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18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3:10-14 제목: 곡해(曲解)하지 말라 서론)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곡해하지 말라’라고 정했습니다. 우리는 ‘곡해’라는 단어를 그리 빈번하게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곡해(曲解)’(misinterpretation)라는 어려운 단어보다 ‘오해(誤解)’(misunderstanding)라는 쉬운 단어에 더 많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단어 사이에는 약간의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오해하다.’는 의미는 이런 사전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거나 이해함’ 그러나 ‘곡해하다.’는 ‘오해하다’보다는 조금 더 세밀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실이나 내용을 실제와 다르게 잘못 이해함’ 이렇게 저는 두 단어의 의미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오해하는 것은 사실을 부분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곡해는 전체적인 부분을 잘못 이해하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곡해의 의미가 오해의 의미보다는 조금 더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오늘 저는 설교 제목을 오해라는 단어보다는 곡해라는 단어를 선택하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한 지금은 은퇴한 김동호 목사께서 접근한 성경해석의 한 내용을 그가 쓴 책에 기록한 것을 읽게 되었는데 그것이 성서 신학적으로 올바른 해석인지는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목회 신학적으로는 눈여겨 볼만한 여지가 있다고 판단해서 교우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출애굽기 21:22-2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 구절은 언약 법전에 들어가 있는 통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라고 부르는 율법입니다. 문자적으로 살피면 대단히 살벌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는 율법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이 동태복수법을 들고 나서서 전혀 다른 말씀을 선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38-4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결국은 예수님께서 동태복수법을 폐기하신 내용처럼 들리는 산상수훈의 한 교훈을 선언하신 셈이 되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이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출애굽기 21장의 동태복수법이라는 율법은 폐기된 것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이렇게 선언하신 것처럼 보였던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5:17절을 나누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사정이 이렇다보니 출애굽기의 언약법전과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지에 대해 곤혹스러울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헌데 김 목사는 이 두 구절에 해석하면서 이렇게 접근한 것을 보았습니다. “출애굽기는 가해자에게 준 말씀이고 마태복음은 피해자에게 주신 말씀이다. 다시 말해 남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그 책임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고, 피해를 당한 사람은 사랑과 용서를 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김동호, “예수 없는 큰 사람, 예수 있는 작은 사람”,p,160) 읽다가 고개를 끄덕이게 한 현장 목회자의 해석이었기에 눈여겨 담아 놓았던 내용입니다. 물론 이 해석은 성서신학자들의 해석으로 접근한다면 또 다른 해석의 차이가 있을 것이 분명할 것이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교우들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동태복수법을 예로 든 진짜 이유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이후 진짜로 율법은 폐기된 골동품인가? 의 제문제(諸問題)에 대하여 생각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답변하고 싶습니다. 극단적인 복음주의자들조차도 율법 무용론을 주창하는 이유는 율법에 대하여 심각한 곡해 때문이라고. 이제는 저는 본문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마치 율법이 폐기되어야 하는 것으로 곡해되고 있는 정황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본문 이해는 정말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본론) 저는 몇 주 동안 구원의 조건으로 제기한 유일한 토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믿음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강력하게 선포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구원받음 즉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한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저는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는 내내, 아니 앞으로 어떤 성경을 텍스트로 삼아 설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에서 절대로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갈라디아 교회를 유린한 거짓 교사들이 들고 나온 할례로 대변되는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우기면 그것과는 맞서 싸울 것까지도 지난 주일 설교에서 교우들에게 천명했습니다.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수순으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않는 율법, 그리고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얼마든지 가능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시 확대하여 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여전히 존재해야 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시 여러분 가운데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왜? 모순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모순처럼 들리는 메시지를 풀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원인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 때문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6절) 뿐만 아니라 본문 10절을 보면 거의 율법 폐기론자와 같은 강한 톤으로 율법을 성토하는 것처럼 보이는 메시지를 바울은 남겨놓았음도 볼 수 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어디 이뿐입니까? 이어지는 본문 11-13절까지를 살피면 율법이 살아남을 수 여백은 단 1도도 보이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바울이 심지어 어떤 단어까지 가용했습니까? ‘율법의 저주’라는 표현까지 썼으니 율법에 관한한 갈 데까지 다 간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분명히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에 대한 경계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까? 앞에서 설명한 동태복수법을 해석한 한 목회자의 방법을 대입한다면 그림이 그려집니다. 여러 차례 반복하여 설명 드린 것처럼 갈라디아 교회의 영적 상태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일구어 놓은 아름다운 주님의 공동체,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이라는 복병으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할례주의자들에 대한 성토는 물론 그 허접한 율법주의에 넘어간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섭섭함과 서운함 그리고 유감스러움 등등의 복합적인 심리가 본문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에 나눌 3:15부터 4장 전체의 메시지를 통해 율법에 대한 더 정확한 정체를 밝히는 시간이 있겠지만 오늘 본문을 전제하며 나눌 수 있는 바울의 태도는 구원에 관한한 율법주의에 대한 단호한 거부임을 볼 수 있습니다. 성서해석의 접근이 이 정도라면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보폭이 오히려 너무 쉬울 수 있습니다. 절대로 율법을 따라서는 안 되고 믿음의 길을 따라나서야 한다는 명쾌한 선택을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면 안 됩니다. 너무나도 분명한 기독교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명한 교리적인 단호함 속에 있는 것이 저와 여러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합니다. 그래도 율법은 존재해야 하며 또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저는 두 가지의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할 때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함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훈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은혜로 와 닿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접하면 율법을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모세를 기억해 보십시다. 모세는 율법을 직접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모세도 율법을 어겼습니다. 므리바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어 부르며 여겼고, 물론 율법을 부여받기 이전이기는 하지만 살인도 저질렀습니다. 누가 율법의 조항을 온전히 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12절의 말씀은 율법에 대한 이행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바울의 말대로 율법의 저주라는 표현대로 더 무거운 율법에 대한 사형선고와 같은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절망입니까? 저는 바로 이 대목에서 반전의 은혜를 교우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절대로 행할 수 없는 율법의 무게, 결코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율법이라는 멍에를 보면서 우리들이 얻는 다른 감동이 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나이기에 나는 더 더욱 십자가의 그 사랑이라는 은혜가 필요하다는 깨닫게 되는 은혜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공동체에서나 교회에서 선을 행하려고 애쓰고 노력할지 모르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우리를 범법자들에게 임하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해 줄 수 없다.” (존 스토트, “BST 갈라디아서 강해”,p,97) 만에 하나 율법이 존재하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범법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려는 마음을 가질 때 나의 연약함과 한계를 깨닫게 되고 결국은 십자가의 은혜로 나아가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몇 가지만 들어보십시다. 빌립보서 3:5-6절을 소개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 고백과 맞물려 바울의 또 다른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고린도전서 15: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어떻게 들리십니까? 저는 이 두 구절을 합쳐 있을 때마다 이런 감동이 임합니다. 도저히 율법으로는 도달할 수 없었던 구원의 감동을 마침내 성취하게해 준 것이 바로 은혜였다는 감동 말입니다. 율법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십자가의 은혜로 인도하는 선생님입니다. 해서 다음 주일에 살피겠지만 바울은 율법을 ‘초등학교 교사’라고 표현하기까지 합니다. 갈라디아서 3:24절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바라기는 더 큰 십자가의 은혜가 율법 때문에 강하게 다가오는 우리 교우들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2) 율법을 지키려는 삶은 구원 받은 자의 삶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환언한다면 막 살지 않게 해 주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율법이 해 주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김동호 목사의 성경 해석의 한 단면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같은 차원으로 접근할 내용이 있습니다. 지난 번 바른 교회 아카데미 세미나에서 강사로 나선 장신대 박경수 교수가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로마서가 율법주의자들에게 쓴 바울의 편지라면 야고보서는 믿음 결벽주의자에게 쓴 편지다.” 상당히 의미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1:17절의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믿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야고보서의 주제는 야보보서 2:26절의 이행칭의(以行稱義)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다고 성경의 두 구절이 배치되거나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편지의 수신자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율법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막 살지 않게 만들어주는 바로미터라고 말입니다. 제 첫 번째 책에 인용한 고등학교시절 선생님이 알려주신 촌철살인을 매번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막 살고 있는 제자에게 선생님이 써서 보낸 편지에는 글이 없었고 사람 인(人)자 다섯 개만 쓰여 있었답니다. 도무지 뜻을 알지 못했던 제자가 선생님께 풀이를 부탁하자 다시 이런 글이 도착했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고 3 시절에 알려주셨던 선생님의 이 교훈을 매번 가슴에 담고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 3 시절, 선생님의 가르침은 저에게 이렇게 날마다 곱씹는 메시지로 바뀌었습니다. “목사면 다 목사냐? 목사가 목사다워야 목사이지!” 이 가르침대로 살려면 적어도 한 가지와 싸워야 합니다. ‘막 살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의지를 관철시켜 줄 수 있는 바로미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입니다. 김기석 목사는 ‘거둠의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울한 세상, 슬픔이 가득한 세상 기쁨으로 잘 건너게 도와주시고 우리의 있음이 세상의 기쁨이 되도록 우리를 사용하여 주소서” (p,137)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SNS에서도, 앵커 브리핑에서도, 친구들의 카톡 메시지에서도 뜨겁게 지난 주간에 저에게 공통적으로 날아온 것이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의 엔딩 멘트였습니다. 드라마를 보지 않는 저 역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제가 즐겨 보는 앵커 브리핑에서도 이 엔딩 멘트라 마지막 회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 드라마 주인공인 김혜자 권사의 감칠 맛 나는 마지막 멘트를 보다가 여성 호르몬이 듬뿍 나오는 요즈음이라 아내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숨죽여 울었습니다. 김혜자 권사는 이렇게 엔딩 멘트를 읊조렸습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내 삶의 마지막 날에 이렇게 달큰한 바람 같은 유언을 남기려면 한 가지를 결심해야 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 받음에 감사하고, 더불어 그 은혜를 깨닫게 해 준 율법의 가르침을 곡해하여 소홀히 여기지 않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주만 바라볼찌라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