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30번째 강해) 본문 : 갈라디아서 5:13-15 제목 : 물고 뜯어 먹지 말자 서론) 오늘 설교의 제목을 ‘물고 먹지 말라’는 테마로 정했습니다. 제목을 결정하기에 앞서서 다른 어느 때에 비해 무척이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떤 경우에는 성경에 기록된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여 제목을 삼는 경우가 많은데 마치 오늘과 같은 경우입니다. 문제는 말씀을 그대로 제목화 시킬 때 설교자가 대단히 위축된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메시지의 내용을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정말로 그대로 전하고 살아야 하는 데 그렇게 100% 만족할 만큼 살지 못한다는 부담감이 배나 더하기 때문입니다. ‘물고 뜯어 먹지 말라’는 이 문장이 주는 부담감은 그래서 백배입니다. 본문 15절을 원어에 있는 말씀대로 직역해 보겠습니다. “만약에 서로 간에 물어뜯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면, 그런 자들에게는 서로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유념해라” 이 구절을 상기하다보면 김민기 씨가 지은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깊은 산 작은 연못/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이 내용이 무엇을 비유하며 교훈하고 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이기적인 삶의 결과는 결국 파국이라는 교훈입니다. 누군가를 짓밟고 그 자리에 서는 것은 처음에는 승리자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자기도 멸망하게 된다는 자승자박의 교훈이 이 노래의 가르침입니다. 이 교훈을 나누다 보면 참 적절하게 오늘 본문의 말씀과 엇비슷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여행을 떠나 보려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15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앞에서 언급한 작은 연못에 대한 교훈과 너무나 똑같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교훈의 진의는 알겠는데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교훈에 맞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질문해 보면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동물은 본능적으로 약육강식의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몇 해 전, 고위 관리가 국민들 중에 상위 10%에 들지 못하는 자들을 향하여 개와 돼지로 비유한 것처럼 어찌 보면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이요 욕망의 정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찌 보면 인간은 서로 물고 뜯어 먹기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여겨질 정도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15절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음에 난처함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왜 바울은 15절을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했을까요? 이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갈라디아 교회에서 발생한 논쟁에 대하여 공부해 왔습니다. 너무 선명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거짓 복음이다. 특히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진정한 구원은 할례와 같은 율법을 시행함으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종용하는 행위는 대 신자 사기극이다.” 이것이 갈라디아 교회 논쟁의 화두였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갈라디아 교회 안에는 첨예한 대립각이 형성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부류일 것이고, 또 한 부류는 바울의 말대로 유대 율법 교사들에게 속지 말자는 부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전자가 이기면 안 되고, 후자가 이겨야한다고. 그래서 후자에게 박수를 보내며 무언의 응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바울도 후자에게 손을 들어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후자들에게 갖고 있지 않은 한 가지의 바람이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회가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와해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 즉 할례를 받자고 종용하는 파와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말자고 단호하게 바울의 복음을 사수하려는 파의 사이에 있었던 반목으로 인한 교회의 위기가 곧 교회의 와해로 이어질 것이라는 염려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반목의 그룹들에게 이렇게 본문을 남긴 것입니다. 13-14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그리고 결정적인 쐐기가 바로 15절인 것이었습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본문 해석의 접근은 대단히 조심스럽습니다. 분별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3-15절을 바울이 말한 대상은 모두가 갈라디아 교회 지체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서로 반목하고 있는 두 부류 말입니다. 반면 또 다른 갈라디아서 안에는 선포의 대상이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내용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읽었던 1:8-9절을 복기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구절은 갈라디아 교회를 유린하고 있는 유대 율법 교사들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구분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유린하고 있는 유대 율법 교사들에게는 한 뼘의 양보 없이 단호했습니다. 그들에게 저주를 퍼 부을 정도로 단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 지체들에게는 섭섭했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보이는 여운을 곳곳에서 남깁니다. 돌아서라고. 다시 그릇된 길에서 회복되라고. 종합해 보면 갈라디아서 교회 안에는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사수하는 자들과 유혹에 넘어간 할례주의자들과의 대립이 심각했고, 이에 따라 반목이 심해 교회가 와해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점을 염려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2-5장에 걸쳐 본인의 십자가 신학을 충분히 설명한 뒤에 십자가 신학을 사수하지 못하고 할례 논쟁으로 인해 배교한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분하고 노여웠지만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 놓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십자가의 은혜를 사수하고 있는 올바른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 방법을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의 방법을 오늘 주일에 교우들과 나누고 두 번째의 방법을 다음 주일에 나누려고 합니다. 교회가 당하고 있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첫 번째의 방법은 이것입니다. ⁜ 끝까지 사랑하기입니다. 13절을 후반절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14절은 전체를 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이렇게 사랑하기를 강조한 바울은 본문 마지막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결정타를 날립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바울은 자신이 전한 십자가의 복음에서 떠나 다른 복음에 기웃거린 자들을 향하여 갈라디아서 1:6절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내놓았음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이상하게 여긴다는 표현은 대단히 유감스럽다는 표현의 에두름입니다. 직설한다면 어떻게 그렇게 배신할 수 있냐는 다소 격정적인 표현입니다. 해서 그들에 대한 감정의 격함을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을 유혹한 자들에게 여지없이 퍼부은 것입니다. 어떻게?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배신한 자에 대하여 바울은 충분히 그들과 교제를 단절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과격하게 바울이 전도여행을 통하여 보여주었던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그들에게 심각한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는 그들이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거짓 율법을 전하고 있는 자들에게 넘어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피 값을 주고 산 비가시적 교회였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가치요 영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한 사람의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바울은 동의할 수 없었고, 동시에 그 교회가 다시 세워지는 것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다잡이 하고 본문에서 배신자들을 향하여 강하게 정죄하며 반목하고 있는 십자가를 사수하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당부하며 권면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렇게 강하게 행한 권면은 바울이 교회공동체가 다시 회복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절치부심한 결과였고, 마음으로 갈라디아 교회의 십자가를 사수하는 형제들 역시 그것이 궁극적으로 이기는 것임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따르는 형제들을 향하여 결정적인 선언을 한 것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산상수훈 안에 들어 있는 보석 같은 구절을 나누겠습니다. 마태복음 5:38-44절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연히 기독교의 정금과도 같은 이 말씀에 누군가가 비아냥거리며 포털 사이트에 올린 댓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가장 저에게 아프게 다가왔던 댓글은 이것이었습니다. “정신병자들만이 할 수 있는 헛짓”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댓글에 또 다른 댓글로 이렇게 썼습니다. “ㅋㅋㅋ, 사이다다, 교회라는 정신병자 수용소에서나 지껄이는 망상들 등등” 가만히 보다가 저들의 비아냥이 가볍게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눈감고 있는 저들이기 저들은 이렇게 독설을 퍼부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5:38-44절의 산상수훈의 보석을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위에 댓글을 단 사람들처럼 그렇게 불신앙적인 마음을 갖고 잇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주님이 명하신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까? 이 시대를 살면서 이렇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정말로 있을까? 를 자문하고 보니 저들의 비아냥에 대하여 지옥에나 떨어질 인간들이니 그렇다고 싸늘하게 평가절하 할 수만 없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도 오십보백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도전해 보십시다. 마태복음 5:38-44절, 그리고 오늘 바울이 말한 본문 13-15절은 폐기처분해야 하는 말씀입니까? 암묵적으로 서로 사랑으로 감싸주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랑으로 보듬어 주는 일은 성서시대에나 있을 법한 일이지 오늘은 불가능한 말씀이기에 용도 처분해야 합니까? 만에 하나 그렇다면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한 가지의 물음에 대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교회가 왜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가? 에 대하여 답해야 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말씀이 폐기처분되어야 한다면 마땅히 교회도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니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이루고 행하는 곳이 유일하게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식이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이루어가는 이 땅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해야만 합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도록 만드는 기초석이 바로 사랑하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사랑에 종노릇하라고 갈라디아 교회의 십자가 사수파에게 권면한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이런 일이 다반사입니다. 내가 왜 저 사람한테 이렇게 저자세이어야 하지? 내가 왜 이 사람한테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나는 왜 저 사람의 몰상식에 끝까지 참아야 하지? 나는 왜 도대체 상식적이지 않은 저 사람에게 할 말을 못하지? 지난 30년 동안 품고 온 가슴에 있는 말들입니다. 그렇게 곱씹고, 또 곱씹고 또 곱씹은 결과 답은 이러했습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하는 식을 따라 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의 도식이 그대로 적용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이 할 수 없는 공식으로 일을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수학 2차 방정식의 공식대로 움직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식으로 움직이는 공동체입니다. 그 하나님의 식이 바로 사랑하기입니다. 교회는 사랑하기라는 음식을 먹으면서 성장합니다. 교회는 사랑하기라는 도식으로 서 갑니다. 교회에서 사랑하기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사랑하기는 전공필수 사항입니다. 만에 하나 교회가 사랑하기를 포기하면 그때부터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가 갖추어야 하는 무기는 사랑하기입니다. 왜 사랑해야 합니까? 주님이 세상을 대하신 식이 사랑하기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8절은 주님이 행하셨던 주님의 식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 유명한 요한일서 4:7-11절은 교회가 왜 사랑을 히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최고의 구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주님이 이 사랑을 먼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1절을 읽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랑하는 것은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않는 한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끝까지 승리하는 방법은 사랑하기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세인지체 여러분!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물고 뜯어 먹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식이 아닙니다. 더불어 교회에서 택하는 방식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의 식을 놓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끝까지 하나님의 식을 붙드는 곳입니다. 다양한 상황에 놓여 다양한 방식에 따라 물 흐르듯 타협할 것을 종용하는 시대입니다. 거기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방식을 선택할 때 언제나 하나님의 식을 택하여 한다는 절대 명제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식은 바로 끝까지 사랑하기입니다. 쉽지 않은 주님이 명하신 명제이지만 그것을 따라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13:10절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찬양하고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났도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우리를 살리게 하시려 화목제로 보내셨도다 화목제로 보냈도다 사랑하는 자들아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서로 사랑하면 서로 사랑하면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리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