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성령을 따라 행하라2024-02-27 11:02
작성자 Level 10

2019년 8월 1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31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5:16-24

제목 성령을 따라 행하라

 

서론)

 

몇 주 전에 서울에서 동기 모임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모임 스케줄의 마지막이 뮤지컬 관람이었습니다.

그 날뮤지컬 주인공이 장엄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던 대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누가 죄인인가라는 타이틀의 노래였습니다.

 

(함께 감상하고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한 죄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철도광산산림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군대를 해산 시킨 죄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운 죄

12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안중근 의사가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에 대한 법정에서의 선언이었습니다.

안중근 역을 맡은 주인공 배우가 이또가 저지른 죄를 열거하는 엔딩 장면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배우들을 격려했습니다.

저는 그날 뮤지컬을 관람하면서 이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뭔지 모를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작금에 진행되고 있는 일본이라는 괴물의 공격에 따른 민족주의적인 의분이 그대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날 제가 느꼈던 뜨거움은 다분히 민족적인 의분으로 인한 감정적인 결과였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한 구절이 연상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4:32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여기에 기록된 뜨겁다는 헬라어 단어 카이오메네는 신약학자들의 동일한 해석의 분모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감동을 느낀 것과는 다른 억제할 수 없는 체험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가 뮤지컬을 보다가 느꼈던 그런 감정적인 감동의 차원을 넘어서는 영적 체험이라는 말입니다.

누가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이런 영적 체험을 느낀 시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을 풀어주실 때라고 했습니다.

제가 느꼈던 감동과 엠마오 도상으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느꼈던 체험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개인의 감성이 움직인 것임에 비해 후자는 영적인 움직임이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는 경우는 한 가지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만지실 때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인격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지난 주일에 이어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 필요한 대단히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에 대하여 나누려고 합니다.

 

본론)

 

저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 교회가 교회되기위한 첫 번째의 요소를 나누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기임을 밝혔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의 요소를 교우들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으로 세워져 나아가는 두 번째의 요소는 이것입니다.

 

⁜ 철저한 성령 하나님의 통치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읽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오늘 본문은 상당히 단순한 메시지처럼 여겨지는 본문이지만 기막힌 진리가 담보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성령 하나님을 따라 행하여야 합니까?

바울은 분명히 전합니다.

그래야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적시했습니다.

육체의 욕심이 어떤 것들입니까?

본문 19-21절은 그 자세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바울은 총 15가지의 내용으로 육체의 일을 열거했습니다.

이 15가지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감히 누가 15가지의 항목에서 난 자유롭다고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한 가지 제가 주목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1세기 시대에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동원하여 육체의 욕심에 대하여 15가지 정도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상 더 주목해야 하는 이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 어디 이 15가지뿐이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아마도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21세기의 오늘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요소들이 즐비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 논쟁에 대하여 이미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나 대안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1세기나, 21세기나 육체의 욕심에 따라 추구하는 삶의 항목들과 싸우는 방법이 일일이 15가지를 분석하여 싸우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한 가지에 집중하라고 한 점에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16절에서 바울이 권한 내용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다시 말해 철저하게 성령 하나님의 통치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 철저하게 이끌리면 놀랍게도 육체의 현저한 일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바울이 선포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17-18절을 보겠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바울이 분명히 확신한 것이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지체들 중에 종의 멍에를 다시 짊어지기로 결심하고 율법으로 회귀한 자들이나 그들을 유혹하여 율법의 종이 되도록 꼬드긴 율법 거짓 교사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육체의 소욕이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이끌림이 있는 성도나 교회는 육체적인 정욕과 소욕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렇게 방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22-24절을 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렇습니다.

9가지의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것을 물론이거니와 성령의 역사는 저와 여러분을 육체와 함께 그 정용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역동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15가지의 육체의 소욕과 일일이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성령 하나님의 철저한 이끌림을 당할 때 이 모든 정욕과 탐심에서 자연스럽게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거시적인 영적 안목이요 해석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는 설교를 통해 성령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세인교회를 이끄시도록 하는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1) 인격적인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정의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묘사하곤 합니다.

성령 하나님에 대한 민감함이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주님이 12명의 제자들을 선출하시고 그들에게 사역의 매뉴얼을 주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매뉴얼의 가장 유명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희를 보내는 마음이 마치 양을 이리들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는 그 유명한 구절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내모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기는 하지만 제자들을 격려하며 용기를 주신 말씀이 내용이 19-20절입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 메시지는 대단한 위로요 격려입니다.

사실은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세상에서 당하는 가장 큰 난처함은 이질감입니다.

생리적으로 상당히 낯설다는 점입니다.

발을 다치기 전에탁구장 회원들이 1년에 한 번 가는 야유회에 저에게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매월 한 번 실시되는 월례대회 때도 시합은 부수적인 것이고 놀고먹는 판이 벌어지는 형국인데 야유회는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분위기일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어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이후 탁구장 동아리 밴드에 야유회에 다녀온 후기들을 영상과 함께 올렸는데 보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 정말로 불편하겠지만 그들은 또 얼마나 불편했을까하는 마음이 들어 안도했습니다.

세상이 참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우리들에게는 참 접근하기 어려운 낯 섬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제자들을 위로한 것입니다.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 메시지가 얼마나 아름다운 격려요 위로의 메시지입니까?

그런데 주님이 이 위로의 메시지를 주시면서 하셨던 어록의 한 부분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전제할 것은 성령 하나님의 권고하시는 말씀을 듣는 방법은 인격적으로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희망의 신학자라고 일컫는 위르겐 몰트만 박사는 그의 걸작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에서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성령은 새로운 창조의 과정 속에서 개개인에게 그의 특정한 몫을 그리고 그의 육신에 적합한 소명을 부여하신다.”(P,318)

제가 몰트만의 이 이론을 아주 오래 전에 받아들인 이유는 성령의 능력은 철저하게 개개인에게 주어진다는 상투적인 글 때문이 아니라 그 앞에 표현된 새로운 창조의 과정 속에서라는 언급 때문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개개인에게 발생하는 새로운 창조의 과정이라는 몰트만의 이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는 어렵게 표현했지만 너무 쉬운 의미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인격적인 사모함입니다.

나에게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면서 일하실까?

성령 하나님은 나에게 얼마나 큰 기대감을 갖고 계실까?

성령 하나님께서는 내가 육체의 소욕을 위하여 사는 것을 보실 때얼마나 아파하실까?

이런 질문과 피드백이 무엇입니까?

내가 일구어가는 새로운 창조의 과정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런 인격적 사모함으로 살아가는 자를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책에서 이 기막힌 문장을 보았습니다.

만남에 대한 책임은 하늘에 있지만관계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김세환 목사, “눈을 두 번 감았다 뜨세요동연 간,P,238)

저는 이렇게 믿고 확신합니다.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민감하게 책임지는 하나님의 사람과 교회는 성령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적어도 우리 세인 지체들은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격적인 사모함이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은 현재진행형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앞에서 실례로 제시했던 엠마오도상의 두 제자 이야기를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4:32절을 또 읽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이 구절에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하는 단어가 보입니다.

풀어주실 때입니다.

헬라어 단어 디아노이겐의 번역입니다.

그런데 단어의 시제가 눈에 띕니다.

미완료과거시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두 제자가 가던 길은 엠마오로 가는 노상이었습니다.

그 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성경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동사가 미완료과거시제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단지 성경을 풀 때 임하였던 마음이 뜨거워지게 했던 그 감동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 시간까지 계속해서 진행되게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렇게 적용하십시다.

지난 목요일 아침성경을 읽다가 담임목사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었던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8:10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제가 이 구절에 천착한 이유는 놀랍게 여겨라는 구절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 성령 하나님께서 제게 이런 감동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백부장이었던 이방인그래서 이름조차 익명으로 거론되지 않았던 그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의 하인의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심방을 요청한 주님께 이런 고백을 드렸습니다.

마태복음 8:8절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주님은 익명의 이방인 백부장이 고백한 이 신앙고백에 완전히 넋다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 기자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주님의 상태가 놀랍게 여기셨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엄청난 감동을 받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날 새벽저에게 성령 하나님은 오셔서 이렇게 독려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너도 주님을 놀랍게 하는 주인공이 되라.”

2000년 전이스라엘의 가버나움에 일어났던 그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2000년이 지나 제천시 서부동 세인 교회 새벽예배 시간에 고스란히 임했습니다.

이 은혜를 지금도 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나에게 임하셔서 나에게도 성경을 통하여 행하셨던 놀라운 일들에 민감한 자들은 그 성령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전혀 무감각하게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둔감한 것이 아니라이 은혜가 왜 나에게 임했지에 대하여 절감하는 그리스도인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을 오늘의 현장에서 인정하고 동의하는 자들입니다.

20세기의 선지자라고 부르는 아이든 토저는 이렇게 강력하게 선포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내주하시며 나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은 이루어져 도 좋고 안 이루어져도 그만인 희망사항이 아니다그 분의 내주와 충만은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사항이요하나님의 명령이다.” (토저, “이것이 성령님이다.”p.133)

이것을 우리세인 지체들이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사도행전 2:36-38)라고 선포했던 베드로에게 역사하셨던 성령 하나님은 같은 믿음으로 달려가는 2019년 8월 11일을 사는 세인 지체들에게도 여전히 능력을 역사하시는 성령님임을.

이것을 확신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라고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에게 담대하게 선포했던 바울에게 역사하신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은 2019년 8월 11정욕과 탐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선언하는 세인 지체들을 위해 일하시는 인격의 하나님이심을.

 

결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가을학기에 남성 소그룹에서 함께 공부하게 될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을 보면 저자가 본회퍼 목사의 최후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 나옵니다.

두 명의 호송병이 디트리히 본회퍼를 교수대로 데려가려고 오자 본회퍼가 옆에 있는 친구에게 짤막하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끝이네하지만 나한테는 이것이 삶의 시작이라네.’” (pp,151-152)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따라 행하는 자에게 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어제도오늘도내일도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지체들이 성령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인격적인 사모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성령님 날 붙드소서

살아계신 성령님 날 살피소서

채우소서 채우소서

성령 하나님 새롭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