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32번째 강해) 본문 : 갈라디아서 5:22-23 제목 : 금하지 못합니다.(1) 서론) 목사들에게 고전 같은 명저인 고 김준곤 목사께서 쓰신 ‘예수 칼럼’에 나오는 한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예수의 현존성(現存性) “2000년 전에 죽은 로마의 사형수여! 그대가 내 품에서 심장을 오려가듯 외동딸을 빼앗아 가는구나. 그대는 죽은 사람인가, 삼 사람인가, 생명의 약탈자여, 사랑의 약탈자여! 이 말은 아버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아무리 붙잡아도 기어이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나는 외동딸을 보내는 불란서의 한 노인의 외침이다.” (김준곤, “예수칼럼”, 규장문화사, 1981년,p,23) 이 글을 읽은 지가 어언 4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신학교를 입학했을 때 섬기던 고향 교회 담임목사님 사모님이 입학 선물로 주셨던 책이기 때문입니다. 색이 아주 누렇게 변해 있고 너무 많이 읽어서 너덜너덜해 질 정도로 많이 상해 있는 책이지만 제 책상 정면 앞에 아주 눈에 잘 띠는 책장에 꽂아둔 책입니다. 40여 년 전의 이 글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 정말로 그 때는 이 자매처럼 자리를 박차게 일어나 헌신한 수많은 자녀들이 있었다. 이들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이들을 말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경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 11:38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브리서 기자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을 여기에 언급한 이유는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서 11장의 특성 때문입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열거된 이름들 뒤로 모세, 다윗, 사무엘, 여러 사사 등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을 비롯한 주전 4-3세기의 핍박을 당한 유대인들의 엄청난 고난을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믿음의 선진들을 자세히 소개한 이유는 바로 히브리서 11:38절의 전반절 내용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들이 갖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기들의 길을 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요, 신앙의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무엇을 원하고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것이 마땅히 신자가 걸어야 할 길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천로역정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금지할 자,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법이 막지 못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보면 저와 여러분이 주목해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23절 후반절의 문장입니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법’은 바로 유대인들이 목숨을 거는 율법(노모스)입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가 무너지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된 율법입니다. 조금 풀겠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던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다시 종의 멍에를 짊어지는 거짓 복음이었던 율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도 결코 금할 수 없었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결과물들을 바울은 본문에서 강력하게 증언합니다. 무엇입니까? 9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정의합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9가지는 3개의 틀로 다시 정리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 그 분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게 되면 9가지의 열매들을 거두게 된다는 교훈인데 먼저 세 가지의 틀을 알려드립니다. ⓵ 하나님과 연계하여 얻는 열매 세 가지: 사랑, 희락, 화평 ⓶ 사람과 연계하여 얻게 되는 열매 세 가지: 인내, 자비, 양선 ⓷ 본인과 연계하여 얻게 되는 열매 세 가지: 충성, 온유, 절제 오늘 저는 제일 먼저 하나님과 관련해서 얻게 되는 성령의 세 가지 열매를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두 주에 걸쳐서 나머지 6가지의 열매를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의 열매입니다. 개인적으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성령의 열매 중에 제일 앞자리를 차지한 것에 대해 황송할 정도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교회에서, 그리고 성도 간에 너무 많이 빈번하게 사용을 해서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랑의 중요성이 희석될까 두렵기까지 한데 그래도 성경은 사랑을 성도가 행하여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제시하는 데에서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아 너무 감사합니다. 왜 사랑이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제일에 기록되었을까? 바울이 고전적으로 말한 최고의 글을 굳이 인용한다면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일체의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고, 동시에 사랑이 제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론자인 CS, 루이스는 그의 걸작인 ‘네 가지 사랑’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은 자신에게 불필요한 피조물을 순전히 사랑하심으로써 존재케 하십시다.”(CS 루이스, “네 가지 사랑”, 홍성사,p,216) 저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정의를 이렇게 완벽하게 설명한 더 이상의 글을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언어로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사랑의 교회’에 가면 그 교회의 로고는 이렇습니다. God is Love. 표어가 이러면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을 대중들이 알게 됩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대중들에게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면 적어도 루이스가 말한 내용을 교회와 성도가 실천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불필요한 존재까지 사랑하는 것” 루이스는 이런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셨는지를 너무나 감동적인 언어들을 동원하여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기생물들을 창조하셔서는, 기생물인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이용해 먹을 수 있게’ 하시는 ‘숙주’이십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랑의 발명자이시자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위의 책, 같은 페이지) 2008년에 이 책을 읽었습니다. 지금 이 글이 기록되어 있는 216페이지에 이런 사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폭풍 눈물” 그래서 제가 출간한 첫 번째 책인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에도 이 글을 인용했습니다.(p,283) 담임목사 셀에서 함께 읽은 이재철 목사께서 쓰신 ‘성숙자반’을 보면 대단히 중요한 사랑이라는 성령의 첫 번째 열매를 해석한 글이 나옵니다. 글을 읽다가 이재철 목사를 왜 제가 멘토십을 갖고 존경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가가 막힌 설명이 있습니다. 그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제일 첫 번째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말씀에서 9가지 종류로 열거되어 있는데 열매라는 헬라어 단어 ‘카르포스’는 단수로 적혀 있습니다. 헬라어는 복수와 단수를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그러니 아홉 가지 열매면 복수 형태이어야 하는데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아홉 가지가 다 다른 열매가 아니라 ‘사랑’의 8가지 형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p,376) 그러고 보니 이 목사께서 지적하신 해석은 기막힌 성찰입니다. 이 목사께서 설명한 해석을 풀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기쁩니다. 사랑하면 평화가 임합니다. 사랑하면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타인에게 자비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착한 마음을 품고 삽니다. 사랑하면 충성하고, 온유한 자가 되고, 스스로를 절제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이 제일이라는 바울의 말은 정답입니다. 노파심으로 이렇게 첫 번째 열매인 사랑을 매듭짓고 싶습니다. 이렇게 중요하고 또 중요한 열매인 사랑은 성령 하나님을 따라 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목요일 저녁에 외출을 했다가 늦은 저녁에 귀가했습니다. 차를 주차장에 파킹하고 집으로 들어서는데 너무 예쁜 광경을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 스탠딩 기도처인 코람데오 조형물의 압권인 십자가 그 양 틈에 두 마리의 고양이가 서로 마주보며 아주 묘한 애교를 부리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순간 확신했습니다. “한 마리는 암컷, 한 마리는 수컷이다. 지금 저들이 서로에게 사랑을 표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고양이 두 마리를 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러자 또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루이스의 이 감동이 벅차게 올라왔습니다.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은 자신에게 불필요한 피조물을 순전히 사랑하심으로써 존재케 하십시다.” 명심합시다. 사랑하고 계십니까? 어떤 사랑? 나에게 불필요할 것 같은 존재까지도 사랑하십니까? 확신하십시오. 당신은 성령 하나님의 열매를 맺고 있는 주인공임을. 2) 희락의 열매입니다. 두 번째 성령의 열매는 ‘카라’ 즉 ‘기쁨’입니다. 이 두 번째의 성령의 열매를 언급하면서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교훈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카라’는 개그콘서트에서 개그맨들이 만들어주는 기쁨 즉 웃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적어도 이 기쁨은 빌립보서 바울이 언급했던 기쁨과 동일한 기쁨입니다. 빌립보서 1:3-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여기에 기록된 기쁨이 오늘 본문에 소개된 성령의 두 번째 열매인 ‘기쁨’과 같은 단어인 ‘카라’입니다. 그렇다면 기쁨이라는 이 단어에 대한 소회가 조금은 더 신중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1:3-4절에서 언급한 기쁨은 개그 콘서트에서 만들어 내는 그런 웃음으로 대변되는 가벼운 기쁨이 아니라 엄청난 은혜가 담보되어 있는 기쁨(희락)이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빌립보서는 옥중 서신입니다. 바울이 어느 감옥에서 이 편지를 썼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해석을 하기 때문에 확정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바울이 옥에서 이 편지를 썼다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빌립보서의 분위기는 상당히 밝은 분위기이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결코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밝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에 하나 바울이 이 편지를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로마의 감옥에서 썼다면 그는 순교를 앞두고 있었던 시기와 맞물립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얼마나 개인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을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빌립보서를 쓰고 있었을 때 바울에게 들린 소문은 그에게 인간적인 씁쓸함을 가득 차게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빌립보서 1:14-18절을 읽어드립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지금 주님으로 인해 옥에 갇혀 생사가 불투명합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공동체 안에서 바울을 통해 성장한 복음 전도자들이 바울의 투옥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의기양양하면서 기뻐한다는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이유는 이 소문을 낸 진원지의 주인공들은 항상 바울 때문에 2인자처럼 생활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선두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착한 뜻으로 주님을 전파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투기와 분쟁을 하면서까지 헤게모니를 잡고 빌립보 교회를 휘젓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하지 않게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바울이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빌립보서 1:18절에서 선포한 바울의 내용입니다. 바울이 이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다시 18절을 읽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제가 오늘 교우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두 번째 열매로 언급한 기쁨 즉 ‘카라’는 바로 빌립보 교우들에게 말했던 이 기쁨입니다. 이 정도의 기쁨이 바로 성령의 열매인 기쁨입니다. 웃음과 기쁨이 사라진 시대가 근래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 헤픈 웃음이 난발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두 번째 열매는 이런 웃음이나 기쁨이 아닙니다. 성령의 두 번째 열매인 기쁨은 고난을 담보한 기쁨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 때문에 흘러넘치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의 걸작인 참회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 주님, 이런 유혹에 대하여 내가 당신께 무엇이라고 고백해야 합니까? 솔직히 칭찬을 받을 때마다 나는 기분이 좋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 거할 때에 주어지는 기쁨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주여, 저는 이 기쁨을 간직하고 싶습니다.”(성 어거스틴의 참회록, 조은화역, 생명의 말씀사, 2009년,P,205.) 세인 공동체에 이런 기쁨이 날마다 흘러넘치기를 소망합니다. 3) 화평의 열매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세 번째 열매 화평은 헬라어 ‘에이레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언제나 독특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면 아주 적합할 것 같습니다. ‘에이레네’는 한시적인 평화를 말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휴전과 같은 의미의 평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평화입니까? 주님 안에 있을 때 얻어지는 영원한 평화입니다. 그렇다면 이 평화는 아마도 이런 평화일 것이 분명합니다. 여호수아 21:44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음이니라” 여호수아의 진두지휘 하에서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승리의 공동체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땅을 완전하지는 않지만 분배하는 작업까지 마쳤습니다. 이제 여호수아의 미션은 끝난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대단히 의미 있는 교훈을 승리에 도취해 있는 공동체에게 전합니다. “이 승리를 얻게 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너무 상투적입니까? 한 가지에 주목하십시다. 전쟁의 승리가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대적들을 물리쳐 주신 것 자체가 안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원수들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준 것이 안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짜 안식이라고 말합니까? 여호수아는 강력하게 천명합니다. 여호와가 안식이라고. 우리들은 자칫 잘못하다가 본말이 전도된 신앙의 궤도로 빠질 때가 있습니다. 안식 자체가 우리들의 목적이 될 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얻는 평화, 안식 자체는 여호와 하나님 그 자체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화평인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참회록에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지으신 만물 중에 한 줌의 흙에 불과하며,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고, 교만으로 가득 찬 이 인간이 입술을 열어 감히 주님을 찬양하려고 합니다. 당신의 피조물이며 미천한 이 인간이 당신을 찬양하려 합니다. 당신을 찬양하는 기쁨을 누리라고 우리를 깨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당신을 위해 지음을 받았나니, 우리 영혼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평안을 모릅니다.” (위의 책,p,22) 그렇습니다. “우리 영혼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평안을 모릅니다.” 이 고백이 그 유명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입니다. 성령이 세 번째 열매인 화평은 주님 안에 있을 때만 얻게 되는 평강입니다. 우리 세인 공동체에 에이레네의 평강이 가득차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작가 장석주씨가 쓴 ‘그 많은 느림은 다 어디로 갔을까?’에 실린 글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고요함은 자연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회오리는 아침을 마치지 못하며 소나기는 하루를 다하지 못한다. 누가 이것을 하는가? 천지다.” (p,258) 글을 읽다가 아주 묘한 감동이 저에게 임했습니다. 자연주의자인 작가는 충분히 자연을 이렇게 예찬했습니다. 읽다가 이런 생각이 패러디하기로 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성령님의 모습이다. 미움과 슬픔과 불안은 아침과 하루를 견디지 못하게 한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성령이시다.” 오직 성령 하나님만이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화평을 주시는 분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성령의 법을 금할 수 있는 이 땅의 법과 존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선포한 것입니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23절 후반절) 나는 우리 세인 교회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이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기를 소망해 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