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주존심(主尊心)이 있는 성도 본문: 사도행전 11:25-26 서론) 지난 주간에 작가 정여울이 쓴 ‘마흔에 관하여’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작가가 불혹의 나이인 40세가 된 이후의 감흥에 대한 아주 소박하고 담백하게 써내려간 산문의 글을 보면서 그녀보다 20년이라는 인생을 먼저 산 인생의 선배인데도 왠지 모르게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어 아주 재미있게 그녀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 마음에 담은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마흔의 문턱을 넘으며 ‘익숙한 나로부터 거리 두기’만큼 중요한 것이 ‘소중한 타인과의 거리 두기’임을 깨달아가고 있다.”(p,94) 이렇게 시작한 작가는 이 글의 시작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답게 살아갈 용기를 실천할 수 있는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남다르게 살아갈 배짱이 필요하다. 몇 달은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카카오톡을 하지 않아도 지구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사회적 관계망을 벗어난다고 해도 ’사회‘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SNS에 쏟을 시간에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진짜 만남‘에 쏟는다면 우리의 인간관계는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같은 책,p,96) 이 글을 서재에서 고즈넉하게 읽다가 이런 생각에 잠겨 보았습니다. ‘소중한 타인과의 거리 두기’라는 이 문장에 필이 꽂혔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의 인물군(人物群)에서 흔히 발견하는 공통분모가 무엇입니까? 연대(連帶)입니다. 무리지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외로워지는 것을 못견뎌하기 때문입니다. 홀로된다는 것을 무척이나 힘들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소극적인 심리에 정면으로 도전하자고 말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무리지음에 떨어져 나가자고 합니다. 타인이 소중한 것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 타인과 거리를 두자고 역설합니다. 왜 작가가 이렇게 말했을까요? 그래야 정확한 나를 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무리와 군중의 떼창 속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떼창은 여론몰이이고, 순간적인 것이고, 찰나적이며 군중 심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속임수에서 벗어나려면 인간은 무리지음에서 과감하게 떨어져 나가려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합니다. 시나브로 고독해 지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한 나를 직시하고 나에 대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존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그 유명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걸작인 ‘시민 불복종’에서 그가 남긴 한 문장에서 그가 갖고 있는 상식이 있는 사람으로서의 엄청난 자존감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자연은 그 외의 다른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을 거부하지 말라.” (p,143) 그렇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의 철학과 정신을 갖고 살아냈던 데이빗 소로우이었기에 전 세계의 수많은 지성인들이 그를 존경하며 그를 따르는 팔로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한 지역교회를 섬기고 있는 현직 목사입니다. 저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물이나 사건을 만날 때 습관적으로 혹은 조금 천박한 말로 직업의식이 발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사물과 사건을 만날 때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마음과 적용입니다. 이렇게 적용하면 어떻겠습니까? 사람 대다수가 섞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무리지음이나 군중들의 떼 지음 속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려고 할 때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존감을 형성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적어도 일반사회학적인 시각에서 자존감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영적인 측면에서 정말로 대단히 중요한 도전이 임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내가 사람들의 떼창 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무리들의 무리지음에 머물기를 원하는 한 나는 주님의 주님 되심에 관심을 갖고 싶어 하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주존감이 있는 성도로 살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벼락처럼 다가온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1:17절입니다.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성전 정화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고난주간 월요일에 있었던 치열한 영적 전투를 벌이신 주님은 모든 일을 마무리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떠나 베다니로 떨어져 나오셨습니다. 무리와 적당한 거리를 두시고 다시 당신의 사역을 점검하신 주님은 군중 속에 있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 안에서는 주님도 주님의 마음가짐을 다잡이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군중의 소리 안에서는 자신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반대로 외롭지만 철저하게 자기를 뒤돌아보는 시간과 성찰의 여백에서만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여백은 고독한 영역입니다. 쓸쓸한 영역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한 뒤에야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영적인 고독과 사유함을 경험한 뒤에야 진정한 주존심을 갖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탄생한다는 알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인물을 조명함으로서 바로 이 점을 증명해 내고자 합니다. 본론) 본문 25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우리는 이 간단한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9장부터의 줄거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울이라 이름 하는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약 240km정도가 떨어진 다메섹으로 예수를 믿는 신흥 분파주의자들을 척결하는 사명을 갖고 원정을 떠납니다. 그 길을 떠난 바울은 다메섹 근거리에 이르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바로 그곳에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바울은 이제는 예수 핍박주의자가 아닌 예수의 증인으로 변화되었음을 사도행전 9:19절 전반절-22절이 증언합니다. 이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자 다메섹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변심한 바울을 살해하기로 공모합니다. 그러자 이제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메섹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보호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냅니다. 드라마틱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울은 불타는 열정으로 예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증거 합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여 척결하라고 칙령까지 만들어준 산헤드린 공회가 있는 유대종교의 본거지였던 예루살렘에서 돌아와 그가 경험했던 회심의 사건들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바울의 모습에 두 부류가 충격을 받습니다. 한 부류는 말할 것도 없이 유대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부류는 바울이 예상하지 못한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공동체의 지체들이었습니다. 왜요? 바울의 회심을 진정성 있게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난처함을 당하고 있었던 바울을 도왔던 사역자가 나타나는 데 그가 바로 바나바입니다. 사도행전 9:26-30절에서 누가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의 선한 성격을 갖고 있었던 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을 인정하지 않던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에게 바울의 회심이 진정성이 있는 회심이며, 그는 이방의 형제들을 위해 부름을 받은 종임을 대변하며 바울을 지원했던 동역자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살해위협과 교회공동체의 형제들마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울을 대하자 바나바는 어쩔 수 없이 후일을 도모하며 바울 형제를 그의 고향 다소로 내려가도록 도와주었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또 한 측면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충성하던 종이었던 바나바의 행보입니다. 스데반 박해로 인해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수리아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해 이방교회의 전진 기지였던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고 폭발적인 부흥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부는 바나바를 수리아 인디옥 교회의 초대 목회자로 파송하고 바나바는 아름다운 교회였던 안디옥교회를 맡아 최선을 다해 사역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부흥되는 안디옥교회를 혼자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알았던 바나바는 그가 13년 전에 후일을 도모하며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세우실 것을 굳게 믿고 아쉬운 마음으로 다소로 내려 보냈던 바울을 생각해 냈고, 무려 175km 나 떨어져 있는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바울을 데리러 다소로 찾으러 간 것을 보고한 것이 오늘 본문 25절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찾으러 다소까지 갔다는 본문 25절의 보고를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리적으로 175km는 주후 1세기 상황으로 비추어볼 때 너무나 먼 거리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또 하나 이 거리의 동선이 주는 극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갈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리아 안디옥에서 다소로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아마누스 산맥을 넘어야 합니다. 해발 3,000미터에 달하는 아마누스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산맥의 곳곳에는 산적득과 강도들이 출몰하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나바는 바울을 찾으러 목을 건 다소 행을 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위험한 여행을 바나바가 굳이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나바는 바울이 다소에 칩거하도록 보낸 장본인이었습니다. 그가 바울을 다소로 보낼 때의 마음은 대단히 아팠을 것입니다. 그의 능력, 그의 회심에 대한 진정성을 바나바는 알고 믿었던 동역자였습니다. 다만 조직이, 구조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울 형제를 고향으로 내려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바울 형제를 내려 보낸 지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나바는 적어도 13년이라는 세월을 생각하면서 그가 확신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울이 드디어 하나님의 사역을 할 때가 되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바울이 다소에서 칩거하던 13년이라는 세월동안 그가 가지고 있었던 유대 종교적인 율법의 덕지덕지한 껍질, 아주 매력적인 유대적인 종교적 포플리즘의 묵은 흔적들을 벗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바나바는 확신했습니다. 이제 바울의 입장으로 환언해 보십시다. 바울은 13년 동안 고향 다소에서 거하는 동안 무리지음의 동선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항상 인기를 추구하며 유대 율법적인 수장으로 자라날 수 있는 야망의 늪에서 그는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사유의 시간이요, 주님과 함께 동행 하던 은혜의 시간이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고백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홀로되어 있었던 13년의 시간 안에서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절호의 기간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을 거친 바울은 하나님께서 드디어 하나님의 사람 바나바를 통하여 다시 자기를 구속사의 정 중앙 무대로 이끄시는 선명한 조명하심을 체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소에서 13년 만에 만난 이 두 사람은 다시 목숨을 걸고 아마누스 산맥을 넘어 수리아 안디옥에 돌아와 공동목회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시작한 이 두 사람의 사역 보고를 누가는 본문 26절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오늘 본문은 단지 두 구절입니다. 헌데 이 두 구절에 담겨 있는 엄청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셨습니까? 얼마나 철저히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을 하나님이 조각하셨고, 만드셨으며, 동시에 때를 기다리셨는지를 목도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 과정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수리아 안디옥이라는 지역 교회를 통해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의 도구로 이 두 사람을 사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이방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한 사람은 안디옥에서, 또 한 사람은 다소에서 만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어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구속사라는 역사의 무대 위에 올리셨고 이들로 인해 오늘 이강덕은 구원받을 수 있었고, 여기에 모여 있는 여러분도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2019년을 시작하는 두 번째 주일을 통해 정말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주존심을 있는 성도가 누구입니까? 적어도 주님의 주님 되심을 100% 인정하고 달려가는 주존심이 있는 성도는 과연 어떤 사람들입니까? ※ 하나님이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저는 이 교훈을 작년에 한 번 주일 설교를 통해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간다는 말을 바꾸면 이렇게 대치할 수 있습니다. 주존심으로 무장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조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떻게요? 세속적 신자의 삶이 아닌 철저한 하나님의 삶을 살아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도록 오늘도 조각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고향 다소로 낙향하여 13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 했던 바울의 시간들은 세속적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쓰디쓴 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젊고 젊은 나이에 조그마한 성읍인 다소에서 태어난 촌뜨기 바울이 당시 유대율법의 총본산인 예루살렘으로 유학의 길을 떠날 때 다소 고향 사람들은 심심한 박수를 치며 그를 배웅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대를 걸었던 젊은 바울이 이제 과년한 나이가 되어 다소에 돌아왔을 때, 그의 신분은 이상한 신흥 종교에 빠져 살해의 위협을 당하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완전히 실패한 실패자의 신세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고향 사람들이 바울에게 보낸 냉소와 박대가 얼마나 심했을는지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이런 냉소 속에 13년을 죽지 못해 살아야 했던 바울은 그렇게 그가 가지고 있었던 야망의 두께가 하나님에 의해 벗겨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철저한 외로움을 경험하면서 주님이 걸으셔야 했던 길을 걷도록 자기도 모르게 세밀하게 훈련받는 기간이 13년이었고, 조각된 시간이 13년이었던 것입니다. 바나바 역시 예루살렘이라는 대도시에 만들어진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로 서게 되면 여러 모양새로 품새가 나아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별로 가까이하기조차 꺼려하던 이방인들의 땅인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목회자로 파송되기에 이릅니다. 말이 좋아서 파송이지 서울에서 지방으로 좌천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안디옥에 파송되자마자 그는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부족함을 느꼈고 그 와중에 그가 마음에 품었던 바울 형제를 복기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바나바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절정을 다소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은 철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으며 안디옥으로 돌아와 사역을 감당하면서 수많은 공동체의 지체들을 크리스티아노스로 만드는 사역의 열매를 거둔 뒤, 드디어 그곳에서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이 조각하신 두 번째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공동 담임목회자의 직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이방 선교의 물꼬를 트는 제 1차 선교여행의 선교사로 파송되는 도구들이 되었음을 우리는 이어지는 사도행전 13장을 통해 보고받습니다. 이 두 사람을 저는 이렇게 조금도 주저함 없이 정의합니다. 철저한 주존감으로 자기들의 삶을 살아낸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이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주존감으로 무장한 성도들이십니까? 대답을 하려면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당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 가시기 위해 당신을 조각하며 만들고 계심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좌에서 충돌하고, 우에서 부딪치는 나를 위해 주님은 둥근 원으로 나를 조각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 고수자 권사께서 이 찬양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주일 오후에 권사님께 심령에서 울려나오는 찬양은 역시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수고에 박수를 보내자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권사님의 이 고백을 듣고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⓵ 어찌 이 찬양의 신앙고백이 고 권사님만의 고백일까? 우리 모두의 고백이다. ⓶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지,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상관없이 이 고백을 한다는 것은 지금도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의 증거이지 않겠는가.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해 연말, 지상파 방송에서 여느 해와 다름없이 일 년 동안 방송계에서 활약한 사람에게 주는 각 종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별로 관심이 없는 일이라 치부하며 보내는 것이 일상인데 인터넷 뉴스를 통해 2018년 각종 대상을 개그우먼인 이영자씨가 휩쓸었다는 보도를 접했는데 특히 그녀가 KBS 연예대상을 탄 뒤에 밝힌 소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끝까지 누가 뭐래도 나를 포기하지 않게 기둥이 돼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묘한 감동이 저에게 임했습니다. 엄청난 조명, 관객들의 열광적인 아우성과 환호 그리고 돈과 명예는 현대인을 눈멀게 함은 물론 미치게 하는 것들입니다. 이영자 자매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본 것은 이런 세속적인 영광과 아우성과 환호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본 것은 나를 포기하지 않고 붙들어주신 언제나 기둥 되어 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세속적 자랑거리가 아닌 주존심을 붙들고 있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이 눈물 나게 반가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미국 휴스턴에 있는 우두랜드펠로우십 교회를 담임하는 케리 슉목사는 ‘Be the Message’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우리 삶의 메시지가 살아 있는 복음에 쌓여 있으면 반드시 충돌의 순간이 찾아온다. 세상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므로 내가 삶의 메시지로 살아내지 못하면 나는 안전지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락된다.”(p,265) 20세기 사도라고 부르는 아이든 토저도 ‘세상과 충돌하라’에서 이런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여기에 ‘하늘의 사람’이 ‘땅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지금 ‘땅의 사람들’은 ‘하늘의 사람’을 향해 이를 갈고 있다. 성경은 ‘한 번 태어난 자들’이 ‘두 번 태어난 자들’를 핍박한다고 말한다.”(p,213) 기막힌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충돌하고 있다면 은혜다. 그러나 만에 하나 충돌의 기미를 느끼지 못하면 저주 중의 저주이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비극은 충돌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충돌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번 주간도 우리 세인 교회의 지체들은 당신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힘으로 세상과 충돌하기를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그 충돌에 기죽지 말고 주님이 나를 지금도 만들어 가시고 있다는 주존심의 믿음으로 현장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물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물결을 용솟음치게 만드는 역동의 주인공들이 주존심을 갖고 세속주의와 맞서 싸우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본문 25-26절을 읽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찬송가 463장을 부르고 기도합니다.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