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갈라디아서 2:11-14
제목: 복음의 특성
서론)
지임철 전도사가 교회에 부임한 뒤에 한 번도 홍굴부추칼국수를 방문한 적이 없어 지난 금요일에 점심식사 차 함께 다녀왔습니다.
지 전도사가 처음 방문한 곳이었기에 홍굴의 별미를 소개했습니다.
볶음밥.
맛이 있다고 소개를 하고 저는 공기 밥을 하나 주문해서 맨 밥을 먹자 지전도사가 의아해 했습니다.
볶음밥 전도사가 되어 한참 자랑을 했는데 막상 제가 그 볶음밥은 먹지 않고 맨 밥을 먹으니 이해가 안 된 것입니다.
해서 제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나는 족발, 볶음밥, 비빔밥을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는 어려서 먹고 체한 적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려주었습니다.
허나 두 번째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섞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교회사를 뒤돌아보면 교회의 위기는 언제나 복음의 위기였습니다.
헌데 그 복음의 위기라는 말은 복음을 부인하거나 복음에 대하여 완강히 거절함으로 인해 나타난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이 부인되거나 거절될 때는 도리어 복음은 더 강해졌습니다.
문제는 교회사의 위기는 언제나 복음을 물 타기 할 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복음과 비슷한 것으로 혼합할 때 나타난 위기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최대의 이단인 영지주의 위기가 그랬고, 중세 가톨릭이 복음을 배제하고 복음을 지렛대로 삼아 전혀 복음적이지 않은 것을 교세 확장의 도구로 삼았던 위기도 그랬습니다.
이런 것을 전제한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도 매일반입니다.
복음의 변질, 혹은 복음에 대한 껍데기만을 이용하는 번영 신학 등등은 또 다시 교회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런 위기의 근원인 복음 바꿔치기의 시대에 본문이 주는 복음의 고유한 특성을 찾아내어 복음을 사수하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본론)
본문은 소위 학자들 사이에 ‘안디옥 삽화’라고 부르는 내용입니다.
‘삽화’라 칭함은 이 기사의 배경이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북 갈라디아 지역에 보낸 편지를 주장하는 학자들)들은 이 기사의 배경을 갈라디아서 2:10절에 이은 사건 즉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의 기사로 보는 반면, 또 어떤 학자들(남 갈라디아 지역에 편지한 글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교우들에게 이미 10번째 강해에서 설명한 대로 바울이 제 1차 예루살렘 방문 이후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거쳐 다소로 내려갔을 때의 상황으로 보는 경우인데 저는 이전 강해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자를 전제하여 본문을 해석하고자 합니다.
본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제 1차 예루살렘공회의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세히 그 결과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성경의 내증으로 답을 대신합니다.
사도행전 15:22-29절을 읽습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저는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이 결과를 읽을 때마다 적지 않은 흥분을 합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위대하고 철저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부라고 볼 수 있는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는 이방 교회의 지도부였던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의 방문을 받고 나서 할례를 비롯한 유대 율법주의적인 강령들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그들만의 철옹성과 같은 유사(類似) 복음을 내려놓고 항복한 내용이 15:22-29절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 결과의 도출은 철저한 성령 하나님의 작품이었음을 알기에 저는 전율하는 감동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부는 제 1차 공의회를 마치고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이방 교회 공동체의 본산인 수리아 안디옥을 떠날 때 그들만 보내지 않고 동역자들을 동행하게 합니다.
유다와 실라 형제였습니다.
물론 동역자인 유다와 실라에게 총회의 결과를 담은 공신 문서를 지참하게하고 같이 수리아 안디옥을 보낸 것입니다.
그 공식 편지 (사도서신이라고 부름)에는 다음과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⓵ 이방인 형제들에게 아무런 짐(유대 율법)을 지우지 않기로 함.
⓶ 권고 사항 몇 가지를 첨부함
ⓐ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멀리할 것.
ⓑ 피를 멀리할 것.
ⓒ 목매어 죽인 것을 멀리 할 것.
ⓓ 음행을 멀리할 것.
그러나 이 네 가지의 내용도 절제하면 형제들의 범사가 잘 될 것이라는 권고 사항이지 강제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할례 논쟁으로 촉발된 유대교회 공동체인 예루살렘 교회공동체와 이방 교회 공동체인 수리아 안디옥 교회 공동체와의 첨예한 대립은 이방 교회 공동체인 수리아 안디옥 교회 공동체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음을 사도행전 15장이 독자들에게 보고한 것입니다.
이렇게 결과가 나온 데에는 베드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할례 논쟁에 대하여 서로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 긴장감에서 진행되던 공의회에서 힘이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이 강하게 이방 형제들의 할례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공의회 의장 격이었던 야고보는 침묵함으로서 암묵적으로 예루살렘 형제의 지지를 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베드로가 이 흐름을 바꾸어 놓는 발언을 하기에 이릅니다.
사도행전 15:7-11절을 봅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불같이 토하던 베드로의 사자후였습니다.
이방 형제들을 할례로 그리고 율법적인 조항으로 옥죄지 말라는 최후통첩과는 같은 메시지를 선포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마무리된 제 1차 예루살렘 교회 공의회 이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리아 안디옥 교회 쪽으로 볼 때는 은인과도 같은 베드로가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방문하였음을 본문 삽화는 보고합니다.
이 일로 본문은 시작됩니다.
11절입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본문 1절의 분위기는 사도행전 15장에 등장했던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주는 인상 때문입니다.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베드로를 비난했다는 말입니다.
‘책망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안테스텐’은 조금 더 과격한 의미의 단어입니다.
‘반대에 서서 반감을 표하다.’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주석을 해야 합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할 정도의 위치에 있었는가? 도대체 책망을 받을 정도로 베드로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는가?” 의 제 문제입니다.
저는 갈라디아서를 강해하면서 몇 주에 걸쳐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변호한 적이 있었습니다.
복기한다면 2:8절일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무엇을 설명해 드렸습니까?
사도직의 동등성을 역설했습니다.
어떤 이가 사도의 권위가 더 높고 낮음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역할의 분담뿐이었지,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베드로에게 질책할 내용이 있었다면 부담은 되었겠지만 당연히 해야 했고, 마땅히 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을 만큼 행한 실수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12-13절을 의미를 갖고 읽겠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
이들의 정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의 많은 주장들이 있습니다만 학자들의 대체적인 해석은 이렇습니다.
캐나다 토론토 위클리프 칼리지에서 신약교수를 역임한 리처드 롱 에너커 교수의 주석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안디옥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표현에 대해 예루살렘 신자들의 어떤 실제적인 염려를 표현하기 위해 야고보가 보냈을 예루살렘 교회의 파견단이었다.” (WBC, “갈라디아 주석”,p,286)
할례 논쟁은 이미 일단락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와 수리아 안디옥 교회는 세밀한 부분에서 경쟁 관계에 있었고 이 경쟁 관계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항상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의 역할을 하려 했는데 무슨 일인지를 자세히 모르겠지만 교회법상 안디옥교회의 행태에 대하여 직책하려는 예루살렘 교회의 집행부의 사신들이 안디옥교회에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방문을 갑자기 마주친 베드로가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형제들과 식사를 하다가 정색을 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베드로를 ‘안테스텐’ 한 것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안테스텐’ 한 것은 그가 외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외식으로 인해 거기에 같이 했던 바나바, 그리고 이미 수리아 안디옥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유대인 크리스천들까지도 그 외식에 유혹되어 복음을 왜곡시켰다고 강하게 비판한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이런 반복음적인 행위를 보인 베드로를 바울은 강하게 질책하였던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바울이 베드로를 질책하면서 던진 메시지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갈라디아서 2:14절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그들이 메시지를 따라 한결같이 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감시인들이 보지 않을 때는 유대인이면서 이방인처럼 살더니,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온 옛 동료들에게는 좋은 인상을 주려고 이방인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요구하는군요.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서슬이 시퍼런 선포였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강타한 카운터펀치가 이것이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았다.’
우리는 바울의 이 메시지를 통해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 복음의 특성은 상황에 따라 변질되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교훈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복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은 복음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말장난 같은 언어의 유희처럼 느껴지지만 곱씹으면 대단한 은혜를 줍니다.
복음을 각기 제 맛대로 각색하고 연출하여 대중들이 원하는 식감대로 상황에 따라 맞추어주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근래 공영파 방송인지 아니면 종합 편성인지 말 모르겠지만 백종원이라는 이름이 있는 요리 연구가가 파탄 직전의 가게들을 직접 찾아가서 문제점을 찾아내 다시 그 매장을 살려주는 프로그램이 유행이라는 말을 아내에게서 들었습니다.
무엇인 문제인지를 알려주는 전문가의 포스가 압권이라는 부연 설명까지 들었습니다.
해서 인터넷에 들어가 그가 활약하는 프로그램을 서핑했습니다.
그는 음식점의 메뉴들이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떻게 요리를 해야 하며 심지어는 매장의 구조를 어떻게 혁신해야 하는지 까지 세밀하게 터치해 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그가 지적하는 일에 일체의 목표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고객 중심의 맛과 경영이라는 목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영학적인 측면에서 상권에 있는 일체의 매장들은 그래야 살아남습니다.
고객이 없는 상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헌데 일각에서 교회의 사역도 그래야 한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회중들의 입맛에 맞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의 가장 중요한 단초를 회중 중심적인 구조로 교회의 체계를 바꾸어야 한다는 지론입니다.
21세기형 교회가 살아남는 방법은 회중중심적인 교회로 거듭나는 것이라는 방법론은 지금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회중 중심적인 교회로 만들어야 합니까?
어떤 지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개신교에 있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지인입니다.
그와 사석에서 대화를 하다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개종을 하셨지요?‘
그가 목사인 저에게 서슴없이 말했습니다.
“교회가 어느 날부터 너무 가벼워졌습니다. 특히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설교가 맞춤형 선택 강좌로 바뀐 것을 느낀 것입니다. 설교에서 예수가 보여야 하는데 사람만 보였습니다. 복음에서 한참이나 벗어나고 변질된 교회에 만정이 떨어졌습니다.”
제가 그에게 다시 질문했습니다.
“가톨릭도 매일반일 텐데.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성당에 가 있으면 가볍지는 않습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저는 실신 직전의 펀치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복음을 상황화 시킨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은 대단히 쓰라린 주님의 경고입니다.
사람의 입맛에서 쓰고 쓴 복음을 과감히 버리고, 달콤한 속삭임의 메시지로 강단을 변질시킨 결과, 세속의 광풍에 맞아 코마 상태로 교회와 성도가 넉 다운 되었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헐몬 산에 세워진 초막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의 상황화란 무엇입니까?
초막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초막을 고집하는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마가복음 9:7-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지금 우리 세인교회가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인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복음의 핵심인 예수 외에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상황화 되는 순간 교회는 전혀 세속이 세속적으로 상황화 하는 일체의 내용과 전혀 다름이 없는 괴물로 전락합니다.
김기석 목사의 ‘인생은 살 만한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지요? 저는 그것을 모든 가치를 계량화하고, 가치에 순위를 매기는 서열화의 반생명성을 지적한 것으로 받아들였지요. 계량화, 서열화 사회에서 죽음의 자리는 없겠지요?” (p,232)
교회가 교회 부흥을 위해 복음을 도용하여 전혀 복음적이지 않은 숫자화, 서열화 시키는 것을 저는 복음의 상황화라고 진단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우리 세인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복음을 복음으로 놔두라는 메시지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세인지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시대적 신앙의 요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복음을 내 상황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변질시키는 일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14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복음을 복음 이외의 것으로 섞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혼합주의요 복음의 상황화라는 영적 암세포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의 외로운 외침이 오늘은 더 더욱 저의 가슴을 때립니다.
고린도전서 2:2절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거짓과 탐욕 죄악에 무너진 우리 가슴 정케 하소서
오소서 은혜의 성령님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
거룩한 불꽃 하늘로서 임하사 타오르게 하소서 주 영광 위해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 땅 가득 불어와
흰 옷 입은 주의 순결한 백성 주의 영광위해 이제 일어나
열방을 치유하며 행진하는 영광의 그 날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