥까지는 무려 480km나 떨어져 있었던 이곳에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도행전 11:19-21절이 말해줍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그렇습니다. 스데반집사의 최초 순교 사건으로 인해 예루살렘 전역에 강력한 핍박이 임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에서 거듭나고 성숙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이제는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들이 거하는 땅인 베니게, 구브로, 수리아 안디옥 등으로 퍼지게 되었고 초창기에는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수리아 안디옥에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에도 예수의 복음을 증거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상당수의 수리아 안디옥에 있었던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들이 됩니다. 이 내용은 누가에 의하여 글로 기록되어 있기에 단순한 것 같지만 속 깊이 들어다보면 엄청난 영적 혁명이었습니다. 당시 영적 기상도는 이방인들은 영원히 저주를 받은 구원 받지 못하는 족속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의 정신이요, 정서였기 때문에 유대적인 정서가 뿌리 깊게 잠재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부(예수의 제자공동체)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고, 곤혹스러운 부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할례논쟁에 따라 제1차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열리고 이방 교회의 대표였던 안디옥교회의 수장들이었던 바울과 바나바는 급거 예루살렘으로 파견되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성령의 지지하심으로 이방인 형제들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임하므로 할례를 강요하지 말라는 결과물을 도출시킴으로 이방인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교회는 명실상부한 이방인들을 위한 교회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안디옥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사도행전 13:1절을 소개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교회가 어떤 교회였습니까? 선지자, 교사, 부유층에 속한 사람이자 레위지파 출신이기에 전형적인 유대교적인 전통에서 자란 바나바, 흑인이었던 시므온, 구레네 라는 로마식의 이름을 갖고 있기에 다신교적인 배경에서 자라난 루기오, 무시무시한 폭정의 주인공인 헤롯의 동생인 마나엔 그리고 예수를 핍박하던 선봉장 사울 등등이 어우러져 있는 다양한 공동체가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아마도 오늘 이런 분포도로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루어져 있다면 그 교회 담임목사는 적지 않은 골머리를 앓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주는 팩트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었던 수리아 안디옥 교회를 바라보는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말하고 싶었던 팩트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교회, 2019년 표어를 지탱하고 있는 주제절인 본문 26절을 읽겠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 교회에 속해 있었던 성도들의 정체성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헬라어 ‘크리스티아노스’의 번역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과연 무엇입니까? 영어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Those who are in Christ.”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이 정체성의 진원이 중요합니다. 본문 26절은 이 점을 암시하게 합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지칭되어졌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수동적으로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불러졌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타자에 의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창 시절에 친구들이 저에게 붙여준 별명으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출석을 부르시면서 제 이름을 착각하여 부르신 것이 기화가 되어 저에게 붙여진 별명은 두 가지였습니다. ⓵ 이강적 ⓶ 이강득 그 날 이후 저는 친구들에게 제 부모님이 정해준 강덕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강득과 강적으로 불렸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별명이 붙여진다는 것은 놀리고나 폄훼하려는 의도가 아닌 이상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인상을 전제합니다. 수리아 안디옥이라는 지방은 아데미 여신을 섬기던 우상의 땅이었습니다. 동시에 거대한 아폴론 신전이 있었을 만큼 성적으로도 극히 타락한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삶의 터전을 삼고 있었던 이방인들이 언제부터인가 예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무대의 정중앙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목도한 것입니다. 헌데 두렵고 떨리는 것은 그 공동체는 사람의 공동체이고, 나눔의 공동체이며, 희생의공동체라는 것이 수면에 드러난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말로 한 몫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삶으로 직접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엄청난 공동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수리아 안디옥이라는 지역 공동체를 뒤흔들고 있음을 인지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그들이 믿음의 대상으로 고백하고 있는 예수의 이름으로 각종 초자연적인 능력도 나타내는 엄청난 경계의 대상으로 부상한 것입니다. 이것을 눈으로 목도하던 수리아 지역의 사람들은 그들을 곱게 평가할 리 없었습니다. 해서 비밀리에 모이는 집단, 모여서 피를 먹고, 몸을 먹는다는 소문까지 들었기에 심지어는 식인종 집단으로 매도하면서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칭은 적어도 수리아 안디옥이라는 지역에서는 요주의 경계 대상이며 아주 불온한 집단이라는 별칭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이 대목에서 거꾸로 해석하여 얻는 영적 감동을 우리 교우들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름지기 수리아 안디옥 교회 공동체에서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들려 귀한 신앙의 길을 걷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지역 사회에서 붙여준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별명이 그들 자신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신앙적 자존감 즉 주존감으로 자리매김하였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전술했듯이 수리아 안디옥은 우상의 본거지였습니다. 동시에 로마제국의 속주로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기에 로마황제 숭배라는 국가주의와 개인 우상화라는 또 다른 거대한 영적 괴물과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위험한 지역이 바로 이곳 수리아 안디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목숨을 건 복음 증거로 인해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크리스티아노스들은 이미 그들의 전 인생을 예수께 건 주존감으로 무장한 신실한 예수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수리아 안디옥 교회공동체는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방인들을 위한 교회 사역을 벌써부터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3:2-3절은 적어도 안디옥 교회의 영적 진일보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 파송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역을 감당한 것입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이토록 엄청난 사역을 탄생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감당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동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강조합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는 주존심이 기초가 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주존심이 무엇입니까? 다시 강조합니다. 주님의 주님 되게 하심을 이루려는 마음입니다. 죽 로드십(Lordship)을 이루려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우리 세인교회가 속한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서려면 목사와 성도 모두가 주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영적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외연을 확장하지 않고 좁히겠습니다. 세인교회에 속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이 영적 자존감 즉 주존감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존감으로 무장한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 내 삶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로 저울추 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 삶의 중심에 다른 것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는 말과 상통합니다. 이렇게 목사가 설교하면 많은 교우들이 심정적으로 시큰둥할 것입니다. 어떻게요? 세상 물정 1도도 모르는 목사의 객기라고. “도대체 이 기막힌 경쟁 사회 구도에서 어떻게 그렇게 살라는 말입니까?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말을 하세요.”라고 제 말을 심리적으로 내칠 것입니다. 그런데 미안합니다. 제 발언에 대하여 취소하거나 양보할 의지는 저 역시 1도도 없습니다. 김기석 목사께서 최근에 출간한 ‘인생은 살만 한가?’라는 저서에 나오는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삶의 중심이 하나이면 ‘충’(忠)의 삶을 살게 되지만, 중심이 여러 개이면 ‘환’(患)이 된다.”(p,55.) 상형문자인 한자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 저는 이 글을 보다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의 중심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하나이면 충성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중심에 집중하는 것이 여럿이면 그때부터 나는 아프게 됩니다. 혼란스럽게 됩니다. 걱정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들을 세상 사람들이 ‘예수쟁이’라고 놀리고 비아냥거립니다. 아, 착각하지 마십시오. 누구나 세상들이 예수쟁이라고 놀리는 것은 아닙니다. 언감생심, 가짜에게는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누가 예수쟁이입니까? 마음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정신 하나에 집중하는 크리스티아노스들입니다. 무늬만 현란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주님 한 분외에는 내가 다른 것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신실한 크리스티아노스들을 예수쟁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군에 입대했을 때 훈련소에서 내무반장이 붙여준 별명이 있습니다. 전혀 예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내무반장에 제가 신학대학을 다니다가 군에 입대한 것을 보고 매일 밤 취침 전에 저에게 기도를 시켰습니다. 주일이 되면 내무반장이 교회에 갈 훈련병들을 부를 때 이렇게 불렀습니다. “환자 집합” 그렇게 교회를 갈 동기들이 모이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기들을 교회까지 인솔하는 사람은 중환자가 인솔한다.” 훈련소 내에서 제 별명은 중환자였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예수 주군 때문에 그 분의 사랑 때문에 그 사랑앓이에 아파본 중환자가 되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럭저럭 명함판 그리스도인으로, 그냥 주일이 되면 교회에 선심 쓰듯 예배 봐주기 일환으로 출석하는 환자로 머물러 있으십니까? 몇 달 전, 우리교회에 출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체와 소그룹 모임에서 주제를 가지고 논하다가 그가 전한 감동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날 그 지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있어서 영적인 괴물은 안주함입니다. 그냥 지금 이 상태의 편안함에 머무르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세인교회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이 저를 그 안주함에서 머무르게 하시지 않게 싸우게 하십니다.” 지체의 이야기를 듣다가 세인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목사로 참 감사했습니다. 만에 하나,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찾아온 지체가 정착한 이유가 편안함에 머물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면 저는 참 비참한 목사일 텐데, 그 반대로 편안함이 아니라 주존심을 견지하고 달려가도록 몸부림치게 지원하고 있다는 말로 세인 교회의 정체성을 말해 준 지체에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걸작인 ‘기독교의 기본진리’ 말미에 대단히 의미삼장한 말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to be) 것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to do)은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p,208)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존감이 있는 자는 본인의 심령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무장하여 그 분의 정신과 삶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이지만 없는 자는 그리스도인 된 것으로만 만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지체들이 전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명기 1:6-8절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사랑하는 세인지체 여러분! 호렙 산(시내 산의 또 다른 이름)에서 머문 지 너무 오래 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향하여 명하신 하나님의 엄위하신 메시지입니다. 호렙 산에 머문 지 너무 오래 된 이스라엘 공동체는 구름기둥과 불기둥 그리고 만나와 메추라기 등등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시내산은 척박한 땅이었지만 그런대로 견딜만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안주하는 것을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제 그 산을 떠나라고.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명령한 그 땅으로 들어가서 차지하라고. 우리는 세속적인 마음에 안주하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크리스티아노스들이기 때문입니다. 2019년, 주존감을 갖고 달려가십시다. 주님을 주님의 자리에서 주님으로 다시 세우도록 전진하십시다. 그리스도인 됨에 만족하지 말고 주군이 걸으셨던 길을 걸으십시다. 크리스티아노스로 살아내십니다. 그렇게 분투하며 살아내는 여러분 옆에서 주님이 응원하실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께 가까이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간절히 주님만을 원합니다 채워주소서 주의 사랑을 진정한 찬양드릴 수 있도록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간절히 주님만을 원합니다 채워주소서 주의 사랑을 진정한 찬양 드릴 수 있도록 목마른 나의 영혼 주를 부르니 나의 맘 만져주소서 주님만을 원합니다 더 원합니다 나의 맘 만져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