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28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5:7-12 제목: 단호할 때는 단호해야 합니다. 서론) 지난 학기,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품이 착하기만 한 사람은 목회를 다시 한 번 생각하라.”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아마도 반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목사님이 착하지 않으니까 그걸 방어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뭐,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전했던 이 말은 돌아오는 학기에도 다시 전하려고 하는 데에서는 물러나지 않으렵니다. 왜? 목회 현장에서 30여 년 잔뼈가 굵어본 경험이 있는 목사는 이 내용을 웬만하면 대동소이하게 동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회는 성도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갖고는 안 됩니다. 경우에 따라 대단히 냉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서슬이 시퍼런 냉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공부해야 할 본문을 해석하면서 영적인 리더십에 있어서 빈틈이 없었던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먼저 이와 관련하여 성경에 기록된 내용 하나를 교우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언젠가 민수기 16장을 성서 일과로 읽으면서 목회자만 느낄 수 있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정이 솟구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민수기 13-14장을 보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가나안 정탐꾼에 얽힌 비극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란 광야의 한 처소였던 가네스 바네아에 도착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이제 북쪽으로 진군하여 가나안을 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갑니다.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내서 사정을 알아 오게 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가 도리어 악수(惡手)가 되었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하나님이 원하신 보고를 드린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보고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부정적인 보고를 한 10명은 물론 그들의 보고에 부화뇌동한 일체의 1세대 중에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광야에서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기막힌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선언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하나님의 이 선언 뒤에 광야를 행군하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사기가 얼마나 바닥으로 추락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울한 분위기의 절정을 경험하던 이스라엘은 민수기 16장에서 드디어 끝선을 넘어선 것 같은 또 다른 불행을 경험하게 되었음을 보고합니다. 소위 말하는 고라와 아비람과 다단의 반역 사건이었습니다. 레위의 둘째 아들이었던 고핫의 아들인 고라가 주동이 되어 아비람과 다단 그리고 동조하는 250명이 결기하여 모세와 아론으로 통치되던 광야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권에 반기를 든 사건이 벌어집니다. 고라가 반기를 들며 모세와 아론을 고소한 내용은 대체적으로 4가지였습니다. ⓵ 젖과 꿀이 흐르는 이집트에서 우리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서 죽게 한다는 것.(16:13) ⓶ 모세가 독재자가 되어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 권력을 독점한다는 것.(16:13) ⓷ 모세 때문에 우리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는 것.(16:14) ⓸ 모세는 대 사기꾼이라는 것.(16:14) 이 공격을 받은 모세는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억울함을 토로하는 대목을 읽어 보십시다. 민수기 16:15절입니다. “모세가 심히 노하여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는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지 마옵소서 나는 그들의 나귀 한 마리도 빼앗지 아니하였고 그들 중의 한 사람도 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하나님은 모세의 이런 억울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해서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민수기 16:20-21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모세의 토로에 응답하겠다는 즉각적인 메시지였습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통쾌한 하나님의 갚아주심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은 모세가 자신의 억울함을 강력하게 토로하던 15절과는 정반대로 사시나무 떨 듯이 갑자기 하나님께 대단히 급한 SOS를 보냅니다. 이어지는 민수기 16:22절을 읽습니다. “그 두 사람이 엎드려 이르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 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하나님의 통쾌한 복수극을 눈앞에 둔 두 사람, 모세와 아론이 갑자기 이렇게 돌변합니다. “하나님,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십니까? 고라 한 사람이 반역한 일을 가지고 어떻게 당신이 선택한 백성 모두를 진멸하시려고 한단 말입니까? 거두어 주옵소서!” 이렇게 급하게 반전의 기도를 하는 모세와 아론의 이야기를 들으신 야웨 하나님께서곧바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두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민수기 16:23-2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회중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방에서 떠나라 하라” 무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심판의 대상을 패역한 이스라엘 전체에서 반역한 고라, 다단, 아비람, 그리고 250명의 반역자로 한정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후에 일어난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땅의 꺼짐을 통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거주하던 장막만을 삼키게 한 심판을, 더불어 250명은 자기들이 들고 있었던 향로 불에 타서 죽게 되는 심판을 당했음을. 이 기사를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던 이유를 말씀드립니다. 영적인 리더는 참 두려운 자리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어 모세 자기를 맹폭하던 고라 일당에 대하여 너무나 억울하고 속이 상해 하나님께 신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신원을 들어 갚아주시기 위해 심판을 결심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을 들었던 모세는 갑자기 벌벌 떨리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민족의 멸절이라는 참극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공포 말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두려웠지만 너무나도 단호하게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다시 중보를 드립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중보를 우유부단하다고 야단치지 않으시고 당신의 생각을 바꾸시고 범죄자들만 심판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모호해서는 안 됩니다. 끊고 맺는 것에 있어서 단호해야 합니다. 우유부단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것도 좋은 것이고. 싫은 것도 좋은 것이어서 안 됩니다. 이제 저는 오늘 공부의 내용인 본문 안에서 만나는 바울의 리더십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본문 7-9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하면 네 가지의 사실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⓵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믿음의 경주를 잘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⓶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진리를 잘 따라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⓷ 이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누군가가 방해했다는 점입니다. ⓸ 그 방해는 거짓이므로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의 리더십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주지했다시피 갈라디아서는 주후 53-55년경으로 혹은 조금 더 넓게 잡는 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할지라도 주후 56년을 넘지 않습니다. 더불어 이 편지의 기록 장소는 에베소로 추측합니다. 이것을 전제로 교우들에게 제가 전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입니다. 주후 44-48년 정도로 산정한다고 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이 중요한 이유는 이 시기에 바울과 바나바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갈라디아 지역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1차 전도여행 시기에 두 사람이 복음을 전했던 갈라디아 지역은 중부 갈라디아 지역이고, 우리가 살피고 있는 본문의 배경은 갈리아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북부 갈라디아 지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개연성을 갖고 있는 점은 갈리아 지역의 갈라디아 지방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갈라디아 교회의 생성 연도가 1차 전도여행의 시기인 주후 44-48년 사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 이제 이런 연대적인 이해를 전제로 우리는 이런 지식을 갖게 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세운 뒤에, 여타 다른 지역에서 사역을 감당하였고 이후, 에베소라는 곳에 거하고 있을 때 갈라디아 교회의 와해라는 보고를 받은 것이 이미 갈라디아 교회를 떠난 지 짧게는 5년 이상이 지난 뒤라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목회자들이 갖고 있는 특성을 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몇 개월 전에, 길거리에서 낯이 익은 한 자매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저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셨습니까? 저를 기억하시지요? 많이 보고 싶었는데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시고도 새벽마다 목사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목사님, 생각나시면 제 이름도 불러주시면서 기도해 주세요.” 그 분이 저에게 던진 립 서비스를 어색하게 할 수 없어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신앙생활 잘 하십시오.” 그리고 돌아오면서 제가 이렇게 주절거렸습니다. “근데, 누구지?” 목사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중에 하나는 이름을 외우는 능력입니다. 저 역시, 섬겼던 교회의 신자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에는 선수였습니다. 직전 교회에서 500여명 되는 신자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6개월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팩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외우는 유효기간은 시무할 때까지입니다. 물론 바울과 관련하여 이 예화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없지 않아 있음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서 발견되는 대단함이 무엇이었습니까? 본인이 세운 교회에 대한 영적 상태를 놓치지 않고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담임목회자와 같은 맥락이 아니었기에 바울은 당시 그가 세웠던 교회들에게 대한 영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지원했다는 점은 바울에게서 배워야 하는 철저한 리더십의 장점입니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을 오늘 설교의 주제 교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어떻게 반응을 하고 있습니까? 이어지는 본문 10-12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이 구절을 바울이 갖고 있었던 두 번째의 중요한 영적 리더십을 발견하게 됩니다. ※ 영적인 단호함입니다. 바울은 경고합니다. 너희들을 거짓 권면(율법주의로의 회귀)으로 미혹한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할 것이라고. 어디 이뿐입니까? 거짓 권면에 넘어간 자들을 향해서도 서슬이 시퍼런 선포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어리석음에서 다시 돌아오라고 역설한 바울은 결정적인 비수를 던집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기록된 ‘베어버리다’ 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포콥폰타이’라는 동사의 직설적인 의미는 대단히 과격한 단어입니다. ‘스스로 거세하다’(CUT THEMSELVES)는 뜻입니다. 남성이 남성의 성기를 스스로 제거한다는 것은 무서운 행위입니다. 그것도 타인에 의해 자행된 폭력으로 거세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거세를 했다면 그건 얼마나 무섭고 단호한 결단이 들어가 있는 행위인지 두말 할 필요가 없는 행동입니다. 이 정도의 단호함이 없는 돌이킴은 허튼 일이라는 강력한 가르침이 본문 마지막 절인 12절에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바울이 단호하게 본인의 철저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역설한 본문 메시지를 마음에 담으며 함께 공유하고 살아내야 할 은혜를 찾고자 합니다. ※ 나를 어지럽게 하는 죄의 경향은 단호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13:8-9절을 소개합니다.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이 구절 하나만 가슴에 새겨도 뭉클 하는 감동을 얻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게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데 성공한 느헤미야는 단순히 성벽 재건만을 성공한 것 아니라 뜨뜨 미지근한 포로 귀환 이후의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영적으로 부흥시키는 데까지 성공을 하고 바사로 돌아갑니다. 문제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 있었던 그 사이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행된 것입니다. 그렇게 성벽 재건을 방해했던 도비야에게 제사장 엘리아십은 성전에 기명들을 보관해 두어야 하는 방 하나를 비워 친근하게 지낸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어 주는 기가 찬 일을 자행한 것입니다. 격분한 느헤미야는 도비야의 세간을 방 밖으로 내어 던져버리고 이방인 출신이었던 도비야로 인해 더럽혀진 성소의 방을 다시 청소하여 하나님께 드릴 제사의 기명들을 다시 원위치에 놓음으로 망가졌던 성전의 방을 청결하게 하는 장면이 느헤미야 13:8-9절입니다. 이 대목에서 간과할 수 있는 내용을 하나 접하겠습니다. 느헤미야가 바사로 갔다가 두 번째 총독으로 부임한 시기를 성경의 내증이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느헤미야 다시 예루살렘으로 얼마 만에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간의 갭 속에 자행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옛 구습으로 회귀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든지 옛 습성과 조의 종노릇하던 구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경종입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얼마든지 에베소서 2:1-3절에서 바울이 말했던 그 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경종입니다. 에베소서 2:1-3절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설교를 들으면서 경책하여야 할 은혜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나를 어지럽히는 일체의 죄의 경향은 단호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지난 주일에 남성 소그룹에서 나누었던 텍스트에서 존 스토트 목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영국의 명목적 신자들을 향해 이렇게 비수를 던졌습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에게 위탁하는 사람은 자신을 잃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p179) 많은 얍삽한 21세기형 신자들이 왜 예수께 자신을 위탁하지 않을까요? 너무 간단합니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는 믿을 테니까 깊숙이 내 삶에 관여하지 말라고 손 사례를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존 스토트는 이 비수를 던지고 나서 다음과 같이 정수의 메시지를 이어 던집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잃을 때는 오히려 자기를 발견하여 진정한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같은 책, 같은 페이지) 역전의 은혜를 놓치지 않는 교우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를 버리고 주님을 택하기로 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위탁하게 하는 것을 반대하는 일체의 세속적 경향을 제거해야 합니다. 과감하게 베어 내야 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경험한 많은 신자 중에 잘 믿는다는 편에 속한 자들은 이런 성도들이었습니다. “하나님, 99%까지 갔으니까 이 정도면 되지 않습니까? 나머지 1%는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하나님, 그 1%는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2014년 독서 목록 중에 저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었던 랭던 킬키의 ‘산둥수용소’의 끝부분에 보면 미국 그리스도인들 중에 상당수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도리어 반성서적인 착각에 빠져 있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불신자들에게 던지는 경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란 유한한 대상에게 궁극적인 종교적 헌신을 하는 것이다. 즉 죄란 자아와 자아의 실존, 또는 자아가 속한 집단에 최우선적인 관심과 헌신과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p,432) 정말로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엄청난 통찰의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포장하지 마십시다. 겉 멋든 종교인이 되지 마십시다. 나를 신앙의 결기에서 어지럽히는 일체의 것들을 단호하게 베어 내십시다. 스스로 제거하십시다. 성도는 단호할 때 단호한 사람들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을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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